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변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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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아.
파도가 몰려왔다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며 가만히 웅크려 있는 자신을 인식하자마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
멋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하벨은 이곳이 또 꿈이라는 걸 알아챘다.
'이런 기억은… 모르는데.'
이번에는 모르는 풍경이었다.
시선 속, 별빛이 뿌려진 바다를 보자 가슴이 뭉클거렸다.
'내… 바다. 내 고향.'
언제나 맡았던 냄새마저 똑같았다.
자신은 천천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다 손가락을 들어 갑자기 모래사장에 글자를 적었다.
가족.
낯선 그 단어가 보이자 하벨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내가… 저 글자를 적었다고?'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
천천히 또박또박 쓰인 그 글자는 몰려오는 파도에 잡아먹혔다.
발가락 사이로 서늘한 물의 감각이 느껴졌다.
"가족, 아버지, 어머니……."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자신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저는 기척을 냈으니 그렇게 매섭게 째려보지 마십시오."
류아가 실실 웃으며 다가왔다.
"용왕님께서는 이럴 분이 아니신데…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번에야말로 류아가 또렷하게 보였다.
밤을 담은 것처럼 까만 눈동자에 걱정이 어렸다.
"아. 이번에 태어난 아이들 때문입니까?"
자신은 그 물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미 긍정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생명이 태어나다니. 참 놀랍지 않습니까? 저도 괜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 어머니께서도 저러셨을까 하고요."
"어머니가… 있었나?"
"물론이죠. 아버지도 있습니다. 제가 어인이지만, 인간이랑 다를 거라고는 딱 하나뿐입니다. 바로 바다에 숨을 쉴 수 있는 부분이요. 아, 용왕님께서도 부모님이 있으십니까?"
류아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나는 눈을 떴을 때, 탄생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자신이 손가락을 흔들자 바닷물이 흘러와 형상을 이뤘다.
자신을 닮은 형상, 크기는 1m도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만큼 작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 없이 물어봤습니다! 당장 머리 박겠습니다!"
밤임에도 류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게 보일 정도였다.
"됐어."
자신의 시선이 모래사장으로 향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용왕이었다."
담담하나, 슬픔이 섞인 것처럼 들려왔다.
"그 말씀은 벌써 수십 번이나……."
고개가 바로 류아에게 돌아가자 그는 활짝 웃으며 손짓으로 말을 계속해보라는 듯 흔들었다.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정말 예뻤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밀려오던 의문에 주춤거렸다.
"가족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모르겠지."
"왜 영원히 모른다고 하십니까? 용왕님께서도 얼른 결혼하셔야죠."
"나 이외에 용왕은 존재할 수 없다. 아마 누군가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계속 살지 않을까 싶구나."
기억이 나지 않는 것과 별개로 하벨은 그 말이 무엇을 내포하는지 알아들었다.
영원히 살 수 있기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두려웠던 것일 테지.
"에이, 가족이 뭐 별거입니까?"
류아는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이를 환기할 겸 자신의 옆에 앉았다.
"적어도 저는 용왕님을 제 형님이라 생각합니다."
"형님이라고?"
"예. 아, 이참에 절 동생이라 생각하십시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음."
금세 미간이 찌푸려졌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진짜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럼 다른 존재는 누굴 빗대는 게 좋겠는가?"
"일단 제 아버지는 엄격하셨고, 어머니는 다정하셨습니다. 형하고 누나는… 저도 없어서 모르겠네요."
류아는 무언가 떠올렸는지 갑자기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신이 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이참에 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용왕님께서 가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자신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속에서 두려움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혹시 제가 곤란한 말씀이라도 드린 겁니까?"
"아니. 내가… 그래도 될지 모르겠구나. 다들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건 용왕님께서 혼자 있는 걸 좋아하시고, 맨날 인상만 찌푸리고 계시니……."
"나도 다 같이 있는 게 좋다."
류아는 눈을 깜박거리다 갑자기 웃었다.
"푸하하핫!"
"왜 웃는가?"
"뭐예요. 우리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잖습니까?"
류아는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똑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류아가 겨우 웃음을 멈추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기서 슬쩍 말씀드리자면 저희 모두는 용왕님을 존경하고, 든든한 막냇동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류아가 이런 소리를 했다고?'
과거 자신이 얼어붙은 것처럼 하벨 역시 멈칫거렸다.
왜 하필 막냇동생인지. 그 단어가 이상하게 걸려왔다.
