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87화 (87/415)

87화. 변화의 시작(3)

* * *

"…마법사가 거대 정화 장치를 건드렸다니."

바안은 뒤늦게 놀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말씀 드린 것처럼 저도 이유는 모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능성의 기회를 크게 열어주십시오. 하여 이 부탁을 드리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바안은 이어지는 하벨의 말에 말문이 닫혀버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귀족들이 다른 나라와 손을 잡든 뭐든 이어져 있다는 건 확신했어도 마법사까지라니.

자연스럽게 하벨이 처음 언급했던 마법사 협회가 생각이 났다.

"저하께서 말씀하신 외부 세력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외부 세력과 아주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단체는 하나뿐이잖습니까?"

하벨이 거의 대놓고 마법사 협회를 거론하자 바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우,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제가 놓치고 있었다고 해도 그 이전부터 마법사 협회는 항상 중립을 유지했습니다."

"중립인 척 연기하는 거야 뭐가 어렵겠습니까? 원래 가장 무서운 적은……."

―…하아아.

갑자기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은 깜짝 놀라며 눈동자를 돌렸지만, 적어도 바안과 아라는 아니었다.

―이, 이러려고…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내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이어 죄책감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벨은 다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욱!"

역겨웠다.

'이게 뭐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가슴에 역겨움이 치솟아 속이 울렁거렸다.

[대장!]

루룸과 세렌에게 쫑알거리던 아라가 다급히 날아왔다.

"하, 하벨 공!"

바안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하벨에게 다가갔다.

[내가 카샬에게 갔다 올게.]

세렌이 말했다.

카샬이 자신을 볼 수는 없지만 신호는 눈치챌 테지.

"괘… 괜찮습니다."

하벨은 천천히 손을 떼며 말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숨소리가 빨라졌다는 걸 느꼈기에 하벨은 호흡하려 애를 썼다.

대체 어떤 기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역겨움이 가득해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하. 저도 이제 일어나려던 참입니다."

하벨은 식은땀을 흘리며 탁자를 붙잡았다.

"일어나다뇨……?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세요. 그대의 집사를 불러오겠습니다."

"저하.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입니다. 항상 경계하십시오. 달콤한 제안을 물리시고 가시밭길로 걸으셔야 합니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바안에게 경고했다.

지금이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이며 적이 생기기에도 좋은 시기가 아닌가.

"아니, 지금 그대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할 상태가 아닙니다."

바안은 당황했다.

이 와중에도 충고라니.

왜 룬델이 하벨의 걱정을 많이 하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그럼, 저하만 믿겠습니다."

숨을 몰아쉬던 하벨은 탁자를 잡고서 겨우 인사했다.

보기 불안할 정도로 비틀거리던 하벨은 갑자기 뒤를 돌았다.

"아, 기상국장 웨인 톨은 그 누구보다 단단히 잡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확실히 잡을 생각입니다."

바안은 하벨을 쫓아가며 말했다.

"톨 가문이 가진 날씨를 예상하는 그 기술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니까요."

"…기술이라뇨?"

하벨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톨 가문에서 이어져 내려온 기술입니다. 독자적인 기술이자, 돈으로 날씨 정보를 팔기 전까지는 다른 나라가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했습니다."

바안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오차율이 겨우 20% 안팎이었으니까요. 그게… 마법까지 섞인, 아주 복잡한 기술이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그런 기술을 웨인 톨이 가지고 있었다?'

하벨은 이제야 웨인 놈이 왜 그렇게 기세등등한지 알았다.

단지 날씨를 담당하는 기상국장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더 큰 이유가 있을 줄이야.

"그런 이유라면 반드시 알아내셔야겠습니다."

왕실이 저 기술을 손에 넣는다면야 이전과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번만큼 흔들리지 않을 테지.

"알아낸다면 공에게 반드시 연락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하. 그럼, 무운을 빕니다."

하벨은 올라오는 어지러움을 삼키며 허리를 숙였다.

* * *

"…하."

따뜻한 차가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자 하벨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요새 무리하실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카샬이 핀잔을 주자 하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냥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야."

"그러니까요. 그걸 '무리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똑똑.

"도련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레디나가 작게 속삭였다.

"혹시 무슨 사고 치셨어요?"

"사고라니?"

하벨은 도리어 당황했다.

오늘 한 거라고는 바안을 만난 것밖에 없었다.

"누가 왔길래 그래?"

카샬이 물었다.

"가주님이요."

레디나는 자신의 뒤쪽에 있는 룬델을 가리켰다.

