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진상
* * *
정확한 구분을 위해 하벨은 자신의 땅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알렸다.
정령들의 새 보금자리이기도 하지만, 누구 땅인지는 잊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가 하벨, 네 땅이라고?]
정령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지자 하벨은 저절로 어깨가 으쓱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땅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벨이 당당히 꺼내는 그 말에 카샬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응. 이 몸도 들었는데? 땅보다 젤리가 더 좋다고 했잖아.]
"지금도 젤리가 좋지. 하지만 땅 주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어."
하벨은 카샬을 바라보며 우쭐거렸다.
지금 정령들은 모든 게 불안할 테지.
땅을 자랑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라 그들이 느낄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모르는 사람의 땅이라기보다는, 티에라 가문, 그것도 자신이 소유한 땅이라고 하면 훨씬 안심되지 않겠는가.
"땅을 소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뭐가 세워지거나 그러지 않았지만, 내 땅이 제법 넓어."
하벨은 겨우 정령들의 틈을 비집고 창문 너머에 아직 다 짓지 못한 벽을 가리켰다.
"저기 벽 안쪽에 있는 곳이 전부 너희가 지내도 되는 곳이야."
[정말?]
[여기는 뭔가 너무 좋아! 엄청 상쾌해!]
[맞아. 나무들도, 꽃들도 다 싱그러워 보여!]
한껏 들뜬 정령들의 목소리에 아라는 방실방실 웃었다.
그들이 하벨을 언급할 때마다 자랑스러움이 밀려와 한껏 행복해졌다.
"이제 내려도 되겠습니다."
카샬은 밖에서 정령 기사들이 주는 신호를 보더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마차에 매달려 있던 정령들도, 마차 안에 같이 타고 있던 정령들까지 우르르 튀어나왔다.
하벨은 그 모습에 얌전히 기다리다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긴장하지 마, 용용아."
"…하지만 그때처럼 갑자기 내가 이상해지면 어떡해."
카샬을 죽일 뻔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칼리우스는 자신의 손톱을 뜯었다.
"이전의 너랑 지금의 너는 달라졌어. 그건 내가 장담할게."
"솔직히 벌써 머릿속에 그 감정이 웅웅 하고 울리는 것 같아."
"그 감정이라니?"
"막 화가 나고, 뭔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잡아먹어."
"확인이라고? 뭘 확인한다는 거야?"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아.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알고 싶지 않아. 그냥 무서워."
칼리우스는 더듬거리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도 여기가 뭔가 다르다고 했지?'
하벨은 이곳에 오기 전에 룬델하고 나눴던 대화를 잠깐 떠올려보았다.
―물의 오염도가 상대적으로 아주 낮다더구나. 정령들이 지내기에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단다.
'물의 오염도가 낮은 거랑 상관이 있는 건가?'
하벨은 의문을 잠깐 접었다.
지금은 칼리우스가 폭주하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이전에 칼리우스가 폭주를 했을 때는 어찌저찌 무마하긴 했지만, 두 번째는 숨기기 어려울 테지.
"용용아. 저번에 마법사 협회가 운영하는 작업장 같은 곳에서 네가 마법사를 죽이지 않고 제압했잖아?"
[맞아. 용용이는 그때 마법사를 죽이지 않았어.]
아라까지 거들자 칼리우스는 몸에 힘을 주었다.
"응. 그랬어."
"그때 기분이 어땠어?"
"정말 기뻤어. 내 힘이 남들보다 조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어서 매번 얼마나, 어느 정도로 힘을 줘야 하는지 무서웠는데 그때 이후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어."
칼리우스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광대를 살짝 올렸다.
"지금은 내릴 수 있어!"
"용용아.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이 마차로 돌아오면 되는 거야. 그때처럼 카샬한테 질질 끌려서 마차에 타고 싶지 않잖아?"
하벨이 넌지시 말을 던지자 칼리우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 어! 카샬이 그렇게, 어, 힘이 좋을 줄은 몰랐어."
"그건 맞지. 솔직히 나도 카샬이 집사가 되기 전에 뭘 했는지 엄청 궁금하긴 하거든."
