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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0화 (30/415)

30화. 정리해(3)

* * *

남자는 밀려오는 진짜 공포에 버티지 못하고 눈이 뒤집혔다.

하벨은 몰아치는 어지러움에 숨을 깊게 몰아쉬며 우산에 기댔다.

[삐잇. 삣. 삣!]

아라가 하벨의 머리에 올라와 쿵쿵 뛰었다.

마치 혼내는 것 같아 하벨은 실실거렸다.

"이제 안 움직일게. 지금도 어지러워 죽겠어."

하벨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놈의 치아와 튄 피를 힐끔 쳐다보다 베개에 살짝 기댔다.

카샬이 오면 잔소리를 할 테지. 살짝 치워둬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바닥에 튄 피를 모으려 천천히 힘을 사용해보았다.

침대에 살짝 튄 피는 미동도 없었지만, 바닥에 퍼진 피가 요동치더니 천천히 움직였다.

'오. 이전보다 더 잘 움직이네.'

하벨은 주룩 흐르는 코피에 힘을 멈추려던 차 문이 열렸다.

[야, 하벨.]

세렌이 그대로 날개를 파닥거리며 기겁했다.

[…세상에!]

그래도 이름을 알려줬으니 얼굴은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찾아왔더니 하벨이 코피를 흘리고 있지 않은가.

가뜩이나 창백한 낯짝에, 독까지 당한 와중에 피라니.

세렌은 당황했다.

아무리 하벨이 싫지만, 그래도 눈앞에 벌어진 일을 어떻게 외면하겠는가.

[기다려!]

세렌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잠깐만……!"

하벨이 황급히 일어나 세렌을 붙잡았다.

찌르르.

세렌을 잡은 하벨도, 하벨에게 붙잡힌 세렌도 깜짝 놀랐다.

여기에서 교감이 될 줄이야.

'세렌이… 날 싫어하는 게 아닌가?'

짝!

[손대지 마!]

세렌은 하벨의 손을 내쳤고, 비틀거리던 하벨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라가 바로 세렌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아, 아니. 아라야, 나도 모르게 그런 거야. 실수였어.]

[삐이이.]

세렌이 변명하지만, 아라는 세렌을 노려볼 뿐이었다.

"고마워, 세렌, 아라야."

하벨은 세렌도, 아라도 민망하지 않게 둘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다 자신을 걱정해서 한 일이 아닌가.

"바닥에 있는 건 하벨의 피가 아니야. 저놈 피지."

[코에 흐르는 피도?]

"아, 이건 하벨의 피가 맞아."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아깐 당황해서 몰랐지만, 세렌은 파랑새였다.

부리는 완전히 노랗게 칠해졌고, 몸 군데군데 파란색이 칠해져 있었으니.

이 역시 순환이 길이 비워졌기 때문에 보이는 걸까.

[삐이잇!]

세렌이 다가오자 아라가 소리쳤다.

마치 오지 말라는 듯해 허공에 머물던 세렌이 축 처진 모습으로 침대에 앉았다.

'참 어려운 관계네.'

세렌은 자신을 싫어하는 듯했고, 아라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라는 자신을 좋아하고, 세렌을 싫어했다.

하벨은 중간에 끼어버린 상황이 참 우스웠다.

* * *

"…와."

카샬은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한바탕할 줄이야.

"도련님께서 저놈의 강냉이를 털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장난스럽게 웃는 하벨을 보자 카샬은 입이 간지러웠다.

처음 하벨이 우산을 사용해 적을 공격했을 때도 느꼈지만, 이번에도 똑같이 느꼈다.

적이라 생각하는 이에게 자비가 없다는 걸.

무언갈 죽이는 게 두려워 무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하벨의 이전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유를 억압당한, 음…….'

카샬은 바뀐 하벨의 자아를 파악하려 했지만, 아직 어려웠다.

"원래는 그냥 같이 체포하게 하려고 했는데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서 말이야."

"아, 그럼 어쩔 수 없죠. 이미 죽을죄를 지었는데 도련님의 자비로운 마음씨도 모르고 머리를 살살 굴렸을 겁니다."

방금까지 하벨이 달라진 모습을 깊게 생각하던 카샬은 바로 상황을 이해하며 기절한 남자를 걷어찼다.

