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변화의 시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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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귀족들 대부분은 연회장에서 쳐냈지만, 왕실은 아직 골치가 아픈 존재가 남아 있지?'
방금 언급된, 날씨라는 정보를 손에 쥐고 성장한 기상국장 웨인 톨.
저놈을 쳐내려 더 철저하게 조사를 하겠지.
하벨은 음료수가 든 잔을 내렸다.
"그래서 바안 저하의 즉위식은 언제입니까?"
"……."
룬델은 깜짝 놀라며 포크를 쥔 손을 내렸다.
"어떻게… 알았더냐?"
"현재 세력이 물갈이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물갈이가 된 세력의 주도권을 저하가 손에 넣지 않았습니까? 지금만큼 정권 교체가 좋은 시기도 없지요."
귀족들이 무너지면서 현재 권력의 중심이 왕으로 다시 옮겨진 상황이었다.
바안에게 복종했던 귀족들이 자리를 잡는 와중에 권력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왕관이 바안에게 넘어간다면 그의 입지까지 탄탄해질 테지.
"무엇보다 티에라 가문이 움직인 상황이 아닙니까? 대놓고 왕실 뒤에 티에라가 있다고 알린 이상, 전하께서 분명 이용하려고 들 겁니다."
지금 시기만큼 안전하게 왕권을 교체할 기회는 정말 없었다.
특히 그 과정을 노심초사했던 왕이라면 더더욱 놓치기 어려울 테지.
"그래. 네 말이 맞단다, 하벨아."
룬델의 입가에 어느덧 미소가 지어졌다.
"무얼 받아내셨습니까?"
하벨의 물음에 세렌이 코웃음을 쳤다.
[왜 이렇게 급해? 밥 먹으면서 천천히 말해도 되잖아.]
세렌은 눈동자를 돌려 곧바로 아라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라가 이리 오라고 손을 흔들자 세렌은 언제 핀잔을 줬냐는 듯 당장 날아갔다.
"저하의 즉위식과 함께 에르티안 왕국과 긴 시간 이어졌던 맹약을, 하벨, 네 덕에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룬델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에르티안 왕의 허락 없이는 에르티안 왕국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맹약.
그 맹약은 어느 날 세계를 덮친 물의 오염과 함께 점점 커지는 티에라 가문을 붙잡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맙구나."
커다란 감옥과도 같았던 이 에르티안에서 드디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이 맹약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하벨이라니.
자랑스러움을 넘어 그 특별함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하벨은 룬델의 그 시선을 살짝 흘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그 목줄은 제가 아니더라도 왕실에서 거래 조건으로 내어줬을 겁니다."
바안이 왕으로 즉위하려는 그때, 왕이 티에라 가문에게 목줄을 내밀며 거래를 제시했을 테지.
"그리고 또 뭘 받으셨습니까?"
"그 맹약이 깨진 뒤에도 왕실은 티에라 가문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각서를 내어주더구나."
"상황이 반대로 되어버렸네요?"
하벨이 키득거렸다.
왕실이 티에라 가문에게 목줄에 가까운 패를 내어주었다.
어제 호의적이었던 왕의 태도와 이어서 보니 왕실은 티에라 가문과 공생의 관계 정도까지 바라본 게 아닐까 싶었다.
'부디 그 마음이 징징거림으로 이어지면 안 될 텐데.'
"그만큼 급한 상황이잖아? 여기서 우리 가문이 빠진다면 왕실은 복구조차 힘드니까 말이야."
라르웬까지 대담한 말을 꺼내자 카샬은 입가를 살짝 핥았다.
'여기가 왕실인데 저런 말을 나눠도 되는 건가?'
"걱정하지 말게, 카샬."
룬델이 갑자기 입을 열자 카샬은 당황했다.
"이 주변에 어떤 감시도 없으니."
정령들이 왕실을 꺼린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눈이 되어주고 있었다.
"제 표정에서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카샬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아니. 자네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네."
룬델이 부드럽게 웃자 카샬은 라르웬에게 놓으려던 음식을 룬델 앞에 놓았다.
"…잠깐만, 카샬. 그건 내가 왕실 요리장한테 직접 요구한 음식인데?"
카샬은 라르웬을 힐끔 바라보다 룬델을 향해 눈웃음 지었다.
"역시 가주님이십니다. 제가 티에라 가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도련님이라면 그 두 번째 이유가 바로 가주님 덕분입니다."
순간, 하벨은 사레가 들 뻔했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대체 카샬하고 하벨 티에라 사이에 뭐가 있었길래 카샬이 저런 말을 꺼내는 거지?'
카샬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룬델이었기에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
"많이 드십시오, 가주님. 아, 도련님께서는 더 많이 드셔야 합니다."
