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모든 건 제자리로(3)
* * *
"말리러 온 거 아닙니까?"
하벨은 기가 찬 듯이 반응했다.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네가 날뛰어도 내가 말릴 자신이 가득하거든."
라르웬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들도 대거 죽었겠다, 하벨이 여기서 날뛰어봤자 왕의 뺨을 때리는 거 말고는 뭘 하겠나.
"적어도 연회장에서 하하 호호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보다 더 재미있을 테고."
"연회장이 싫으십니까? 그런 자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요."
하벨이 씩 웃자 라르웬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난 떠들썩한 거 별로 좋아하진 않아. 원래 연회라는 게 싫기도 하지만, 분위기가 좀 이상해서."
"이상하다뇨?"
하벨의 물음에 주변을 살피던 라르웬이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우리 가문이 왕실에 강한 충성을 내보여야 한다는 듯한 말을 은연중에 던지더라고. 이제 슬슬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그때를 상상하는지 라르웬의 나머지 눈마저 찌푸려졌다.
"영토… 분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페트리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 귀족들이 대거 죽었으니 놈들이 소유하던 영토가 현재 왕실에 충성한 귀족들에게 돌아가겠지."
"그 문제는 이제 내 손을 떠났습니다. 더는 개입하고 싶진 않습니다. 내가 하려던 일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으니까요."
하벨은 실실 웃었다.
이번 일로 티에라 가문의 힘을 왕실이 보았으니 현명하게 대처하리라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목줄이 풀린 개에게 물리게 될 테니까.
"그래. 나야 틈의 세계 일 때문에 개입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께서 그냥 보고 계시진 않을 텐데. 목소리를 벌써 높이다니 멍청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라르웬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패배자에서 하벨이 내린 줄을 타고 겨우 올라온 주제에 벌써 권력자 짓을 하려는 꼴이 참 우스웠다.
"기억하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밟아주면 됩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형님."
맞는 말이지만, 순진한 얼굴로 꺼내는 그 말에 라르웬은 이상하게 걱정이 앞섰다.
저래도 되는 걸까.
"이제 피나토 웬을 보러 갈 겁니다, 형님."
"…전하께서 널 이용하시려는 게 아니셔야 할 텐데."
살짝 날카로워진 라르웬의 눈매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따라가는 겁니다."
"왜?"
"놈이 가진 망상 병 좀 깨부숴주려고요."
하벨이 씩 웃었다.
[난 찬성.]
루룸이 손을 흔들자 아라도 다급히 제자리에서 뛰었다.
[이 몸도!]
* * *
[어? 어디서 봤는데…….]
루룸이 한 남자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뭐랬더라, 기상국장 웨인 톨이라고 했나?'
하벨은 남자를 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때, 그를 보자마자 피어오른 랜턴의 검은 불꽃이 있기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전보다 검은 불꽃이 더 커진 것 같은데.'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웨인 공?"
"…라, 라르웬 공."
웨인은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는지, 라르웬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했다.
연회장에서 모든 귀족이 죽은 건 아니었다.
갑자기 모든 귀족이 사라진다면 그 공백을 감당할 수 없을 테지.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렸다.
그리고 웨인처럼 냄새를 맡고 연회장에 참석하지 않은 귀족들까지 있었다.
웨인은 등에 벽이 닿자 민망함을 드러내며 다급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로 보입니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은 분이 여기에 계시다니요."
"…잠깐 몸이 아팠고, 오늘 연회장에 일어난 소식에 놀라 달려왔습니다."
이전과 달리 웨인은 라르웬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당장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말이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라르웬은 태연하게 말을 받아쳤다.
"세상에 어느 왕국에도 이런 법도는 없습니다. 재판도 치르지 않고 귀족을 참형하다뇨…!"
[와, 뻔뻔하네. 이래서 귀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흥미로움이 가득한 눈동자로 루룸은 뒷발을 흔들었다.
