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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89화 (89/415)

89화. 찾았다?(2)

* * *

평소처럼 손에 쥔 단검에서 살을 파고드는 감각은 없었다.

하지만 레디나는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적은 처음이었으니.

"괜찮으세요, 도련님?"

"나는 괜찮은데."

하벨은 말을 아끼고 틈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옆으로 길게 그어진 틈의 세계는 팔을 회복하고 있는 괴물 말고도 다른 것들까지 토해낼 것만 같았다.

'보고 또 봐도 참 이상해.'

어떻게 허공에 상처가 날 수 있을까.

라르웬은 핵을 부숴도 그저 틈의 세계로 돌아갈 뿐 괴물이 죽는 건 아니라고 했다.

괴물은 대체 무엇이며 왜 죽지 않는지.

'…보면 볼수록 불길한데, 이상하게 신경 쓰인단 말이야.'

하벨은 눈동자를 굴렸다.

쩍쩍.

틈이 벌어졌다.

"도련님.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는 도망을 권하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을 보호하듯 앞에 섰다.

이전에 하벨이 틈의 세계를 닫았다고 한들, 그는 클로저가 아니었다.

라르웬이, 아니 다른 클로저가 얼마나 빨리 이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팔의 크기만 해도 저 괴물이 얼마나 큰지 추측할 수 있었다.

도망이 최우선이었다.

[응응! 이 몸도 그게 좋다고 생각해.]

아라가 몸을 움츠린 채로 카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감입니다. 틈의 세계는 클로저에게 맡겨야 합니다."

페트리오 역시 동의했지만, 레디나는 옆으로 길게 이어진 틈의 세계를 보며 반문을 꺼냈다.

"그런데 과연 도망칠 수 있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저 속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를 텐데요?"

한두 마리라면 몰라도 여러 마리가 튀어나온다면 골치가 아팠다.

마차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망설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현명한 판단을 내리세요, 도련님."

레디나는 아직 입을 떼지 못한 하벨을 쳐다보았다.

"…하."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던 그 감각을 기억하며 어딘가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자신의 앞이었을까.

왜.

"처리하자."

하벨은 푸른 동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기억했다.

틈의 세계가 닫히고 난 뒤 그 일대에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이었다.

괴물이 자신을 쫓아 이동한다면 이 근방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대장? 저 존재는 엄청 위험해! 이 몸 손이 떨리는 거 봐봐.]

아라가 떨리는 앞발을 내밀자 하벨은 피식 웃었다.

"진심이십니까, 도련님?"

카샬이 경악했다.

"그래. 진심이야. 핵을 찾아야지."

"핵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어디든 쪼개면 나오지 않겠어, 카샬?"

"좋아요. 헤집는 건 제 전문이죠."

레디나가 단검을 꼭 쥐며 활짝 웃었다.

"나는 말이야. 여기서 내가 도망가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알면서도 도망칠 만큼 용감하지 않아. 겁쟁이거든."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이건 책임감이 아니었다.

"…도련님!"

페트리오가 다급히 외쳤다.

"정확하지 않지만, 마나와 핵 사이에 어떤 반응이 있다는 걸 어디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불확실하다는 걸 알지만……."

"그럼 해봐."

하벨은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맨 처음 틈의 세계가 열렸을 때도.

두 번째 때도.

자신에게 접근한 괴물들이 핵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까지는 우연일 수 있지만, 세 번째는 아니었다.

'만약 오늘도 그렇다면…….'

하벨은 뒷생각을 하지 않으려 억눌렸다.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페트리오는 대답 후에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눈을 감았다.

"이 미친놈이!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카샬이 소리쳤다.

"마나를 느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이 멍청한 새끼."

카샬은 페트리오를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저러다 뒤지면 제 명줄이겠지.

"도련님."

카샬의 부름에 하벨은 망토를 걷어 올려 정화 장치를 내보였다.

"아직 괜찮아."

하벨이 씩 웃자 카샬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켜야 했다.

라르웬이 없는 이상, 자신이 하벨의 머리카락을 쥐는 한이 있어도 말려야 하는데.

무언가를 하고자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또 마음이 약해졌다.

"그게 아니라 저는 언제나 도련님의 안전을 우선으로 합니다. 좀도둑 저놈이나, 레디나를 버리고 떠나도 절 원망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차하면 제가 도련님을 데리고 갈 건데요? 저는 도련님의 신도이자 그림자니까요."

가벼운 레디나의 말과 달리 표정이 살짝 굳어 있었다.

틈의 세계에서 괴물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방금 손도 커다랬지만, 얼굴은 자신 옆에 뿌리박고 서 있는 나무만큼 크질 않는가.

"너무… 크긴 하네요. 솔직히 이건 처음 봐요."

[이 몸도 처음 봐.]

아라가 하벨에게 정령수를 밀어 넣으며 찰싹 붙었다.

섬뜩.

하벨은 괴물과 시선이 마주치자 소름이 우르르 돋아나는 걸 느꼈다.

