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복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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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하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령들이 길을 안내할 동안 안개로 된 결계는 물론 검은 물도 없고, 그저 거대 장치가 있었던 흔적만 남은 장소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오면서 생각했다.
만약 저번처럼 검은 물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전처럼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용왕의 힘을 끌어올릴 수는 있을지.
그렇게 몇 번이나 생각했기에 평화롭게 펼쳐진 상황을 보자 살짝 힘이 빠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랜턴의 검은 불꽃이 아직 꺼지질 않았다.
"대충 살펴봤는데 근처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카샬은 검을 만지작거리며 하벨에게 걸어왔다.
하벨의 시선이 흩어져 무언가를 찾는 듯한 정령들과 땅에 주저앉아 이전 페트리오가 그랬던 것처럼 명상에 들어간 칼리우스를 향했다.
'칼리우스를 데리고 오길 잘했네.'
공터라고 하기에도, 숲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이곳에 흔적을 찾기란 힘들어 보였다.
밖에서 봤을 때처럼 억지로 흔적을 지우려 숲에 불을 낸 듯하니.
[대장.]
이곳을 빤히 바라보던 아라가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아라야."
[이 몸은 기분이 좋지 않아.]
"거대 정화 장치가 사라져서?"
[응. 방금 여기에 오자마자 땅이 이 몸한테 물이 졸졸 흐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여긴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풀 포기랑 막 땅이 파인 게 전부잖아.]
시무룩함이 섞인 아라의 표정에 하벨은 가볍게 옆구리를 간질이며 말을 꺼냈다.
"너한테 알려주고 싶었나 봐."
[진짜? 그럼, 땅이 이 몸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는 걸까?]
"아라 넌 어떻게 하고 싶어?"
[이 몸은 도와주고 싶어. 이 몸은, 이 몸은 땅이 보여준 것처럼 여기에 물이 졸졸 흘렀으면 좋겠어.]
아라는 망설이듯 하벨을 쳐다보다 그에게 더 다가가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물이 오염되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게 정말, 정말 어렵다고 세렌도, 루룸도 그렇게 말해줬어.]
이전에 하벨이 보여준 건 기적이다.
세렌과 루룸은 물론 티에라 가문에 있는 정령들 모두 그 이야기를 꼭 하곤 했다.
[그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은 건 이 몸의 욕심일까? 대장, 이걸 욕심이라고 말하는 걸까?]
"맞아. 그걸 욕심이라고 하는 거야."
하벨은 아라가 하나씩 하나씩 감정을 익히고 생각을 뻗어 나가는 사실이 기특했다.
지금도 이 말을 꺼내려고 얼마나 고민했을까.
[아니. 내 생각에 욕심은 아니라고 봐.]
아라의 말을 들은 정령이 다가와 말했다.
[정말?]
아라가 고개를 슬쩍 들며 물었다.
[그래. 정말이야.]
정령은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거대 정화 장치가 작동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금은 사라진 물소리를 되짚어갔다.
[하벨,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도 돼?]
"얼마든지 물어봐."
찌르르.
하벨은 정령의 물음에 교감도 하고, 호감도 쌓는 이 과정에 즐거움을 느꼈다.
[거대 정화 장치가 사라지면 결국, 사람한테도 영향이 갈 텐데, 왜 이걸 건드리는지 모르겠어. 너는 이해할 수 있겠지?]
"아니.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해. 하지만 적어도 이건 알아."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는 정령의 말똥말똥한 눈빛에 미소를 지었다.
정령만큼 제 감정에 순수한 자가 있을까.
"그냥 현재만 바라보기 때문이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발전조차 없이 그저 살육에 취한 더러운 수족들.
그들이야말로 현재만 살았던 놈들 중 하나였으니.
모든 존재가 저들 밑에서 미래를 뺏기고 죽음만 생각했던 때에 자신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태어났다.
파르르.
갑자기 공기가 떨려오자 카샬이 당장 하벨 앞으로 가 손을 뻗었고, 하벨은 앞을 바라보았다.
부러지지 않은 나무들 틈으로 무언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피부가 떨리고 털이 바짝 섰다.
[대, 대장! 대장!]
아라가 갑자기 소리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벨은 허공에 굳은 아라를 품에 안으며 옆을 쳐다보았다.
아라와 말을 나누던 정령마저 굳어 있자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바쁘게 움직이던 정령들이 일제히 그물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정한 것들은 이제 없을 텐데?'