[라르웬, 어서 입 좀 털어 봐. 하벨이 출동하기 전에 말이야.]
슬쩍 하벨을 보자 그의 입가가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대체 뭘 꾸미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라르웬은 그 말에 정신을 번뜩 차렸다.
"아, 소식이 늦었나 봅니다. 곧 웨인 공도 조사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전하께서 연회장에 나오지 않은 귀족들에게 모두 왕명을 내리셨으니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올라간 라르웬의 미소는 정말로 얄미웠다.
"왕명이라뇨?"
"반역을 꾀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빈정거리는 그 말투에 웨인의 얼굴이 금세 분노로 굳어졌다.
하룻밤 사이 판도가 기울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웨인은 분노를 최대한 억눌렀다.
"티에라 가문은… 앞으로 그 위치를 자각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충고 고맙습니다. 하지만 티에라 가문은 공이 생각해줄 만큼 작은 곳이 아니라서요. 공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날씨에 조금 더 신경 써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저번에 보니, 기상국이 하나같이 엉망이더라고요."
너나 잘해라.
라르웬의 그 말에 하벨이 대놓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피식.
단숨에 웨인의 눈동자가 하벨에게 돌아갔다.
"지금… 나를 비웃었습니까?"
"시비를 걸 만큼 한가하신 모양입니다, 웨인 톨 공."
누군가의 목소리에 웨인은 흠칫 놀랐다.
소름이 돋을 만큼 익숙한 목소리가 아닌가.
고개를 돌린 웨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기사와 함께 걸어오는 자는 페트리오가 아닌가.
"…페, 페, 페트리오?"
웨인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이냐!"
분명 피나토 웬이 페트리오가 죽었으니 안심하라는 편지를 귀족들에게 보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연회 때 페트리오를 봤다는 소식이 전해져 그 사실을 확인하러 지하 감옥으로 몰래 왔을 뿐이었는데.
웨인의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설마하니 살아 있을 줄이야.
"그렇게 반갑습니까? 내가?"
페트리오는 웨인을 노려보았다.
피나토 웬을 보려면 시종이 아닌 직접 왕의 인장이 찍힌 증서를 내보여야 했기에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페트리오는 하벨을 살핀 뒤에야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내가 네놈의 목줄 중 뭘 쥐고 있는지 여기서 알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꺼져라, 웨인 톨."
단순한 협박이 아니기에 웨인은 페트리오와 라르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페트리오와 티에라 가문이 손을 잡다니.
[잘한다, 좀도둑! 이 몸이 칭찬해줄게!]
아라가 당장 페트리오를 안았고, 웨인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네놈… 네놈은 목을 조심하거라, 페트리오. 되살아 왔든 아니든 네놈을 죽이려 벼르고 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
웨인은 페트리오를 향해 으르렁거린 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걸었을까, 웨인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라르웬 공이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 없을지는 몰랐습니다. 저놈과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이건 진심으로 하는 충고입니다!"
[씨잉. 대장을 노려봤어!]
아라가 털을 부풀리며 웨인의 뒤를 쫓으려 하자 하벨은 당장 꼬리를 잡았다.
"내버려 둬."
하벨은 그대로 아라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저것도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저놈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에르티안 왕국의 커다란 기생충일지도 모르니.
* * *
"정말 잘 어울리네, 피나토."
페트리오는 피나토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퉁퉁 부어올랐고, 두 다리가 부러졌는지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모습에 웃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너도 이런 식으로 나를 내려다보았겠지."
과거와 달리 그 위치가 뒤바뀌었다.
자신은 저쪽에, 피나토는 자신이 서 있는 쪽에.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피나토의 눈빛이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직도.
피나토의 눈동자가 라르웬을 향하다 하벨에게로 돌아갔다.
"…너인가, 하벨 티에라?"
피나토는 바짝 마른 입술을 열었다.
지하 감옥에 있다고 해도 귀까지 먹어버린 건 아니었다.
