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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99화 (99/415)

99화. 복병이다!(3)

* * *

밀려드는 정령들을 이기지 못하고 하벨은 뒤로 쓰러졌다.

[고마워, 하벨!]

[네가 우리를 구해줬어!]

정령들은 하벨을 꽉 안아주었다.

[엄청… 엄청 무서웠는데, 고마워.]

이 얼마나 고마운 아이인가.

자신들을 위해 이렇게 몸을 바치며 나서준 아이가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까.

미안하고, 고마워서 정령들은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벨은 팔이 올라가지 않아 힘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령들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으허헝, 고마워! 저 속에서 너무, 너무… 무서웠어.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해도 소리가 닿질 않았는데. 네가… 구해줬어!]

정령들 속에 누군가 울부짖으며 하벨의 옷을 적셨다.

'…다행이다.'

하벨은 억지로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정령들을 꽉 안아주었다.

찌르르.

조금 전 그들과 교감을 했음에도 또다시 교감이 느껴졌다.

부르르 끓던 순환의 길이 천천히 가라앉자 조금은 숨을 자연스럽게 쉴 수 있었다.

'네 번째 막이 생겼다. 그리고.'

하벨은 바짝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위로 올라간 입꼬리에 카샬의 얼굴이 구겨졌다.

'불이 생겼다.'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도련님?"

카샬이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신음을 토해냈다.

"왜, 왜 그래?"

하벨을 일으키려던 칼리우스가 다급히 물었다.

[대, 대장 손이! 손에서 피가 나!]

아라가 기겁하며 하벨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런."

하벨은 이제야 고통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손에 낀 검은 장갑 때문에 몰랐을까.

갑자기 큰 충격이 몰려오듯 시야가 흔들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좋지 않았다.

이대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아 입을 열었다.

"…보여줘."

아라가 무어라 말을 꺼내는 것 같았다.

'비켜줘'였을까.

정령들이 가렸던 시야가 열렸고, 하벨은 활짝 웃었다.

후.

랜턴이 꺼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

그곳에 혼자 빙그르르 춤추는 정화제가 있었으니까.

'다행이다.'

딸깍.

마치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알려주듯 머릿속에 또 그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긴 정적.

전력이 끊어진 것처럼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 * *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조용히 속삭이듯 들려오는 말에 자신은 눈을 떴다.

"제가 누구인지, 아니, 어떤 존재인지 말입니다."

이전처럼 그곳에 하벨 티에라가 서 있었다.

"머릿속이 정리되셨으면 좋겠네요."

여전히 무표정한 채 차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하벨 티에라를 향해 입을 벙긋거려보나, 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제가… 원망스러우실 겁니다."

조심히 입을 연 하벨 티에라는 천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 과거를 알면서도 직접 하지 않냐고 제게 물으시겠죠. 당연한 질문일 겁니다."

'그래. 내가 가장 묻고 싶은 물음이었다.'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다, 곧 깊은 숨소리와 함께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겁니다. 저도……."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가 떨려왔고, 실망감에 물들었다, 슬픔에 찬 눈빛을 지으며 분노로 찬 주먹을 꽉 쥐다 기어코 절망감 속에 말을 삼켰다.

"무슨 말씀을 드리든 제가 미우실 겁니다. 알아요. 저는 당신께 속죄하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염없이 잘못을 고하는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살짝 어긋난 하벨 티에라의 시선만 제외한다면.

'이건…….'

하벨은 그제야 알았다.

마치 미래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 준비한 영상 같았다.

"하지만… 제 기억은, 현실입니다."

하벨 티에라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제가 직접 보고 온 과거의 기억."

'그래서.'

하벨은 그 사실을 알자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자신의 몸에 누가 왔는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랜턴이나 던져주고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건가.

"하지만 기억의 조각이 완성되지 않으면 그조차 볼 수 없습니다."

하벨 티에라는 마치 조금 전 '딸깍' 소리 이후에 어떤 기억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이 또한 대비했을까.'

"부디, 기억해주세요."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에 또 간절함이 섞여갔다.

동시에 하벨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대체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는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하벨 티에라를 아껴준 가족들조차 내버린 행동이 아닌가.

