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복병이다!(2)
* * *
'…와.'
하벨은 깜짝 놀랐다.
쏟아지는 정령수로 순환의 길이 꽉 차버리자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손에 무언가 쥐어질 듯 말 듯 한 느낌.
'이전에도 느꼈지만, 역시 내 힘하고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용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이 최상에 있다면, 그 바로 밑이 정령수 일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을 테니까.
'여기서 조금 더 이 감각을 느낄 수 있다면, 내 힘을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벨은 희망을 품었다.
하벨 티에라의 몸이 용왕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이전처럼 다칠지도 몰랐다.
비록 하벨 티에라가 회귀자라는 사실로 자신의 뒤통수를 쳤지만, 몸을 돌려주기 전까지 소중히 하겠다고 약속한 건 자신의 의지였기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지를 뛰어넘을 만큼 소중한 게 생겨버렸다.
하벨은 아라를 쳐다보았다.
'이건 미안하다, 하벨 티에라.'
오염된 물로 이루어진 저 괴물이 이번이 끝일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상대하려면 물을 지배할 수 있는 용왕의 힘이 잠깐이라도 필요했다.
그렇기에 하벨은 하벨 티에라에게 다시금 사과했다.
[움직일게.]
하벨은 정령의 말과 함께 순환의 길에서 정령수가 회전하는 걸 느꼈다.
이번에는 자신이 건드리지 않았다.
위력이 이전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로 커다란지 알고 싶었다.
순환의 길에서 회전하는 정령수가 나오기 전에 아라가 양발로 하벨의 어깨를 누르며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회전이 빨라졌다.'
하벨은 아라의 개입으로 정령수의 속도가 빨라지는 걸 느꼈다.
이전에는 혹시나 했던 부분이 이제는 눈에 보였다.
'아라는… 뭐가 달라.'
순환의 길을 가득 채우며 회전하던 정령수가 단번에 작게 압축됐다.
[됐다!]
아라가 신나게 외치던 순간, 하벨의 상체가 흔들렸다.
몸 밖으로 빠져나온 정령수는 빛을 뿌리며 회전했다.
여러 가지 색을 품은 그 빛은 하벨의 손에 안착했다.
정화제였다.
[우리는 여기까지야. 부탁해, 하벨.]
정령들은 하벨을 바라보며 간절함을 담았다.
자신들의 손으로 저 괴물을 처단하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맡겨줘."
쉬익!
하벨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카샬의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검 때문에 두 쪽으로 나뉜 검은 물이 단번에 매서운 발톱처럼 변했지만, 카샬은 물이 움직이기도 전에 몽둥이를 휘두르듯 내리찍었다.
찰팍!
바닥으로 떨어진 검은 물은 그대로 바닥에 번져서는 악취를 뿜어냈다.
카샬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조차 역할 정도로 오염도가 높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안 돼. 다급하게 만들어서 힘이 흐트러질 거야.]
"길을 열어줘, 카샬."
하벨은 정령의 다급한 목소리에 괴물을 바라보았다.
팡.
하벨은 다른 손으로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우산을 꺼내 펼쳤다.
애초에 이 우산은 오염된 비를 막기 위해서 제작되지 않았는가.
"자동 비행 모드 실시."
하벨의 말에 우산이 하벨 근처에서 날아올랐다.
[이, 이 몸이 같이 갈 수 있게 해줘, 대장. 이 몸은 할 수 있어!]
아라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하벨에게 다가왔다.
하벨 혼자 둘 수 없었다.
"위험해, 아라야."
하벨은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걱정됐다.
[대장이 더 위험해. 대장은 정령사고, 혼자서는 안 돼. 이 몸이 있어야 한다구!]
아라가 손을 뻗어왔고, 하벨은 그 손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아라를 톡 건드렸다.
정령들을 감쌌던,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 일부를 떼어 아라를 덮었다.
[우와아아.]
아라는 자신을 감싼 물속에서 꼬리를 꽉 잡아서는 눈을 반짝였다.