티에라 가문이 갑자기 저택을 습격할 거라는 건 예상밖에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오래 계획했던 일을 하벨 티에라가 이뤄주지 않았던가.
"뭐가?"
하벨은 이가 빠져 발음이 새는 피나토의 말을 들으러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랜턴은 그에게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네가 이 모든 걸 뒤엎었냐고 물었다."
"혹시 뺏겨서 분해?"
"그럴 리가. 분하다니."
피나토는 바들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티에라 손에 가문이 무너져 내렸어도, 부러진 두 다리가 아파도, 차디찬 감옥에 있음에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조국인 '에르티안' 왕국이 드디어 바로 섰으니.
"내 판단이 잘못됐다. 네가 죽었으면… 이 모든 상황이 오지 않을 뻔했으니까. 미안하구나."
피나토의 사과에 라르웬은 순간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삼켰다.
하벨을 죽이려 한 주제에 소망을 이룬 것처럼 행복해하다니.
역겨웠다.
"넌 죽지 않아, 피나토."
하벨이 방긋 웃자 피나토는 순간 쇠창살을 붙잡았다.
"…뭐라고?"
"너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거야. 이제 하나씩 네 흔적을 지워버릴 테니까."
하벨은 페트리오를 가리켰다.
"네가 하려던 그 흔적은 네가 짓밟았던 페트리오가 덧칠을 할 거고."
"그게… 무슨 말인가?"
당황스러운 소식에 쇠창살을 잡은 피나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말 그대로 너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거야.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죽여야지?"
"왜?"
"왜라니. 내가, 내가 대법관일세. 나하고 얽힌 귀족들이 몇인가? 당연히 나를 죽여 이 나라에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나?"
피나토는 하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 재무부 장관하고 자문관의 죽음으로 정의가 세워질 테니까."
하벨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악당이든 영웅이든 그곳에 너만 없는 거야, 피나토 웬."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 나를 죽여야지! 응?"
피나토의 눈이 희번덕 커졌다.
"내가!"
피나토는 방긋 웃는 하벨의 미소에 불안함을 느꼈다.
모든 게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가.
이건 아니었다.
이건 자신이 그리던 미래가 아니었다.
"내가 너한테 독을 먹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오늘 일은……."
"그래. 지금 이 상황이 없을 수도 있지. 그런데 왜? 네가 원해서 일을 저질러놓고, 이제 와서 악당이든 뭐든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에르티안 왕국을 구하려면 강한 악이 필요했어! 네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내가 그 둘을 짓밟고 가장 높은 곳에 섰을 거다!"
"하지만 넌 그 악조차 되지 못했어."
하벨은 페트리오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악이 되고자 짓밟고 죽인 건… 글쎄. 대체 뭘까?"
피나토가 페트리오를 짓밟아 귀족들의 허수아비가 될 뻔한 에르티안 왕국을 막았고, 무너진 왕정파 귀족 세력들을 보호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넌."
하벨은 물러났던 걸음을 다시 걸었다.
"그냥."
피나토와 눈높이를 맞춰주고.
"어정쩡한 존재야."
활짝 웃었다.
뺨을 후려갈기는 듯한 말에 쇠창살을 잡은 피나토의 손에 힘이 빠졌다.
하벨은 공허함이 엿보이는 눈동자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아직 안심하기에 이를 텐데?"
하지만 피나토가 부들부들 떨며 하벨을 붙잡으려고 했다.
"…기상국장. 그래! 놈이 남아 있거든. 내가 필요할 거야. 내가 정보를 가지고 있어! 내가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하벨이 멈칫거리자 페트리오는 참다못해 나섰다.
스겅.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단숨에 피나토의 손을 베려 했다.
하지만 피나토가 단검을 보자마자 뒤로 물러났기에 그의 손등에 작은 자상이 생긴 게 전부였다.
"네놈이… 나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피나토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더러운 새끼. 네놈 때문에 에르티안 왕국이 무너져 내린 거야! 네놈이 존재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다고! 너는 죽어야 했다고! 죽어! 죽으라고!"