"가족이 거창하다면 거창할 수 있는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한껏 잘난 체하던 류아가 무릎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얼른 가시죠, 용왕님. 오늘 안줏거리가 생겼으니 다들 기뻐할 겁니다! …크. 오늘 술은 진짜 달달하겠습니다. 벌써 입이 간지럽네요."
류아는 장난기가 어린 얼굴로 키득거렸다.
* * *
하벨이 눈을 뜨자 자신의 코를 덮은 아라의 꼬리가 보였다.
하벨은 아라를 조심스레 옆에 눕힌 뒤에 창문 너머로 내려오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정말 저게 내 과거가 맞다면…….'
하벨은 이제야 왜 룬델의 다정한 시선에 마음이 그렇게 흔들렸는지를 이해했다.
평생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 이렇게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가족을 바랬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류아가 꺼낸 '가족'이라는 말에 뭉클거린 건 사실이었다.
늘 동떨어졌던 자신의 존재가 어딘가에 소속되다니.
'기왕 보여줄 거면 많이, 오래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 이건… 너무 짧다.'
하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정말 제 부하들에게 가족과 관련된 일을 들었는지.
술판이 열렸는지.
그 뒤는 어떻게 됐는지, 일어나는 궁금증과 함께 안타까움이 커졌다.
이렇게 소중한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하벨은 아라가 깨지 않게 상체를 일으켰다.
"도련님. 혹시 일어나셨어요?"
레디나가 목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페트리오가 왔어요."
"지금? 좀 이른 시간인 것 같은데."
"지금 어, 몇 시냐면요."
"새벽 5시 32분입니다. 잠을 깨워 정말 죄송합니다, 도련님."
페트리오가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숙취는 괜찮나 봐?"
하벨이 키득거렸다.
연회가 길어진 만큼 티에라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어 왕실이 내어준 방에 하루 묵게 되었다.
"어제 술 몇 잔 들어가자마자 잘못했다고 엉엉 울던데."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큽.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한테 이 잘못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련님께서 빨리 주무시러 가셔서 그보다 더한 건 못 보셨어요. 도련님이 가시고 나서가 진짜였는데요. 어제 페트리오가 카샬의 다리를 잡으면서……."
"그건… 잊어주십시오, 제발요."
페트리오는 그대로 걸음마저 멈춰서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손끝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넘어가도 카샬하고 레디나는 그럴 준비가 안 된 모양이야."
하벨은 입이 간지러워 보이는 레디나를 가리켰다.
"술에 약한 줄은 몰랐어요."
레디나가 히쭉 웃다 슬쩍 하벨을 바라보았다.
"카샬도 알고 싶었지만, 근무 중에 술은 먹지 않는다고 거절하더라고요. 페트리오처럼 엉엉 우는지 궁금하잖아요?"
"확실히 그것도 궁금하네. 기왕이면 좀 웃긴 술주정이면 좋겠네."
"도련님께서는 어떤가 궁금하기도 한데… 안 되겠네요."
하벨의 맑은 눈동자를 보니 레디나는 마음이 찔렸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
"레디나, 이건 네가 마음을 접어. 카샬이 술은 먹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병 때문이십니까?"
페트리오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 아마 걸리는 날에는……."
하벨은 뒷말을 잇지 않았다. 굳이 상상하고 싶진 않았다.
"무슨 일인데, 좀도둑? 아, 레디나. 카샬은 어디 갔어?"
"도련님 아침 준비를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했어요. …그 뭐랬더라. 헤레스 씨가 준 약을 보면서 '연회의 꽃은 독이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던데요?"
[…엇! 아니야! 연회의 꽃은 피야!]
아라가 벌떡 눈을 떴다.
"아직 더 자도 돼, 아라야."
하벨은 침대로 걸어가 아라를 쓰다듬자 레디나가 두 손을 꼭 쥐었다.
"아라님이 저기서 주무시고 계신가요?"
"그래. 지금 하품하고 있어."
"찌, 찔러봐도 될까요? 하품하는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봐도 되나요?"
레디나의 눈에도 이불이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쉽지만, 안 되겠네. 다시 눈을 감았거든."
자신의 발바닥을 보며 꼼지락거리던 아라는 하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급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하벨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재차 물었다.
"새벽에 술김에… 피나토의 기억을 읽다가 거대 정화 장치와 관련된 걸 봤습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지금 거대 정화 장치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귀족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하벨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더 들어보기로 했다.
"도련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최대 2주까지의 기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피나토의 기억을 읽은 건 놈이 그 2주간 벌인 일을 찾는 게 주목적이었지만, 놈이 꺼냈던 말이 정말 신경 쓰이더군요."