"그런 건 적어도 제가 없는 틈에 말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령 기사들에게서 돌아온 카샬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마차 문을 살짝 두드렸다.
"다 들렸어?"
"이걸 못 들으면 제 귀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
천연덕스러운 하벨의 말에 카샬은 기가 찼다.
고작 몇 발자국 차이가 아닌가.
하벨은 실실거리며 자리에서 내렸다.
"정령 기사들은 일단 주변에 물렸습니다."
카샬의 보고를 듣던 하벨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꺼냈다.
"생각해보니 억울한 게 있네."
"또 뭐가 억울하십니까? 진짜 억울한 건 접니다. 도련님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죄인이 된 얼굴로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거 말고. 나는 너한테 내가 누구였는지 처음부터 다 말해줬잖아? 너는 집사 이전에 뭘 했는지 왜 아무 말도 안 해줘?"
카샬을 보자마자 자신이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인 용왕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던가.
"저는 물어본 적 없습니다."
카샬이 딱 잘라 말하자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카샬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하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 짜내다 슬쩍 말을 던졌다.
"…혹시 그건 생각해봤어?"
카샬이 가진 검에 족제비를 닮은 정령이 동화되어 있질 않던가.
[그거?]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하벨이 넌지시 카샬의 검을 가리키는 걸 보며 바로 그쪽으로 날아갔다.
[맞아! 여기에 정령이 있었어. 이 몸한테… 갑자기 화를 냈는데. 이 몸도 만나면 소리칠 거야!]
주변 눈치를 보던 아라가 앞발을 들어 검을 때리고는 바로 하벨한테 매달렸다.
"…그건 아직,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카샬은 금세 비웃음을 지우며 머뭇거렸다.
"그래. 급할 거 없으니까."
하벨은 앞서 걸었다.
[아라야.]
하벨과 카샬을 구경하던 정령이 아라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대장, 잠깐만 갔다 올게. 용용아, 어디 가지 말고 대장 뒤만 졸졸 따라다녀.]
"그래. 갔다 와."
하벨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라는 하벨하고 카샬하고 칼리우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정령에게 다가갔다.
[왜에 이 몸을 불렀어?]
[어떤 정령이 검하고 동화됐다고?]
[맞아. 저기에 정령이 있는데 대장이 맛있는 물을 흔들자 모습을 드러냈어!]
[아, 하벨이 만든 그 물은 진짜 신기하더라. 엄청 맑고 보자마자 가슴이 뭉클거렸어.]
[맞아! 맛도 엄청 좋아! 이 몸은 매일 먹는데, 매일매일 먹어도 행복해.]
정령은 배시시 웃는 아라를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아라야.]
[으응?]
[혹시 있지, 정령수를 주면서 괴로웠던 적은 없었어?]
[한 번도 없었는데?]
아라가 눈을 깜박거리며 대답하자 정령은 안도했다.
아라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정령들에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정령수를 주는 게 괴로우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이 몸이 주지 않으면 대장은 맛있는 물로 싸워야 하는데? 그러면 대장은 엄청, 엄청 아파. 아마 저번에 쓰러진 것보다 더 아플걸?]
[그래. 네 마음 알아, 아라야. 나도 하벨이 너한테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 몸은 조금 시무룩해졌어.]
아라의 귀가 살짝 처졌다.
[네가 걱정되니까. 만난 지 하루도 안 돼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나도 웃긴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우리의 의견이었어.]
[의견……?]
[응. 너를 보면 볼수록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 이 몸이 작아서?]
아라의 눈동자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다.
[아마 그런 것도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린 좋지 않은 일을 겪어버렸어. 영원히 떨쳐내지 못하겠지. 네가 겪지 않았으면 해.]
[대장은 이 몸한테 그러지 않을 거야. 이 몸은 대장을 믿어.]
[그래. 내가 괜한 말을 해서 널 혼란스럽게 한 게 아닌지 모르겠네.]
[아니야. 이 몸은, 이 몸은 있지. 되게 기뻐.]
아라가 자신의 꼬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실 모든 정령하고 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럼, 다행이다! 엄청 걱정했는데.]