"이제 가시죠."
페트리오는 애초에 왔던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는 이곳에 있을 미련이 없었다.
피나토의 흔적을 지우려면 그가 가진 정보가 필요했으니.
"그래, 네가 괜찮다면야."
하벨은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어디서 개가 짖으니 너무 시끄럽네요."
"그렇다네? 그럼, 안녕."
하벨은 피나토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자, 잠깐만!"
피나토는 다급히 쇠창살을 잡았다.
"이대로 가면 어떡해! 내가! 내가 에르티안 왕국을 구했다고! 내가 구했어! 내가 정의야! 내가 정의라고!"
* * *
"아까 보니까 좀도둑 너, 귀족들을 정말 잘 죽이던데. 그것도 약점만 노려서 기가 막히게 말이야. 아, 무서운 것도 한몫했고."
라르웬은 계단을 올라가며 말했다.
[어어! 이 몸도 그때, 좀도둑의 표정을 봤어! 아주아주 무서웠어.]
아라가 눈에 힘을 주며 그 당시 페트리오를 흉내 내려 했지만, 그 발끝도 미치지 못해 하벨은 키득거렸다.
"라르웬 님. 제 복수는 이미 끝이 났습니다.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 복수에 눈이 멀 일은 없습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을 힐끔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나를 봐?"
하벨과 시선이 맞자 페트리오는 깜짝 놀랐다.
"…설마 그 목표라는 게 나는 아니겠지?"
"맞습니다."
"안타깝지만, 넌 정령사가 될 수 없어, 좀도둑. 그건 포기해."
"아닙니다. 저는 정령사가 될 마음조차 없습니다."
"그럼, 설마… 나를 따라오겠다느니, 충성을 바치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꺼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분명히 싫다고 했어. 너나 나나 목적이 있기에 힘을 합쳤을 뿐이야. 나는 네 인생을 책임져줄 마음이 전혀 없어."
하벨의 눈빛이 살짝 매서워지자 페트리오는 가볍게 웃었다.
"안심하십시오, 도련님."
"정말?"
"예. 절대로 저는 도련님께 제 인생을 맡긴다든지, 무언가를 짊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은 분인데, 그런 걸 맡기면 되겠는가.
페트리오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벨 몫까지 짊어지겠다고 한다면 분명 부담스러워할 테니.
"…아."
늘어지는 라르웬의 말꼬리와 함께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잘해봐, 좀도둑. 나는 내 동생한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찬성이니까."
"무슨 말입니까?"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그의 생각을 막았다.
"뭐가 됐든, 오늘을 즐겨. 넌 그래도 돼, 막내야."
오늘, 하벨의 시작으로 에르티안 왕국이 완전히 바뀐 날이 아닌가.
"맞습니다. 오늘은 그간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응응! 대장은 고생 많았으니까 쉬는 것도 잘 쉬어야지.]
아라는 하벨의 목에 매달려 얼굴을 비볐다.
'…아.'
하벨 티에라가 돌아오면 어떤 상황이 좋을까만 생각하다 보니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걸 눈치챘다.
'해냈구나.'
비로소 하벨은 자신의 발자취를 바라보았다.
거대 정화 장치를 이어 이번 일을 무사히 이뤄냈다.
'내가 또 해냈구나.'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이제야 기쁨이 밀려와 참 우습다 싶었다.
"그래야죠. 뭐가 됐든 축제잖습니까? 축제는 즐거워야죠. 아, 생각이 바뀌기도 했고요."
"생각이 바뀌다니?"
라르웬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형님 말을 들으니 짜증이 살짝 나서요. 어차피 귀족하고 부딪힐 거, 미리 기세 좀 눌러 놔야겠습니다. 이용당하는 건 이제 싫거든요."
하벨은 눈웃음을 지으며 실실 웃었다.
천천히.
그리고 거세게 에르티안 왕국이 새롭게 달라지길 바라며 연회장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