152화. 새 보금자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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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파괴한 그곳이 정령사와 정령을 납치해 강제로 정화제를 만드는 유일한 곳은 확실하다 이거지?"
하벨이 수프를 먹으며 페트리오를 향해 다시 물었다.
"재차 확인한 결과 맞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했다.
하벨이 그렇게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면 몰랐던 사실이 아닌가.
"역시 이상하네."
하벨은 숟가락을 쥐면서 말을 던졌다.
"지금 도련님 몰골이요?"
카샬이 넌지시 꺼내는 말에 레디나가 다른 수프를 내려놓다 말고 그릇이 살짝 흔들렸다.
"…내 몰골이 그렇게 웃겨, 레디나?"
하벨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뇨.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왠지 속이 시원해서요."
"이게?"
"아, 그러면 더 시원해질 수 있게 욕해도 되나요? 저 생각보다 욕 잘해요!"
레디나가 키득거리자 하벨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디나는 진짜 하라고 하면 할 사람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욕을 하시면 안 돼요. 말로서 도련님을 압박하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헤레스가 진찰을 마치며 가볍게 싱긋거렸다.
"에이, 농담한 거예요. 도련님은 제 신이란 말이에요. 신께 욕을 할 순 없죠."
레디나가 두 손을 모아 경건함을 드러내자 하벨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진찰부터 받아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잖습니까. 어쩐지 파도를 몰고 오시는 그 모습이 불안하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숨을 내쉬는 페트리오의 모습에 하벨은 그의 머리카락을 확 잡고 싶었다.
"얘 지금 술 취했어? 지금 몇 번째 같은 말이야?"
[대장은 한 번 말해도 몰라! 그러니까 계속 말해줘야지!]
아라가 화를 내며 하벨의 손등을 깨물다 곧 화를 내는 얼굴 그대로 손등을 문질러주었다.
하벨은 그 모습이 기가 차 입술을 꽉 다물었다.
'분명 주변 상황은 달라졌는데, 어떻게 된 게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지.'
자신의 가족이 죽기 전에도 여기저기서 자신을 말리지 않았는가.
용왕이었을 때는 지금 칼리우스처럼 독도 통하지 않을 만큼 튼튼한 몸이었는데.
매번 들려오는 '얌전히 있으라', '왜 또 몸을 함부로 굴리느냐' 등 그 말이 얼마나 기가 찼는지 몰랐다.
'지금은… 진짜 내 원래 몸에 비하면 약하니 그나마 이해하지만, 오늘은 과하지 않은가.'
하벨은 아직도 멈추지 않는 그들의 걱정에 더욱 억울해졌다.
자신이 이 몸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데. 왜 다들 알아주지 않는 건지.
"너희는 내가 이 몸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르겠지."
하벨은 툴툴거렸다.
삑.
삐비빅.
카샬은 태연하게 하벨의 온도를 측정했다.
"37.6도입니다. 열이 좀 있네요."
하아.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망할, 카샬.'
하벨은 억울함에 수프를 한 입 떠먹다 문득 칼리우스가 생각이 났다.
"용용아?"
"응?"
멀뚱멀뚱 서 있는 칼리우스와 눈이 맞자 그는 갑자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왜, 왜 그래? 카샬이 때렸어?"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까 괜찮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 안도해서 그런가 봐. 아, 그리고 카샬은 나 안 때려. 나 먹으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챙겨주는데?"
"진짜 치졸하시네요. 들으셨죠? 저는 누구 함부로 안 때립니다."
카샬이 기가 찬 소리를 냈지만, 하벨은 한 귀로 흘리며 다시 물었다.
"혹시 내가 쓰러질 때, 폭주하거나 그랬어?"
[아니야. 이번에 용용이는 그러지 않았어. 오히려… 음.]
아라는 잠깐 생각했다.
하벨이 쓰러졌을 때 다들 혼란스러웠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 칼리우스는 달랐다.
[용용이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어.]
아라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입가를 핥으며 잠깐 생각했다.
'내가 정령수를 받지 못했을 때, 용용이가 무언가를 봤다는 건가.'
하벨은 칼리우스한테 손수건을 넘긴 뒤에 다시금 수프를 먹으며 우물거렸다.
정령수가 끊어져 강제로 기절한 뒤 여느 때처럼 또 멋대로 자신의 과거 기억을 보고 있었다.
'류아와…….'
따끔.
류아를 생각하자 왕실에서 왕이 죽으면서 떠올렸던 그 장면이 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죽은 줄 알았던 류아가.
하지만 하벨은 숨을 참으며 바로 다음 생각을 억지로 꺼냈다.