―…기상국장. 그래! 놈이 남아 있거든. 내가 필요할 거야. 내가 정보를 가지고 있어! 내가 말이야!
피나토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 나도 놈이 그냥 말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해."
하벨의 눈 사이가 좁혀졌다.
"피나토가 사진을 손에 쥐고 있었고, 그곳에 거대 정화 장치가 보였습니다."
손에 쥐었던 사진 전부를 조합했을 때, 분명 거대 정화 장치였다.
다만, 그 주변에 검을 물처럼 보이는 게 넘실거려 이상할 정도로 섬뜩했다.
"피나토가 거대 정화 장치에 관심을 가졌을 리가 없고. 웨인 놈이랑 이어져 있는 거야?"
하벨의 물음에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거대 정화 장치를 건드렸던 사람은 바로 웨인입니다."
"날씨 예보조차 못 하는 그놈이 거대 정화 장치까지 건드렸다고요?"
레디나는 듣다 말고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느꼈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원래 검은 달이 뒤에서 움직이는 거였다.
적어도 망가지기 전까지.
세계의 평화와 안정.
물이 오염된 이 세계에서 그 두 가지와 거대 정화 장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닌가.
"자세히 말해봐."
하벨은 차분히 물었다.
"'거대 장치가 사라졌다.', '웨인 놈이 왜 여기에 관심을 두는 거지?', '놈 뒤에 뭔가가 있다, 어서 조사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제가 피나토에게 다시 가겠습니다."
"아니야. 기껏 깨진 머리를 다시 붙여줄 이유는 없지."
하벨의 눈이 반짝이자 페트리오는 뒤늦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이전부터 하벨이 거대 정화 장치 일에 관심을 가졌고, 지금도 조사 중이긴 하나 잠깐 귀족들의 문제로 미뤄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피나토 웬으로부터 얻은 정보가 반가운 나머지 다른 걸 잊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저 도련님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조건 쟁취한다는 걸.
"도련님. 이번 일로 무리하셨는데, 당분간…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트리오가 힘없이 말하자 레디나는 키득거렸다.
"이미 늦었어요. 도련님 눈에 불이 켜진 거 안 보여요?"
"…이런."
페트리오는 벌써 손바닥에 땀이 흘러내렸다.
* * *
"…콜록, 콜록!"
룬델은 물을 삼키다 말고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기침했다.
[그러게 천천히 마셨어야지.]
세렌이 룬델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와, 아버지께서 이렇게 당황하신 모습은 정말 오래간만인데요?"
라르웬은 말과 달리 하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방금 하벨이 꺼낸 말은 자신이 들어도 황당했으니.
"…하, 하벨아."
"예, 가주님."
"지금 거대 정화 장치를 조사한다고 했더냐?"
"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습니까. 전에도 이미 말씀드렸고요."
"하벨아. 이번 일로 네가 많이 무리했다. 벌써 안색이 나쁜 걸 보거라."
룬델은 이전보다 야위어진 하벨의 얼굴을 보며 스테이크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그래, 막내야. 나도 그렇고 아버지께서도 반대하는 게 아니야. 휴식기를 가지라는 거지."
라르웬 역시 자신의 앞에 있던 닭다리 요리가 담긴 그릇을 하벨에게 밀었다.
"웨인 톨이 거대 정화 장치를 없앴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하벨에게 또 다른 고기 음식을 내려놓던 카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멍청한 새끼. 도련님 앞에서 저런 감질나는 음식을 내밀다니.'
대체 누가 하벨을 부추겼나 싶었는데 페트리오였다.
하벨이 거대 정화 장치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 말을 꺼내기 전에 자신하고 상의를 하던지.
'도련님께서는 무리하시면 안 되는데.'
언제 또 물의 저주가 그를 덮칠지 몰랐다.
요새도 조마조마하지 않은가.
"…그놈이 왜?"
룬델의 눈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기상국장.
물이 오염된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날씨를 담당하는 부서의 책임자이자 날씨 정보를 손에 쥐고 돈을 갈취하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 아닌가.
"그거야 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들이 건넨 그릇에 담긴 음식을 바라보았다.
이미 날씨라는 엄청난 무기를 쥐고 있음에도 굳이 거대 정화 장치에 손을 댔다는 건 욕심이 그만큼 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뭐가 됐든, 거대 정화 장치 때문이라도 조사할 필요가 있겠네.'
하벨은 음료수가 든 잔을 잡으며 실실 웃었다.
"물론, 왕실만 좋은 일을 시킬 순 없겠죠?"
숟가락을 올려놔야지.
가끔은 편해도 괜찮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