"좁아도 참아줘."
[답답하지 않아. 오히려 이불 속에 있는 것처럼 되게 포근해. 이 몸은 이제 힘이 나!]
"그럼 길을 열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의 준비가 끝났다 생각하는 순간, 앞서 달렸다.
괴물이 오지 못하는 그곳을 단번에 넘어서며 뒤쪽에 하벨을 보호하며 검을 휘둘렀다.
'…대체 어디에서 검을 배운 거야?'
하벨은 뒤쪽에서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카샬의 팔이 흔들리는 걸 보며 정말 놀랐다.
검술 실력만큼은 정말 남달랐다.
"내가 붙잡을게!"
칼리우스는 카샬을 방패 삼아 하벨이 오는 걸 보면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린 순간, 노란빛이 괴물을 감쌌다.
쿠웅!
묵직한 중력이 괴물을 압박하며 그의 행동이 느려졌다.
'칼리우스가 마나를 더는.'
카샬이 옆으로 빠지고, 하벨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손바닥에 살포시 올린 정화제를 그대로 위로 던져서는 우산을 잡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라는 자신의 신호를 단번에 눈치채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물로 우산을 감싸고.
'소비하면 안 되는데…!'
떨어지는 타이밍을 노려 그대로 우산을 휘둘렀다.
휘이이익!
정화제가 괴물을 향해 세차게 날아갔다.
정화제마저 중력의 영향을 받자 칼리우스는 다급히 마법을 거뒀다.
노란빛이 사라지자마자 정화제가 괴물 속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퐁당!
마치 제 역할을 알 듯 정화제는 회전 속도를 높이며 괴물의 속부터 뜯어갔다.
다양한 빛깔이 순간 번쩍거렸고, 괴물의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쿠에에엑.
괴물은 검은 물을 토해내며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도련님!"
카샬은 괴물이 토해내는 저 물에 하벨이 닿을까, 그에게 다가갔다.
"걱정하지 마. 우산이 되게 좋아."
하벨은 우산이 알아서 움직이며 검은 물을 쳐내자 조금은 여유롭게 괴물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뛰어갔다.
'…과연 한 번으로 될지 모르겠다.'
의문이 밀려와 하벨은 바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오오!]
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입꼬리를 가득 놀렸다.
검은 물이 점점 옅어지는 모습 자체가 너무도 예뻤다.
[어서, 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라! 얍!]
아라는 꼬리를 꽉 쥐어서는 정화제를 응원했다.
이대로 깨끗해져서 물이 예쁜 소리로 흐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철컹.
하지만 바람 소리 속에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불길한 소리에 하벨은 숨을 멈췄다.
아라의 귀가 파닥거렸고, 칼리우스가 당장 마법을 발동시켰다.
"마법이 부셔……."
칼리우스가 발동시킨 마법을 반쯤 피해.
카가가가각!
카샬의 검을 맞부딪히며 몸이 또 갈라져도.
검은 물은 해방과 함께 그물처럼 정령들을 향해 검은 손을 뻗어갔다.
'안 된다. 저건.'
하벨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양손에 물을 휘감아서는 괴물을 붙잡았다.
치지지직!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딜……!"
하벨은 그대로 정령수로 만들어진 물로 괴물의 움직임을 억지로 틀었다.
"도망쳐!"
정령들이 저 손아귀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저 괴물 속에 얼마나 많은 정령이 있을까.
콰콰콰콰.
하벨 머리 위에 뜬 우산 위로 검은 물이 쏟아져 내렸다.
쫘아악.
검은 물이 손아귀처럼 벌어지며 방해하지 말라는 듯 하벨에게 다가오는 카샬을 덮쳤다.
"빌어먹… 멈춰!"
카샬은 검을 휘두르자마자 순간, 칼리우스를 향해 소리쳤다.
엄청난 힘이 느껴지질 않는가.
"미쳤어! 도련님까지 죽일 셈이야?"