'…태련이를 보았고. 그리고 갑자기 꿈이 멈추더니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의 모습을 다시 떠올려봤을 때 왠지 모르게 틈의 세계와 닮아 있었던 것 같지만,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그 모습은 대부분 비슷했기에 기분 탓이라고 봐도 괜찮았지만, 어쩐지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으음.'
―…아가야, 아가야.
포탈을 타고 넘어온 후유증을 느끼고 있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말.
수도에서 열린 틈의 세계에서 괴물이 자신을 납치한 후에 꺼냈던, 불확실하긴 하지만, '아가야'라는 말.
"…도련님?"
헤레스가 잠깐 멍하니 있는 하벨을 불렀다.
"아, 잠깐 생각했어."
하벨은 활짝 웃으며 다시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쓰러졌을 때 뭘 봤어, 용용아?"
꿈속인지 뭔지 몰라도 머릿속에서 균열이 일어났기에 자신의 의식 저편에 아직 하벨 티에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지 않았던가.
"…으응."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던 칼리우스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아주 무서웠어."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도련님이 쓰러질 때, 흐릿하지만 검은 두 손이 도련님의 뒤에 나타났어."
"…뭐?"
하벨은 수프를 먹다 말고 금방 목에 걸릴 것 같아 가슴팍을 두드리며 되물었다.
혹시 그 균열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러니까, 검은 손이 이렇게."
칼리우스가 두 손을 들어 가슴 안쪽으로 살짝 구부렸다.
온갖 무서운 것들이 벌어진 그곳에서 하벨이 쓰러졌을 때, 검은 형상을 보았다.
그 어떤 어둠보다 어둡고, 하벨, 아니 하벨보다 더 거대한 존재 같아 그대로 짓눌리고 말았다.
하벨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도 그 위압감에 꼼짝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아닌 건 분명했어.'
칼리우스는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금 몸이 떨렸다.
만약 그 알 수 없는 존재의 얼굴까지 본다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칼리우스는 생각을 떨치며 천천히 호흡했다.
[진짜아……?]
아라가 조심스럽게 묻자 칼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으어어엇!]
아라가 소리치며 당장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그때 자신은 하벨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 몸은 못 봤어! 이 몸은 그런 거 못 봤다구!]
미지의 무언가를 향한 두려움이 몰려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 음. 어……."
레디나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여러 번 주저했다.
에이, 설마 그런 게 있을까.
레디나는 하벨에게 장난을 치려다 그가 진심으로 놀라고 있는 모습에 일단 물러섰다.
"저는 일단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저도."
레디나를 이어 페트리오와 카샬, 헤레스까지 손을 살짝 들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칼리우스는 그 침묵에 손톱을 뜯다 말고 시선까지 쏠리자 흠칫거렸다.
거짓말했다고 몰렸던 그때가 떠올라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달라.'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고 손톱을 뜯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아주 따뜻한 곳이기에 막연하게 주눅이 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칼리우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나는 거짓말한 적 없어. 정말이야, 도련님. 내가 봤어. 진짜 봤어!"
"알아. 네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어. 그냥 다들 못 봤다는 것뿐이니까 진정해, 용용아."
하벨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칼리우스가 보았다던 그 손과 꿈을 꾸다가 보았던 균열의 시기가 맞물렸다.
절대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칼리우스 덕에 더 확실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검은 손과 균열이 관련이 있다는 걸.
"그래요. 저는 칼리우스 님과 달리 사람이니 보지 못하는 게 있을 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칼리우스 님을 거짓말쟁이라고 하지 않아요."
헤레스마저 활짝 웃으며 칼리우스의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만 말씀해주세요."
"네가 거짓말쟁이라면 저기 앉아서 수프를 떠먹는 사람은 뭐가 되겠어?"
카샬이 태연스럽게 꺼낸 말에 하벨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거짓말쟁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뭐가 수상하다는 겁니까, 도련님?"
페트리오는 산으로 가버린 주제를 다시 멱살 잡고 끌고 왔다.
"그러니까……."
하벨은 이불에서 나와 슬그머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라를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요새 정화제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거든. 혹시 들어봤어?"
페트리오는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듣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그건 기밀 수준이 아닙니까?"
"그렇지. 좀도둑, 널 통해서 확인해본 거야."
웬만큼 중요한 정보를 페트리오가 놓칠 리가 없을 테니.
"정말이십니까?"
카샬이 넌지시 말을 던져보나 하벨은 오히려 당당히 질문했다.
"너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렇지, 카샬?"
"…예. 저도 모르던 내용이었습니다."
주춤거리며 대답하는 카샬의 반응에 하벨은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아무도 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게 자연스럽다는 걸 확인했다.
"이번 일을 통해 마법사 협회에서 정화제를 자금줄로 이용한다는 걸 알았잖아?"