꼭 부정한 것들을 마주한 것 같은 반응에 하벨은 눈동자를 굴렸다.
이미 남은 부정한 것들까지 다 치워버리지 않았던가.
"…뭔가 다가오고 있어."
눈을 번뜩 뜬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주아주 불길한 존재가.
"걱정하지 마, 하벨."
칼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 앞으로 튀어갔다.
쉬이이익!
바람을 타고 뻗어오는 무언가가 단번에 그들을 찔러왔다.
팅!
번개와는 다른 노란색을 띤 빛이 칼리우스를 감싸며 그 무언가를 밀쳐냈다.
[…어. 어.]
아라의 눈이 커졌다.
"저건 대체……."
검을 든 카샬은 바닥으로 질퍽하게 떨어진 무언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벨에게 들었던 것과 닮아 있었다.
속이 역해졌다.
쿠웅.
하벨은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에 눈을 찌푸렸다.
'…오염된 물.'
그 존재가 나타났다.
랜턴이 알려줬고, 몇 번이나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내가 말한 검은 물이야."
하벨은 카샬에게 말하다 말고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처럼 얇은 천이 손바닥과 목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질퍽.
사람처럼 형상을 어설프게 이룬 물은 바닥으로 검게 물든 물을 떨어트리며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고오오오.
존재만으로 모두를 긴장시켰다.
짤랑.
발목에 혼자 반짝거리는, 마치 쇠고랑을 닮은 게 걸려있자 하벨은 시야를 넓게 보았다.
'저게 날아온 곳과 연결되어 있다.'
하벨의 눈에는 쇠고랑은 물론 똑같이 빛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보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이었다.
"구속 마법이야."
칼리우스가 마법을 거두며 말했다.
뭔가 걸렸다.
구속 마법인데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뒤로 와, 칼리우스."
하벨은 그제야 칼리우스가 쓴 마법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마나가 바닥이 났으면 얌전히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나.
"안 돼. 저건 위험해. 저건… 저건……."
칼리우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아니. 저놈이 어디까지 올 수 있는지 확인해야지."
하벨은 뒤로 물러섰다.
"아! 뒤로 갈게!"
칼리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하벨이 물러난 만큼 물러서다 손을 뻗었다.
팅!
창처럼 날카롭게 앞으로 쏘아진 검은 물이 칼리우스가 만든 마법 앞까지 살짝 닿았다.
'여기까지다.'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하벨은 구속 마법 때문에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괴물을 경계했다.
이전에도 검은 물이 형체를 바꾸는 걸 보았지만, 이 정도로 또렷하진 않았다.
저 쇠사슬 너머에 대체 뭐가 펼쳐진 건지.
"혹시 저게 너희가 봤다는 거였어?"
하벨은 물었다.
―맞아. 뭔가를 봤거든. 그게 뭔지 확인하고 싶어.
정령이 직접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령들은 입조차 벙긋거리지 못하며 덜덜 떨 뿐이었다.
부정한 것들의 효과가 이렇게나 클 줄이야.
아라뿐만 아니라 다른 정령들의 모습까지 보자 그들이 왜 이렇게까지 부정한 것에 신경을 쓰는지 알았다.
그야말로 정령에게만 통하는 독이지 않은가.
'이건 좋지 않아. 정말 곤란해.'
하벨은 제 품에서 덜덜 떠는 아라를 토닥이며 검은 물로 된 괴물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준비하듯 꿈틀거렸다.
'저놈이 부정한 것이다.'
오면서 부정한 것들은 죄다 지워버리지 않았던가.
저놈 말고는 없었다.
거대 정화 장치와 저 괴물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하벨은 쥐어짜는 기분으로 물을 만들어냈다.
용왕의 힘으로 만들어진, 더러움조차 정화해버리는 가장 순수한 물.
찰랑.
그 소리에 아라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물이다. 이 몸이 제일 좋아하는 물.]
하벨이 이불을 펼치듯 물을 얇고 넓게 퍼트리고 정령들을 감싸자 여기저기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몸은 진짜, 진짜 무서웠어.]
아라는 그제야 하벨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하아아. 저게 뭐야? 저게 대체 뭐냐고!]
정령들은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도 그렇고, 부정한 것을 풀어주는 저 물도 그렇고.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에 하벨과 괴물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봤던 거야.]
한 정령이 얼이 빠진 채로 말을 꺼냈다.
[내가 그때 봤던 거라고.]
"뭘?"
하벨이 물을 유지하며 물었다.