죽어버린 흙의 색을 하던 괴물의 얼굴은 가면을 뒤집어쓴 듯 보였고, 눈만 붉게 빛났다.

갑자기 괴물이 입을 딱딱거렸다.

"…야. 가……."

무슨 말을 토해내려는 듯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괴물이… 말을 한다고?"

괴물이 틈의 세계를 빠져나오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던 카샬은 입을 살짝 벌렸다.

쩍!

괴물은 회복되고 있는 양손으로 바닥을 짚었고, 천천히 앞으로 빠져나왔다.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카샬은 숨을 참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커다란 놈은 대부분 머리에 핵이 숨겨져 있어. 물론 아닐 확률도 꽤 높지만, 일단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라르웬의 말을 떠올리던 카샬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일단 머리를 노려, 레디나!"

"알겠어요."

카샬이 검을 휘두르며 나타난 풍압을 빨아들이듯 레디나의 단검 끝에 바람이 뭉쳤다.

카샬이 만들어 놓은 상처를 향해 단검을 찔렀다.

쿠쿠쿠쿠!

바람과 함께 상처가 깊게 드러나자 양쪽에서 솟구쳐온 여러 개의 줄기가 피부를 붙잡았다.

하벨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벌려라.'

찌이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상처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없습니다!"

줄기를 타고 올라간 카샬이 상처의 틈을 보며 외쳤다.

하벨은 바로 줄기를 거두며 뭉쳐놓았다.

몽글몽글.

만들어진 물이 줄기의 끝에 매달려 가시처럼 날카롭게 날을 드러냈다.

'머리가 없으면 가슴이겠지.'

뭉쳐뒀던 줄기를 배배 꼬며 하벨은 그대로 괴물의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푸욱.

가슴을 파고드는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아라가 소리쳤다.

[대장! 팔이 와!]

카샬과 레디나가 거의 동시에 하벨을 향해 뻗어온 괴물의 팔을 막았다.

치이이익.

그들의 발바닥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큭."

부들거리는 카샬과 달리 레디나가 신음을 퍼부었다.

힘 대결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도, 도련님!"

카샬의 손등과 목에 핏대가 섰다.

"조금만 버텨."

하벨은 씨앗을 던지며 뒤로 움직였다.

쿠구구궁!

자라난 식물이 팔을 밀치자 그 틈을 노려 카샬과 레디나가 빠져나왔다.

"하."

레디나는 숨을 짧게 토하며 괴물을 보았다.

그새 틈의 세계에서 허리까지 빠져나온 상태였다.

저놈 때문에 찌그러진 나무가 몇 그루인가.

'정신 차려.'

레디나는 하벨이 괴물의 가슴에 만들어 놓은 상처를 기억했다.

"레디나, 한 번 더! 등부터 노리자고!"

레디나가 입을 열기 전에 카샬이 먼저 움직였다.

"잠깐만요! 도련님께서 만드신 가슴의 상처는요?"

레디나가 뒤따라 움직이며 묻자 카샬은 짧게 대답했다.

"나중에."

하벨이 괴물의 가슴을 꿰뚫었지만, 놈이 일어날 기세가 보이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쿵!

카샬은 괴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손을 피하며 팔을 타고 등으로 뛰어들었다.

크오오오오.

괴물이 갑자기 포효했다.

피부가 저릴 만큼 날카로운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카샬이 휘청거렸지만, 하벨은 다리에 힘을 주며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물에 독을 타자 물마저 검게 물들었다.

그대로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될락 말락 한 크기의 활을 만들고.

푸슉!

하벨은 활시위를 놓았다.

'표적은 크고.'

검은 화살이 괴물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 그뿐이니.'

하벨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깊게 토해냈다.

[괜찮아, 대장?]

아라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벨이 가진 순환의 길에 또 불순물이 차오르지 않는가.

"반쯤?"

하벨은 레디나와 카샬이 벌인 합동 공격에 괴물의 등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었다.

찌이이익!

바람을 따라 카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에도 없습니다!"

괴물은 앞으로 나오기 위해 엎어져 있고, 이를 똑바로 일으키려면 방법은 한 번뿐이었다.

숲이라는 이점.

"간다!"

하벨은 모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독이 번져 괴물의 색이 검게 변하고 혈관이 도드라져 움직임까지 느려진 지금이라면.

[응응! 이 몸도 준비가 됐어!]

아라의 힘찬 대답과 함께 하벨은 조금 전 괴물의 가슴을 뚫고 내버려 뒀던 식물을 의식했다.

정령수로 만들어진 식물은 주변 식물들보다 위치가 높다는 점만 이용했지 다른 건 한 적이 없었다.

그럼 명령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벨은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을 위해 정령수로 만들어진 식물을 거두지 않고 두었다.

'주변 식물들을 일으키거라.'

새로운 명령과 함께 정령수로 키운 식물에 반짝거림이 일어났다.