하벨이 물음을 던졌다.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정령사를 납치해 인간도 아닌 도구로 만들고, 정령들을 부정한 것들로 가둬 강제로 정화제를 뽑아냈으니.
"네. 정말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 장소가 박살이 날 때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어요."
레디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다 말고 그녀는 멈칫거렸다.
"…아, 도련님께서는 기절하셔서 직접 보진 못하셨겠네요."
레디나는 칼리우스를 가리키자 숟가락을 쥔 하벨의 손이 잠깐 멈췄다.
"용용이가?"
"네! 칼리우스 님께서 그 장소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결계로 묶어버렸어요."
카샬이 하벨을 업고 밖으로 향할 때, 레디나 자신은 그 자리에 있었다.
나중에 하벨이 깨어나 묻게 된다면 누군가는 페트리오의 말에 호응을 해줘야 할 테니까.
―나도… 남을게.
당연히 하벨에게 갈 거라 생각했던 칼리우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자신과 합류했다.
그곳에 숨어 있던 적들까지 모조리 처리한 뒤, 저 장소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잠깐 말이 오갔다.
도중에 갑자기 칼리우스가 주저하다 손을 들었다.
―…있잖아, 나한테 맡겨 줄 수 있어? 들어보니까, 이 장소가 나중에 증거가 될 테니 필요하다며?
모두가 웅성거릴 때, 칼리우스는 마법을 시전했다.
그곳에 있던 마법사들이 전부 감탄할 정도의 결계가 펼쳐졌다.
자신이 보아도 거대하게 울리던 마나의 소리부터가 달랐다.
마치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만 같았다.
"결계라고?"
하벨의 고개가 다시 칼리우스를 향했다.
"으응. 내가… 결계를 만들었어. 마나는 많이 쓰지 않았어."
정령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곳에는 순수한 마나가 풍부했다.
"원래는 부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이 나중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들었어. 혹시 그래?"
"맞아! 잘했어, 용용아."
하벨은 활짝 웃었다.
증거는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보통은 장소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기에 자료를 챙긴 뒤에 부수는 편이 효율적이라 파괴를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결계로 증거 자체를 누구도 손댈 수 없게 만든다면야 그만큼 효율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하벨은 이전보다 더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화제가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이라면 시중에 풀리는 정화제의 양이 늘어나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줄어들어버렸잖아? 그래서 내가 이상하다는 말을 꺼낸 거였어."
"예. 확실히 도련님께서 이상하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입니다. 자금줄이 되려면 일단 팔아야 가능하니까요."
페트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 말대로 마법사 협회가 정령사와 정령들을 쥐어짜내 정화제를 만들어 팔았다면 오히려 시중에 풀린 정화제가 더 늘어나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인 게 분명해진 지금, 놈들이 정화제를 팔았음에도 시중에 풀리지 않았다는 건 누군가 정화제를 독점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하벨은 카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절 보십니까?"
"왜 보긴. 그대로 보고해달라고. 이건 마법사 협회의 장로급이 아니면 털어도 나오기 힘들 만큼 큰일이잖아? 게다가 이런 일은 나보다 가주님이 더 잘하실 테니까."
마법사 협회가 만든 정화제를 누군가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가장 큰 증거가 될 테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하겠습니다. 헤레스 씨, 도련님께서는 언제 움직일 수 있……."
"곧 갈 거야."
카샬이 헤레스에게 묻는 말을 하벨이 가로챘다.
"곧이라뇨? 지금 도련님께서 그럴 상태가 아닙니다!"
헤레스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지금도 아플 텐데 왜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건지.
"2시간 전만 해도 도련님의 몸에 생긴 푸른 돌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다시 가만히 있다고 하지만, 언제 또 그런 상태가 될지 모릅니다."
"정령들이 나한테 축복을 해줬어. 그 덕에 상태가 엄청 괜찮아졌고. 방금 네 입으로 말해줬잖아?"
"정령님들께서 도와주셨어도 지금 상태가 임시일 수도 있고, 밖에 비가 그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어제 속이 시원했지, 헤레스? 마법사 협회의 자금줄이 와장창 박살이 나버렸잖아."
하벨이 살살 긁자 헤레스는 순간 흠칫거렸다.
왜 아닐까.
인생에 있어서 몇 안 되는 통쾌한 순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저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헤레스 씨. 정신 차리고 도련님의 상태에 집중하십시오."
카샬은 얼른 헤레스가 정신 차릴 수 있게 그녀를 격려했다.
하지만 헤레스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처럼 계속 마법사 협회를 털 거야.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두 가지나 더 있어."
하벨은 헤레스가 흔들리는 사이 조용히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