정령 역시 활짝 웃었다.
[아라야.]
[으응……?]
[우리 정령은 정령사의 도구도 아니고, 세상을 위한 도구도 아니야. 무조건 네가 먼저야.]
[어? 대장도 그런 말을 해줬는데!]
초롱초롱한 아라의 눈동자에 정령은 아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벨 티에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정령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라는 수줍게 손을 잡고 정령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갔다.
정령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는 하벨이 보였다.
[고마워, 하벨.]
"……?"
하벨은 정령이 꺼내는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라를 아껴줘서…….]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 말은 필요 없어."
[그것도 있고, 여기가 되게 마음에 들어서,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어.]
"조만간 거대 정화 장치도 지을 거야. 이건 티에라 가문에서 만들 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거대 정화 장치가 고장이 나서 오염된 물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구나.]
정령은 그 말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전부 씁쓸할 줄이야.
[얘들아!]
정령들이 저 멀리서 힘차게 소리쳤다.
하벨은 자신과 아라, 그리고 칼리우스를 부른다는 걸 알았다.
어제도 그렇게 묶어서 불렀으니까.
[잠깐 이리 와봐!]
"…나도?"
칼리우스가 놀라며 물었다.
자신은 카샬하고 같이 있을 생각이었는데.
[응! 너도, 칼리우스.]
"혹시 카샬도 같이 가도 돼?"
하벨이 꺼내는 말에 카샬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굳이 왜.
[물론이지. 그런데 우리가 안 보일 텐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정령들의 대답에 하벨은 잠깐 고개를 돌려 다른 마차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헤레스, 페트리오, 레디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신호를 보냈다.
잠깐만 기다려줘.
정령들이 뭘 보여주려고 하는지 몰라도 이 호기심을 해결해야만 했다.
하벨은 방치된 작은 저택과 밭이 보이는 곳을 넘어 손질도 되지 않은 숲으로 정령들을 따라 들어갔다.
[뭔가, 숲이 반짝거리는 것 같아.]
아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아. 공기도 엄청 맑고, 마나도 훨씬 더 풍부해졌어."
칼리우스 역시 주변에 던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숲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어쩐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청아한 나뭇잎 색에 하나 뜯어 간직하고 싶을 정도였다.
[우와아아!]
아라가 곧 눈을 크게 떴다.
숲속에 홀로 크게 자란 나무가 보였다.
'원래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하벨은 의아함을 드러났다.
어쩐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가.
[엄청 큰 나무다!]
아라가 나무에 찰싹 매달렸다.
킁킁.
[어, 정령수 냄새가 나는데?]
[맞아, 아라야. 우리가 방금 키웠거든. 이제 우린 여기에서 지내려고. 나중에 정령 기사들한테 말해둘게.]
정령들은 아라처럼 나무에 매달려 키득거렸다.
"…여기에 이런 곳은 없었습니다."
카샬이 살짝 경계하자 정령들은 카샬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찔렀다.
카샬은 흠칫거렸다.
꺄르르.
정령들은 그 반응에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가 했지이! 여긴 이제 우리 보금자리니까.]
[보금자리를 가져본 적 없는 건 아닌데 신기하게 벌써 마음이 들떠.]
"원한다면 너희의 영역을 더 넓혀도 괜찮아."
정령들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순환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걸 보자 하벨은 뭔가 신기했다.
여기에 더 많은 정령이 모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될까.
'이걸 보여주려고 불렀구나.'
하벨은 활짝 웃었다.
참 귀여운, 작은 친구들이었다.
[하벨. 혹시 여기에 네 물을 빌릴 수 있을까?]
정령들이 나무를 향해 손짓했다.
[네가 가진 그 물은 정말 특별했어. 아마 더 쑥쑥 자라지 않을까 싶어.]
"그거야 어렵지 않지."
하벨이 한 걸음 내디딜 때, 갑자기 아라의 몸에 빛이 어렸다.
[…어, 어?]
아라가 당황했고, 칼리우스가 덩달아 놀라며 아라에게 손을 뻗자 하벨이 제지했다.
"멈춰, 용용아."
아라가 또 진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