"오, 오늘 새벽하고 조금 전 도련님께서 바안 저하를 보실 때 말고는 제가 도련님께 눈을 뗀 적이 없었습니다."

카샬은 마치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것처럼 룬델을 보자마자 변명부터 했다.

레디나가 키득거렸고, 룬델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알고 있으니 진정해라, 카샬."

"혹시 카샬을 혼냈습니까?"

하벨이 묻자 룬델은 자연스럽게 걸어와 하벨 앞에 앉았다.

짤랑.

랜턴이 가볍게 흔들리다 환한 빛을 뿜어냈다.

'……?'

바안이라면 이번 일로 큰 힘을 얻었기에 그만큼 자신을 도와줄 능력이 커져 빛이 자랐다고 치지만, 룬델은 왜 커진 걸까.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이제껏 도움을 받았던 검은 불꽃이든, 환한 불꽃이든 그 용도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면 대체 뭐라는 건지.

아라가 하벨을 쳐다보다, 랜턴을 살짝 건드렸다.

그제야 하벨은 룬델을 바라보았다.

룬델은 활짝 웃으며 말을 꺼냈다.

"혼낸 적이야 많단다. 나한테 망나니처럼 설치다 얻어맞기도 했고."

"망나니요?"

카샬을 보는 하벨의 눈이 가늘어지자 카샬은 목을 뻣뻣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아, 안녕, 아라야.]

세렌이 날개를 흔들었다.

[안녕, 세렌!]

아라가 세렌을 안아주자 세렌은 축 늘어지며 땅에 떨어졌다.

"받거라."

룬델은 가지고 온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를 보자마자 아라가 다급히 날아와 상자 앞에서 얌전히 앉았다.

[이게 뭐야, 룬델?]

아라가 킁킁거리며 묻자 룬델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하벨에게 줄 내 선물이란다."

[우오옵! 마나 냄새가 나! 마법 물건인가 봐!]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말하자 룬델은 그대로 멈춰 하벨을 쳐다보았다.

…깜짝 선물이었는데.

"마법 물건이요?"

멀뚱멀뚱 상자를 바라보는 하벨의 표정에 룬델은 시무룩한 마음을 숨기며 내밀었다.

"그래. 라르웬이 클로저로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테고."

"예. 들었습니다. 형님이 저한테 선물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 선물이 이미 도착했다만, 잠깐 이것저것 고친다고 시간이 걸렸구나."

룬델이 말을 하면서 손으로 재촉하자 하벨은 등이 떠밀리듯 상자를 열었다.

이전에 라르웬이 보여줬던 임무용 기기처럼 네모난 모습 그대로였다.

[우오오옵!]

아라가 눈을 반짝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초콜릿 같아!]

[저건 먹으면 안 돼, 아라야.]

탐스러운 음식을 보는 듯한 시선에 세렌은 날아와 아라를 말렸다.

[이 몸도 알아. 저건 먹는 게 아니야!]

"원래 라르웬이 가진 임무용 기기는 다른 연락용 아이템과 연동이 되질 않는단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지."

"그걸 해냈다고요?"

하벨의 물음에 룬델은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살짝 밀었다.

"네가 가진 우산의 기능 중 너만 인식할 수 있는 기술까지 넣었으니 안심하고 받아주거라."

"…와."

카샬은 더는 참지 못하고 감탄사를 흘렀다.

연락용 아이템도 원래 비싼데, 거기에다 클로저용 기계를 연락용 아이템처럼 만든 것도 모자라 우산의 기능 일부도 넣었다니.

돈이 남아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카샬은 행복해하는 룬델의 표정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벨도, 룬델도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

"자네도 받게."

룬델은 상자 속에 포장지를 들추며 또 다른 연락용 아이템을 꺼냈다.

카샬은 잠깐 숨을 멈췄다.

"제… 제 것도 있단 말입니까?"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지 카샬은 당황해 눈마저 크게 떴다.

연락용 아이템이 두 개라는 건 애초에 라르웬이 두 개를 가져다준 게 아닌가.

'라르웬이? 아니, 둘째 도련님이……?'

[어! 카샬이 눈을 떴어!]

연락용 아이템에 발자국을 남기던 아라가 당장 카샬에게 날아와 배시시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나. 자네를 챙겨주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룬델이 미소를 짓자 카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에 어느 가주가 집사를 이렇게 챙겨주겠는가.

"…가주님."