카샬은 하벨의 표정을 보며 키득거렸다.
* * *
[세렌, 있지. 이 몸이 물을 게 있는데.]
아라가 이름을 부르자 세렌은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왜, 왜 그래?]
[연회장에서 세렌이 엄청 커졌잖아. 그게 뭐야? 이 몸도 할 수 있는 거야?]
아라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자 세렌은 헤벌쭉 웃었다.
[당연히 아라 너도 할 수 있지.]
[…세렌 너 표정 관리가 안 된다?]
루룸은 기가 찬 듯이 말을 꺼냈다.
아라만 보면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그러든 말든 세렌은 아라에게 날아와 날개를 파닥거렸다.
[아라야, 그건 말이야. 우리의 진짜 모습이야.]
[진짜 모습이라고? 그럼 이 몸이 가짜 모습이라는 거야? 그럼, 그럼 이 몸도 커질 수 있는 거야?]
아라는 흥분해서는 귀를 쫑긋 세웠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 바안에게 향하던 하벨의 걸음마저 느려질 정도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자신도 연회장에서 갑자기 커진 세렌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틈이 나질 않았으니까.
[그 모습이 가짜는 아니야. 연회장에 내가 보였던 모습도, 이 모습도 둘 다 진짜야. 다만 세계를 위해서 힘의 제약이 걸린 것뿐이지.]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몸은 세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정령사를 통해 또 다른 진짜 모습을 내보일 수가 있어. 그때, 세계가 억누르는 우리의 제약을 하나씩 풀 수가 있고.]
[어? 이 몸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벨은 아라의 물음에 고개를 같이 끄덕였다.
그를 안내하던 왕실 시종이 갸웃거리자 카샬이 슬쩍 하벨을 찔렀다.
아직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으시다면 밖에서는 자제하십시오.
그 말이 손가락을 타고 고스란히 들렸기에 하벨은 그냥 웃었다.
[뭐가 이상한데?]
세렌이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정령사를 통해서 해야 하는 거야? 이 몸은 그걸 잘 모르겠어.]
[그게 어려우니까. 제약은 원래 어려워야 제약이야.]
"안으로 드시지요, 하벨 티에라 님."
왕실 시종의 말에 세렌은 아라에게 물었다.
[더 들어볼래? 여기서 말해줄게.]
[아니! 이 몸은 알아들었어! 감정을 아는 건 무섭고, 그래서 제약이라는 거지?]
정령수를 넣으면 정령사의 감정과 생각이 제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아라 자신도 처음 이런 상황에 겁이 났으니 충분히 제약이라고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반대야.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정령사가 알 수 있어.]
하벨은 루룸이 꺼내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잠깐 멈췄다.
'그 반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문득 아라의 감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벨은 두려움이 몰아닥쳤다.
"…도련님?"
카샬이 조심스레 하벨을 불렀다.
갑자기 하벨의 손끝이 떨리지 않는가.
망토 속에 가린 정화 장치를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하벨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잠깐 현기증이 나서."
하벨은 숨을 몰아쉬었다.
쿵쿵.
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고작 감정을 안다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인가?'
배신의 아픔이.
기억도 나지 않은 그 상황이.
* * *
"어서 오세요, 하벨 공."
바안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을 맞이했다.
랜턴에 환한 불꽃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그 빛은 이전보다 더 성장하지 않았는가.
왕실을 억누르던 귀족들을 거의 죽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피곤함과 별개로 얼굴은 더 좋아지셨습니다, 저하."
바안은 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에 당황하지 않는 하벨을 보며 오히려 자신이 당황했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다, 하벨 공 덕이 아닙니까?"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공이라면 언제든 와도 됩니다. 어서 앉으세요."
바안은 자리를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정말 표정이 많이 달라졌네. 저번에 왕 생일날 봤을 때, 엄청 어둡던데.]
세렌은 바안을 빤히 쳐다보다 하벨을 곁눈질로 살폈다.
바안을 바꾼 건 하벨일 테지.
지금의 룬델을 바꾼 것도 하벨이었고.
세렌은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어떤 말씀을 나누러 오셨습니까?"
바안은 기대를 하며 물었다.
기왕이면 자신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하벨은 그 마음을 흘리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하께서 마법사 협회를 주시하셨으면 합니다."
"…마법사 협회를요?"
바안은 의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 협회라면… 되게 폐쇄적인 집단이라 이곳 귀족들 세계에 발을 디디지 않을 텐데요?"
"누가 그럽니까?"
하벨은 튀어나올 뻔한 비웃음을 억눌렀다.
왕실마저 피해갈 정도로 은밀히 움직였다기엔 티에라 마을 뒷세계에서 보여줬던 그 모습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연히 꼬리가 잡힌 건가? 아니면 내부에서 누군가 일부러 정보를 흘린 걸까.'