[거대 정화 장치가 오염을 뿜어내는 장치로 바뀌면서 물이 갑자기 검게 변했어.]
거기까지는 자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허공에 뜬 검은 물, 그걸 어떻게 잊을까.
[그 물이… 저렇게 바뀌었어. 마치 생물처럼 말이야.]
정령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나를 향해 뻗어왔어! 나는 도망쳤는데. 나는…….]
정령은 검은 물로 된 괴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지 얼굴이 왈칵 구기다 소리쳤다.
[저건 이상해! 물이… 물은 모든 생명과 세계를 이루는 근원이야! 다른 건 몰라도 물은 그래야만 해! 그런데 저 괴물은 대체 뭐야?]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소리에 하벨은 차분해졌다.
'…그래서 저 존재 자체가 부정한 것이 된 거야.'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이 생명을 부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 자체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정령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살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 같지 않은가.
섬뜩.
갑자기 소름이 돋아났다.
괴물의 발을 잡은, 반짝이는 쇠사슬이 움직이자 하벨은 칼리우스보다 더 먼저 움직였다.
'이런!'
괴물이 오지 못할 뿐, 공격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정령들을 덮었던,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잠깐 거뒀다.
팅!
그대로 넓게 펼치며 화살처럼 쏟아지는 괴물의 공격을 막았다.
치이이이익.
검게 물든 물이 녹아내렸다.
"엄청 신선한 물 냄새가 나는데?"
칼리우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깨끗한 물은 처음이라 이상한 힘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도련님."
카샬이 하벨을 불렀다.
자신이 어떻게 하길 원하냐.
"저건 오염된 물이야. 알고 있지, 카샬?"
"저는 도련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내성이 높습니다."
다시 부풀어 오르는 괴물을 보며 카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나는 아예 오염이 안 통해."
칼리우스는 껴들며 말했다.
애초에 물의 오염은 인간에게만 통하는 것이기에 용인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 없었다.
'…아.'
하벨은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용용아, 저기 쇠고랑은 건들지 마. 구속 마법 말이야."
"응."
"싸울 줄 알아?"
"물어뜯는 건 잘해."
"물어뜯진 말고, 시선 좀 끌어줘."
하벨이 계속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용왕의 힘은 지금 자신이 다룰 수 있을 만큼만 반응했다.
그렇다면 저 괴물을 없애기 위해선 이전처럼 자신이 매개체가 되어 정화제를 만드는 방법뿐이었다.
"정화제를 만들려고 그러십니까?"
카샬이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베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베어보겠습니다."
이전에는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괴물.
카샬은 눈을 떴다.
'…궤적이 보이진 않는다.'
난생처음인 일이었기에 카샬은 이전보다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하벨은 다시 용왕의 힘으로 만든 물을 정령들에게 펼치다 말고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냈다.
"저건 물이야. 오염된 물. 그럼, 방법은 정화제밖에 없어."
하벨이 양손을 뻗었다.
정화제를 위해서는 정령과 정령사가 필요했다.
이미 갖춰지지 않았는가.
"한 번에 와."
한 번 해봤기에 하벨은 자신감 있게 목소리를 냈다.
용왕의 힘까지 제대로 발휘가 되면 좋겠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정령들이 많기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벨. 바쁜 와중에 미안한데."
칼리우스가 괴물에게 다가가다 말고 하벨을 불렀다.
조금 전부터 걸렸던 사실.
"구속 마법이 좀 불안정해."
칼리우스는 그대로 왼쪽으로 도약하며 마법을 바라보았다.
마법에 걸린 마나 흐름이 이상했다.
"마법에 뭔가 섞여 있어."
찌릿찌릿.
위험한 반응에 몸이 멋대로 울렸기에 위로 치솟는 검은 물을 피하며 칼리우스는 마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풀어헤친 것처럼 어긋나 있어서 좀… 아니, 많이 위험해."
"얼마나 버티겠는데?"
하벨이 묻자 칼리우스는 허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한 뒤에 대답했다.
"한, 3분?"
"…3분이라고? 이런 미친!"
하벨은 곧바로 정령들을 재촉했다.
"자! 빨리!"
저 마법이 풀리는 즉시, 자신들은 물론 클로저까지 잡아 삼킬지도 몰랐다.
어쩌면 적이 노리던 목표가 클로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하벨은 생각을 접고 다급히 자신에게 쏟아지는 정령수를 느꼈다.
정령들이 많은 만큼 그 어느 때 보다 강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