이전, 단계를 건너고자 정령들의 도움을 받을 때, 자신이 가진 식물의 힘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새롭게 태어난 씨앗 말고 홀로 가지가 자란 식물만이 유일하게 반짝거리지 않았던가.

그때 반짝거림과 비슷했다.

쿠쿠쿠쿠!

무언가 꺾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괴물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허리가 갑자기 뒤로 휘었다.

바로 밑에서 뭉쳐서 솟구친 식물들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왼쪽 가슴, 심장 밑부분 쪽에 있습니다!"

그때, 페트리오가 다급히 일어나 외쳤다.

진땀을 흘리며 눈까지 번뜩 떴다.

자신의 마나가 저쪽에 반응했다.

제발.

"아니면 뒤졌다."

카샬은 눈을 떴다.

눈을 크게 뜨면 검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괴롭히는 소리와도 같았기에 평소에는 보일 정도만 뜨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웅웅.

자신의 검에 이어 레디나의 단검까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부러지지 마라."

카샬은 검을 달래며 회복하고 있는 괴물의 가슴팍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로 베면 가장 좋을지, 궤적이 얼추 보였다.

저 궤적은 틀린 적이 없었다.

카샬은 바닥을 박차고 검을 위로 들어서는 괴물의 가슴에 박았다.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빨판이 달린 것처럼 다리를 가슴팍에 밟고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달렸다.

샤아악!

속살이 드러났다.

반짝이는 게 얼추 보였다.

"있습니다! 핵입니다!"

카샬은 땅으로 내려오며 소리쳤고, 페트리오가 덩달아 환호했다.

위이이잉.

회전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기에 카샬은 바로 하벨에게 달려왔다.

[나, 날았어?]

아라의 눈이 커졌다.

레디나가 날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높게 도약했다.

그녀의 몸이 천천히 연기에 휘감겼다.

하벨이 뚫었고, 카샬이 벤 흔적이 그곳 앞에 나타나 단검을 쑤셔 넣었다.

파파파팟!

바람이 터져 나오며 상처 부위가 벌어졌다.

그 속에 반짝거리는 분명 핵이었다.

"도련님!"

레디나는 괴물의 가슴팍을 발로 힘껏 찬 뒤에 허공에서 하벨을 불렀다.

이미 자신의 뒤에서 물이 일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니.

"그래."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레디나가 땅으로 내려오자 물이 허공에 떠 있었다.

'마지막이다!'

하벨의 손가락을 따라 물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망치로 모습을 바꾸며 바람을 가르고, 핵을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까앙!

핵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앞으로 몸이 힘없이 쏠리자 하벨은 허벅지를 쥐고는 버텼지만, 피는 막지 못했다.

정령수가 한꺼번에 빠진 만큼 순환의 길 속 세 번째 막을 쑤셔대는 불순물이 더 날카로웠다.

평소보다 더한 욱신거림에 하벨은 일그러지는 인상을 막지 못했다.

[아, 아직 괜찮을 텐데. 이 몸이 느꼈단 말이야!]

아라가 당장 정령수를 그만 넣고는 하벨의 옷자락을 위로 잡아당겼다.

"그래. 괜… 찮아. 3번은 더 사용할 수 있으니까."

"…가야."

핵이 부서지자 괴물이 하벨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아가……."

"……?"

하벨은 입가를 닦다 말고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가야, 아가야.

피의 연회가 시작되기 전, 티에라 저택으로 돌아가고자 포탈을 탔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정말로 아가야라는 말을 하려고 한 걸까.

"도련……."

카샬은 난데없이 느껴지는 섬뜩함에 말을 멈추고 검을 들었다.

까아아앙!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온 괴물의 손아귀에 막는 게 고작이었다.

카샬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검을 놓치고 뒤로 나뒹굴었다.

다급히 상체를 들자마자 괴물의 손아귀에 잡힌 하벨이 보였다.

페트리오가 달려갔지만, 괴물은 틈의 세계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하벨을 어디론가 던질 기세를 내뿜었다.

"도련님…!"

카샬은 얼어붙은 표정 그대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약했다.

하지만 하벨은 이미 허공을 날고 있었다.

"도련님!"

카샬보다 두 박자 더 빠르게 도약했던 레디나가 하벨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손이 허공을 스쳐 지나갔다.

레디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카샬이 바닥을 쓸며 떨어졌다.

옷과 머리카락에 묻은 흙을 닦을 생각도 없이 당장 일어나 하벨이 날아간 방향으로 달렸다.

"도련니임!"

* * *

"…어이쿠."

갑자기 무언가 날아오자 반사적으로 잡아버렸다.

누군가 거꾸로 허공에 둥둥 떠 있자 아이는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바로 뒤집었다.

입가 주변에 피범벅이 된 남자를 보더니 아이는 깜짝 놀랐다.

"어?"

눈동자에 세로로 된 줄이 더욱 짙어졌다.

아무리 봐도 그 남자가 아닌가.

"찾았다."

곧 배시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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