하벨은 자신의 마음이 후자로 기운다고 느꼈다.
"누가… 그러다니요?"
바안은 여전히 어리둥절했고, 하벨은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왕실이 무너졌더라도 귀족 세계와 가장 가까운 왕실이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상황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봤다.
"이번 일에 설마, 마법사 협회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그건 모릅니다."
하벨은 딱 잡아 말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먼저 약속해주십시오, 저하."
"말해보세요."
바안은 애초에 하벨을 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부터 왕실과 이 나라를 삼키려 했다면 애초에 망하도록 뒀어야 했다.
그 후에 귀족들을 처리하면 훨씬 더 간단한 일이 아닌가.
티에라 가문의 힘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고, 하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벨은 배워야 할 사람이지, 척을 질 사람이 아니었다.
"마법사 협회를 주시하십시오. 마법사 협회가 폐쇄적이나, 왕실하고는 교류가 활발하지 않습니까? 관직에 오른 마법사도 있을 테고요."
"…마법사들이 왕실의 정보를 흘렸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왜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져 내렸는지 모릅니다. 하여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나 역시 그때는 너무 어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갑자기'는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안은 하벨을 위해 준비한 차에 손을 대려다 말고 자신의 허벅지를 쥐었다.
"처음에는 작은 죄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그런 죄로 왕정파 귀족을 흔들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요."
[네가 이번에 한 행동과 비슷하네.]
루룸이 말했다.
"아버지께서 왕실의 힘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무렵 이미 늦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정파 귀족들이 무너지고, 강했던 왕실의 권력마저 이전 세력들에게 잡아먹혔으니까요."
"그 세력들이 성장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까?"
"눈치채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야 그럴 것이 이 에르티안 왕국은 왕정파 귀족들의 충성과 왕실의 힘이 강한 나라 중 하나였으니까요."
바안은 허벅지를 쥐었던 손을 올리며 살짝 펼쳤다.
"대체 이전 세력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알아내질 못했습니다."
바안은 뒷말을 삼켰다.
알아내지 못한 이유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봤자 하나뿐이질 않겠는가.
왕실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참담했던 그때를 떠올리니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니까요."
바안은 자신이 잠깐 분노에 사로잡혔다는 걸 알고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아, 대화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샜습니다. 하벨 공께서 마법사 협회를 주시하라는 이유를 알려주겠습니까?"
"저하께서 혹시 귀족들이 거대 정화 장치를 빼돌리거나 부숴버리는 등의 행동을 하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네. 모를 수가 없죠. 기상국장이 돈에 눈이 멀어 날씨 정보를 돈으로 팔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하벨 공과 처음 만난 기상국 앞에서 제가 분노한 이유 역시 그 사실 때문이었고요."
'거기서 기상국의 민낯을 알게 됐지.'
하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상국 같은 소리 한다. 날씨도 못 맞히는 것들이 애초에 왜 필요한데?]
세렌은 코웃음을 쳤다.
[차라리 정령사나 고용하는 게 더 빠를 텐데 말이야.]
"아마 정령사를 고용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죠."
바안이 말을 꺼내자 세렌은 움찔거렸다.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정령의 비위를 맞추는 게 정말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맞지. 우리가 왜 인간들의 비위를 맞춰야 해?]
루룸이 하벨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이 섞인 하벨의 눈빛에 세렌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너는 룬델의 아들이니까. 그래서 그나마 다른 거야.]
[어? 이 몸도 룬델이 좋아. 그런데 룬델이 왜? 왜 그게 특별한 건데?]
아라가 물었음에도 세렌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살짝 굳어 있었다.
[룬델이 현재 물의 오염이 심각해지지 않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이건 우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지금 룬델이 살아야 우리가 살고, 룬델이 해내야 미래가 찾아와. 그게 우리가 룬델 편에 서는 이유고.]
물의 오염.
인간들은 적응했다는 이유만으로 상황을 이전처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저 바안이라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벨은.'
세렌의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강 하나뿐이지만, 물의 오염을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았던가.
점점 마음이 쓰였다.
"미안합니다. 바쁜 사람을 앉혀놓고, 오늘따라 이야기가 자꾸 옆으로……."
"거대 정화 장치를 건드린 자가 바로 마법사입니다."
"……?"
"일부러 거대 정화 장치를 건드리는 건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 알아내 주십시오."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이번에 왕실이 귀족들을 대대로 조사하지 않는가.
마법사라는 사실 자체가 까다로울 뿐, 거기서 질문 하나가 더 늘어난다고 뭐가 크게 달라지는 게 아니니 부탁해야지.
회복되는 왕실의 힘으로 마법사 협회를 눌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