"제가 바라봤고 직접 알아낸, 멸망의 원인과 멸망을 일으키는 중대한 역할을 한 자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들려오는 그 소리를요."

딸깍.

어디선가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 들렸던 그 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디……."

하벨 티에라는 하고 싶은 말을 삼키다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 * *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하벨은 눈을 떴다.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뭐지?'

하벨은 이불을 더듬거리다 아라가 없다는 사실에 다급히 상체를 일으키다 손바닥이 쓰라려 쳐다보았다.

양손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오른손이 더 두꺼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닌 듯했다.

'아.'

하벨은 정령들을 공격하려고 했던 검은 물을 막으려 손으로 움켜쥔 기억을 떠올렸다.

머리보다 몸이 움직여버린 걸 어떡하겠나.

하벨은 숨을 들이마시고 깊게 내쉬었다.

방금 하벨 티에라와 만나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한 겁니다. 저도…….

하벨은 그가 왜 저 말을 했는지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의 친화력이 그렇게나 높으면서도 물을 다루지 못했다.

정령사 가문의 막내이면서도 정령을 보지 못했고, 불쾌한 냄새 때문에 정령들조차 꺼리지 않는가.

'그래도 너는 잘못됐다.'

하벨은 랜턴을 바라보았다.

설령 하벨 티에라가 눈앞에 있더라도 몇 번이라고 그 말을 꺼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손에 넣고자 남에게 미루는 행동은 무얼 해도 용서하기 어려우니.

하벨은 불편해진 손을 꼼지락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티에라 저택은 아닌…….'

탁.

잠깐 어지러워 다급히 링거 거치대를 붙잡았다.

여전히 검은 물의 후유증이 컸다.

손등이 푸르게 변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뭔가 부산스러운데?'

어제와 달리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제법 컸다.

아라는 또 어딜 가고.

하벨이 창문 밖을 바라보자 마차 여러 대가 보였다.

―…막내야. 제발, 몸이 이상하면 돌아와. 무조건. 만약 돌아왔을 때 저번이랑 비슷한 상태라면 내가 끌고 집으로 갈 테니까.

갑자기 떠오른 라르웬의 말에 하벨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링거 거치대를 끌며 문을 열자 칼리우스와 시선이 맞았다.

탁!

짐을 떨어트린 칼리우스는 그대로 깜짝 놀랐다.

"하, 하, 하벨!"

[히, 히이익!]

칼리우스의 목소리에 아라의 목소리가 섞여 있자 하벨은 그제야 방긋 웃었다.

둘을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미, 미안해. 내가 너무 시끄러웠지?"

칼리우스는 떨어트린 짐을 다시 주섬주섬 주우며 말했다.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시끄러웠던 모양이었다.

[대장! 지금 많이 아파?]

아라가 하벨에게 날아와 꼭 안아주었다.

[아프면 이 몸이 카샬을 불러줄게.]

"그래! 이게 아니지. 하벨은 지금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해! 의사가 와서 요양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칼리우스는 짐을 줍다 말고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할 말을 떠올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을 보았다.

이틀 사이 열도 팔팔 끓었고, 의사가 저 방에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던가.

카샬과 라르웬이 들어가도 된다고 했지만, 혹시나 시끄러워서 하벨이 깨면 어떡할까, 한두 번 들어간 게 전부였다.

계승되는 용의 지식 속에 용의 몸이 약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몸에 좋은 걸 먹어야 할 텐데.'

칼리우스는 하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설마,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는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어? 조만간 티에라 저택으로 돌아간다던데?"

[맞아. 라르웬이 대장을 보자마자.]

아라는 힘껏 눈에 힘을 줘서는 목소리도 할 수 있는 만큼 내리깔았다.

[티에라 저택으로 돌아갈 테니까, 짐 싸! 이렇게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어.]

'하나도 안 무서운데.'

하벨은 키득거리며 아라를 쓰다듬다 칼리우스가 쥔 짐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짐을 왜 네가 들고 있어?"

"어제 라르웬하고 말을 나눴어."

"형님하고?"