"저러면 하벨이 위험해!"
칼리우스는 하벨을 둘러싼 검은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마지막 발악이야. 나는 하벨을 구하려는 거라고."
괴물 속에 정화제는 아직도 있었다.
물의 색이 지금도 연해지고 있지 않은가.
마법으로 눌러야 했다.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지자 이미 정화제 때문에 팽팽해진 검은 물이 출렁거렸다.
흠칫.
하지만 칼리우스는 멈췄다.
색이 옅어진 검은 물 틈으로 작은 존재가 보였다.
"…정령이다."
"안 돼…!"
하벨가 외치자 칼리우스는 크게 놀랐다.
물을 끌어오던 아라마저 그 소리에 멈췄다.
'빌어먹을. 혹시나 했는데 진짜 정령이 저 속에 또 있다니.'
하벨은 이를 악물다 옆쪽에서 물이 느껴지자 다급히 눈동자를 돌렸다.
"멈춰, 아라야. 하면 안 돼."
[이 몸은 할 수 있어! 이 몸도 할 수 있다구!]
"…크흑, 안 돼."
제아무리 정령수로 만들어진 물이라고 해도 오염을 피할 수 없는지 손아귀에서 불에 탄 듯한 통증이 솟구쳤다.
아라가 물을 사용하면 그 물을 타고 오염이 기어오를지도 몰랐다.
얼마나 아프겠는가.
"…크윽!"
하벨은 다시금 신음을 토하며 밀려오는 정령수로 힘겹게 오염을 막았다.
뽀글뽀글.
정화 장치에 거품이 올라왔다.
'시간이 없다.'
탁.
하벨은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움직였다.
정령들이 도망칠 수 있게 반은 괴물 뒤쪽에 울타리처럼 설치했고, 나머지 반은 자신을 덮치지 못하게 우산 위를 덮었다.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힘이여, 좀 연결되거라.'
탁.
저번처럼 억지로라도 힘을 연결하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제발.'
[히, 힘을 빌려줘!]
아라가 뒤를 돌아보며 도망치고 있는 정령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몸의 정령수만으로는 안 돼!]
힘이 더 필요했다.
[대장이!]
하벨이 저 오염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대장이 위험해!]
아라는 하벨에게 손을 뗀 상태에서도 정령수를 밀어 넣으면서 정령들에게 향해 손을 뻗었다.
'멀어… 졌나?'
하벨은 이제 시선을 돌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손가락부터 갑자기 찌릿한 느낌이 이어졌다.
마치 자신의 기억을 읽어달라는 것처럼 억지로 머릿속에 기억이 번져갔다.
치직.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건… 이건 안 됩니다! 사람으로서 이것만큼은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뭘 말하는 거지?'
궁금증이 들 만큼 남자가 꺼내는 목소리에 절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치직.
장면이 바뀌었다.
갑자기 피가 뿌려졌다.
싸늘한 시선이 보였다.
―연락해. 반은 성공했다고.
치직.
장면이 또 바뀌었다.
숲을 부서트리는 모습 너머로 거대 정화 장치를 해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는 건…….'
거대 정화 장치가 해체되기 전 사건이 맞았다.
삐이이익!
"…허, 허억!"
하벨은 갑자기 몰려오는 정령수와 함께 흐려지던 의식이 돌아왔다.
삐삐삐!
이어 정화 장치가 시끄럽게 울렸고, 코 밑이 뜨거워졌지만, 하벨은 몽롱한 기분과 함께 그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아라가 힘껏 손을 뻗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갑자기 랜턴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사라졌다.
아라에게서 비치던 빛이 더 커지지 않았는가.
검은 불꽃이 멸망의 원인을 나타낸다면, 그 반대의 빛은 죽으면 멸망의 원인이 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하벨은 숨을 내쉬며 정령수를 느꼈다.
'이건 아라의 정령수만이 아닌데?'
하벨의 시선은 아라 뒤를 향했다.