지금 누가 자신에게 누굴 존경하냐고 묻는다면 맹세코 어떤 망설임도 없이 룬델 티에라를 말할 수 있었다.

이래서 자신이 티에라 가문으로 흘러들어왔을 때부터 흔들리고, 집사가 된 후에도 이곳을 떠날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벨이 요새 부쩍 돌아다녀 네가 많이 힘든 거 알고 있다."

연락용 아이템을 만지작거리던 하벨이 그 말에 놀라 고개를 올렸다.

"……?"

대체 하벨이 얼마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지.

하벨은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말썽꾸러기가 되어버렸지만, 앞으로도 하벨을 잘 부탁한다, 카샬."

"물론입니다! 저는 티에라 가문에 뼈를 묻을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가주님!"

카샬은 연락용 아이템을 소중히 쥐며 머리를 넙죽 숙였다.

룬델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카샬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하벨을 보았다.

눈빛이 단호했기에 하벨은 절로 긴장했다.

"네가 거대 정화 장치를 살피러 움직이는 건 허락하마."

"정말요?"

하벨은 되물었고, 카샬은 고개를 올렸다.

"…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당연히 룬델이라면 반대를 할 거라 생각했다.

거대 정화 장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했고, 실제로 하벨이 종이처럼 너덜너덜해졌지 않았는가.

"그래.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가 다치지 않는 선까지란다. 무리하지 말고, 널 아껴주렴."

룬델은 하벨에게 걸어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벨아. 나는 가문 일 때문에 먼저 가보마. 조심히 오거라. 집에서 언제나 널 기다리마."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에 하벨은 순간 마음을 놓아버릴 뻔했다.

꿈 때문인지 몰라도, 모래사장에 자신이 썼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영원히 모를 것만 같았던 그 단어를 조금은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가주님."

카샬은 밖으로 나가는 룬델을 따라갔다.

문을 닫은 뒤,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께서 그때,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셨는지 잊으셨습니까?"

카샬은 룬델을 말렸다.

룬델의 허락을 받은 하벨이 얼마나 더 날뛸지 몰랐다.

[카샬, 이 바보야. 룬델이 생각 없이 그런 결정을 한 게 아니라고.]

세렌이 카샬을 찔렀다.

순간, 그는 움찔거렸지만, 단호한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네."

카샬을 달래며 룬델은 말문을 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자신 역시 하벨을 수천 번은 더 말리고 싶었다.

곤히 잠든 하벨을 보면서 정말 피가 끓는 기분이라 숨조차 제대로 쉬기 버거웠다.

"하지만 생각해보게."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벨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던가?"

"……."

카샬의 표정이 굳어지자 룬델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걸 내 욕심이라 말해도 되네. 나는… 하벨이 저번처럼 거대 정화 장치 일을 통해 오염된 물을 원래대로 돌리든, 이번 일처럼 귀족들을 쓸어버릴 무대를 마련하든 하벨이 원하는 걸 이뤘으면 한다네."

"진심이십니까? 지금 도련님께서는 뭐든 하실 분입니다. …아뇨, 좋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현재 아직 본인의 상태를 모르십니다."

"걱정된다네, 카샬. 나는… 하벨이 정말 걱정돼."

룬델이 미소를 지우자 불안하던 시선이 나타났다.

덩달아 카샬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그러니 카샬 자네가 하벨을 봐주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하벨과 가장 가까이 있을 자네가."

"가주님."

"자식이 날아갈 때가 되면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날 수 있도록 도와야지 않겠나? 나는 지금 그러는 중이라네."

룬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카샬의 어깨를 두드렸다.

카샬은 룬델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내색하진 않았지만, 처음 집사가 되어 티에라 가문을 살폈을 때, 라르웬도 그렇고 룬델도 하벨을 대하는 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룬델은 하벨을 과보호하며.

라르웬은 무심했으며.

넬시아는 하벨을 두려워했다.

대체 뭐가 있는지 그 의문을 수백 번 이상 품었지만, 집사로서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이 아닌가.

'…가주님께서 달라지셨다.'

언제나 하벨을 제 품에 감싸던 룬델이 하벨이 나아갈 수 있게 밀어주다니.

이 변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자신 역시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도 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카샬은 손잡이를 잡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열자 하벨이 벌써 얄밉게 웃고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카샬은 벌써 목구멍까지 한숨이 밀려와 체념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허락도 받았겠다, 준비하자, 카샬. 오늘 안에 좀도둑이 피나토 웬의 기억을 통해 봤던 사진 속 거대 정화 장치로 갈 생각이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