"아! 이럴 게 아니라, 침대에 앉아 있어. 짐만 가져다주고 올게."

칼리우스는 제 몸을 넘어선 짐가방을 가볍게 들었다.

"그러니까, 짐을 왜 옮기……."

[어엇!]

아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아라 너는 왜?"

[대장이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라르웬이 말했어! 이 몸도 금방 갔다 올게.]

하벨은 아라도, 칼리우스도 사라져버린 복도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네가 정신을 잃은 지 이틀 정도 됐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정령의 목소리에 하벨은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흠칫거렸다.

"…지금 나한테 말을 한 거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정령은 토끼 귀만큼이나 긴 귀를 쫑긋 세웠다.

하벨에게 다가가다 말고 앞발로 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얼어붙은 하벨의 표정을 보더니 정령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섞인 눈빛을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어. 진심이야.]

"……?"

[네가 이번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들었어. 계속 응원할게, 하벨.]

자신들을 위해 움직이는 저 아이가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까.

정령은 발소리가 들리자 그대로 창문 틈으로 날아갔다.

룬델이 부탁하지 않았던가.

―하벨이 정령사가 되었지만, 이제 막 새싹을 피워낸 수준이야. 당분간은 정령 기사든 누구에게든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면 해. 부탁이야. 모두 내 말을 들어주겠나……?

정령은 얼어붙은 하벨의 표정을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탁.

발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흠칫거렸다.

한숨 소리를 이어 카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혼자 복도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좋은 아침, 카샬."

카샬은 태평하게 손을 흔드는 하벨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눈 밑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조명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도 살 만하신가 봅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시죠."

"이틀이 지난 건 알고 있어. 그 뒤에 어떻게 됐어?"

카샬은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암묵적인 압박에 하벨은 자신이 한발 물러섰다.

"사과는 됐어, 카샬."

"이번에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잘못한 게 없지. 검은 물을 처리할 방법은 정화제뿐이니까. 넌 제 몫을 했어."

하벨은 안으로 들어가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번 틈의 세계와 다르게 카샬은 자신을 지켰다.

할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도련님께서는 혼이 나셔야 합니다. 둘째 도련님께서 그렇지 않아도 많이 참고 있으십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카샬은 자신의 오른손을 올려 손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누가 무식하게 손바닥이 뚫리는 것도 모르고 잡습니까?"

"뚫렸어?"

카샬이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자 하벨이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좀 아프더라니."

"완전히는 아니고, 반쯤 그랬습니다. 보이십니까?"

카샬은 링거를 가리켰다.

"정화제가 아주 쭉쭉 들어가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더 진한 상태라 지금 저걸로 버티고 계십니다. 당분간은 정말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알았… 쿨럭."

하벨은 갑자기 올라오는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자 놀란 눈으로 카샬을 보았다.

손수건을 건네며 카샬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보셨습니까? 지금 겉은 멀쩡, 아니, 멀쩡하진 않으시지만, 어쨌든 오염이 손바닥을 타고 몸속으로 오염이 들어간 상태라 제가 정말 간곡히 말씀드리는 겁니까."

카샬은 하벨이 문틀을 잡고 비틀거리자 그를 부축했다.

"제가 도련님을 모신 이후로 이렇게 많은 정화제가 들어간 적은 처음이라 헤레스 씨하고도 연락했습니다. 일단은 괜찮다고 하는데, 역시 직접 살펴봐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여기저기 혼날 일이 많네."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아니."

"……?"

카샬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말했지? 나는 겁쟁이라고."

자신이 막지 못했다면.

그곳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누구였는가.

"누굴 노린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할 만큼 용감하지 않아."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검은 물을 붙잡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구속 마법.

유난히 적었던 결계.

탐스럽게 모인 클로저들까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카샬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틈의 세계가 열린 건 우연이었겠지만, 구속 마법이 금방 풀린 건 우연이 아니라고 보이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하벨?"

하벨은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실실 웃었다.

발소리가 하나 더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라르웬일 줄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형님. 제가 막지 않았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하벨은 혼이 덜 나고자 일단 빠져나갈 구멍부터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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