정령들에게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무언가가 아라에게 향하고 있었다.
'정령들의 정령수가… 아라를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다고?'
하벨은 정령수 이외에도 다른 걸 느꼈다.
힘내라는.
할 수 있다는.
정령의 강한 의지에 비롯된 교감.
몸으로 타고 들어오는 그 힘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되어 퍼져나갔다.
'고맙다.'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응원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조금 전 고통마저 사라지고, 가슴이 벅차고, 몸마저 가벼워졌다.
머릿속으로 새롭게 얻은 힘을 떠올리며 밀려오는 정령수를 회전시켰다.
하벨의 눈동자에 잠깐 이채가 어렸다.
'정화제도 결국, 정령수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벨은 회전하는 정화제가 몸 밖으로 나오자마자 새로운 힘을 사용했다.
화르륵.
정화제에 불이 붙었다.
모든 걸 태워버릴 순수한 불꽃처럼 보였다.
하벨은 자신을 보호하던 우산을 뒤로 젖히며 정화제에 타오른 불꽃을 쥐고, 손을 뻗었다.
제 손이 괴물의 몸에 닿았다.
왈칵, 피가 쏟아졌다.
삐이이익!
정화 장치가 또 시끄럽게 울었다.
하지만 하벨은 똑바로 서서는 바라보았다.
정화제가 거미줄처럼 갈라져 괴물의 몸을 파고들었다.
화르르르륵!
불꽃이 뒤이어 솟구치자 하벨의 눈동자가 덩달아 같이 빛이 났다.
따뜻했다.
아침 해를 보는 것처럼 눈이 부셨다.
타타탓!
타오르고, 타올라 검은 물을 삼켜버리는 모습을 보며 하벨이 뒤로 물러서다 휘청거렸다.
자신의 등을 잡은 여러 개의 손을 느껴졌다.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타네. 콜록!"
피가 또 울컥 내뱉어졌다.
"그 입 닥치고 계십시오!"
카샬은 서둘러 주사기를 꺼내 하벨에게 놓았다.
잘 탄다니. 지금 그게 할 말인지.
불나방도 아니고, 물의 저주에 걸린 사람이 오염된 물로 뛰어들다니.
"장갑! 당장, 벗겨주십시오!"
카샬이 주사기를 하나 꺼낼 사이 아라와 칼리우스가 장갑 한 짝을 손에 쥐었다.
[대장. 대장…….]
칼리우스는 아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다 채 벗기지 못한 장갑까지 빼냈다.
"괜찮아, 아라야."
칼리우스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라를 보며 꾹 참았다.
형인 자신이 울 순 없었다.
"손등에 혹시 푸른 게 있습니까?"
카샬이 주사를 놓은 상태에서 정화 장치를 살피며 물었다.
[없, 없어! 푸른 건 없어!]
아라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다행이었다.
눈물이 하벨의 손등에 떨어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정령수를 통해 하벨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끝까지 자신은 물론, 정령들까지 걱정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을까.
"없어! 푸른 건 없어!"
칼리우스까지 소리치며 아라의 말을 전해줬다.
보기만 해도 불안했던 그때의 감정이 몰려와 울먹거렸다.
"오… 늘은 살만해. 괜찮아."
하벨은 아직도 자신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우산 때문에 그림자가 진 상황이 갑자기 웃겼다.
대체 얼마나 튼튼하게 만든 건지.
하벨 티에라를 향한 룬델의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발, 제발 말 좀 그만하십시오."
간곡한 카샬의 부탁에 하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정령들이 자신의 시선 안에 있었다.
'…검은 물이 사라진 건가.'
타탁.
불꽃이 아직도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랜턴이 꺼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어떻게 됐을까.
저번처럼 반영구 정화제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는데.
피식.
하벨은 웃었다.
아라도 그렇고, 정령들까지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예쁘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만, 참 예뻤다.
"…하."
카샬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출발신호를 알리는 버튼이 된 것처럼 우르르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대장!]
[하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