자신이 있었으면 죽였을 테지.

"붙잡았어?"

링거 거치대를 잡은 하벨을 보자 카샬은 뭐가 먼저인지를 생각했다.

"일단 방을 옮기죠."

"방이 3개니까 편하네."

"전 죽을 맛입니다."

"유능하다며?"

"유능해도 몸은 하나죠. 제가 또 있으면 모르겠지만요."

하벨이 얼굴을 구기자 카샬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프십니까?"

"가자. 어디 방을 쓸 건데?"

"왼쪽으로 가시죠."

카샬은 먼저 움직여 문을 열고는 왼쪽을 가리켰다.

"붙잡았습니다."

"쟤도 같이 넘겨줘."

"알겠습니다. 아주 줄줄이 엮이네요."

"아, 좀도둑한테도 잠깐 들릴게."

자연스러운 말에 카샬은 자신도 모르게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도련님? 혹시 독에 당한 일을 잊으셨습니까?"

"저놈이 여러 뒷세계를 들러 약을 샀더라고."

"예?"

"네가 오기 전까지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는데."

하벨이 말을 멈추자 바퀴가 '드르럭'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곧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덜미를 붙잡히지 않으려는 발버둥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야. 일종의 계약서 같은 일이 아닐까 싶어."

"계약서라뇨?"

"각 영토를 담당하는 귀족들이 자신의 땅에 사는 뒷세계 주민들을 모르는 게 이상하잖아?"

간섭하지 않을 순 있지만, 절대로 모를 리가 없었다.

"귀족은 영토를 하사받았기에 그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하지."

"…그래서 이번 독 사건이 귀족들을 위한 계약서로 쓰였다는 말씀을 하신 겁니까?"

"맞아. 서로에게도 믿음이 필요하잖아? 계약서는 부담스럽고, 이 정도가 딱 좋은 거지. 같은 죄를 지었지만,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없는 건 아니니까. 설령 들켰다 한들, 귀족 중 한 세력만 죄를 덮어 희생시키면 그뿐이잖아."

"미친 거 아닙니까?"

"그래. 미치도록 티에라 가문이 가지고 싶은가 봐."

실실 웃는 하벨의 웃음에 카샬은 마른 침을 삼켰다.

사고 치기 전 모습 같아 불안했다.

"그러니까 나도 해 봐야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카샬의 걸음이 반 박자 정도 늦어졌다.

"나도 그 판에 끼어들려고."

만약 자신의 가설이 맞다면 마법사 협회의 참여는 이미 확정이었다.

지금 공동의 목적이 티에라 가문이라면 시선을 흘리는 게 먼저였다.

"좀도둑이 이런 사건에 전문가야.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래서 지금 가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걔는 오늘 탈출해야 해. 그 뒤에 만나야지."

"……?"

카샬은 눈살을 찌푸리다 하벨이 즐거워 보여 그냥 입을 다물었다.

'탈출이 뭔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지 카샬은 속으로 망설임을 눌렀다.

* * *

"…봐. 탈출했다."

하벨은 목소리를 낮추며 누군가를 가리켰다.

밤이 찾아왔지만, 저택에 세워진 가로등 덕에 제법 환했다.

하벨의 손가락은 가슴팍에 노란색으로 된 가문 문장을 단, 정령 기사를 따라 쓰레기를 담은 수레를 밀며 걸어가는 두 사람 중 한 명을 향해 있었다.

페트리오였다.

그가 주변을 살피며 누군가를 찾자 하벨은 약속했던 신호를 주기 위해 카샬을 시켰다.

"어서 돌멩이 던져. 네가 나보다 더 잘 던진다고 했으니까."

"…도련님."

카샬 역시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렸다.

"왜? 시간 없어. 좀도둑이 불안해하는 거 안 보여?"

"왜 꼭 이렇게 봐야 합니까?"

카샬은 정원에 심은 나무 뒤에 자신하고 하벨이 쪼그려 앉아 있는 상황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정령 기사가 배신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고.

정령들이 잠깐 갔다 올 테니 저택에서 놀고 있으라는 정령 기사의 말에 저택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하벨의 말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모습이 더 기가 찼다.

"드라마에서 이렇게 엿보던데?"

하벨은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누군가를 미행해본 적이 없기에 어디선가 봤던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지금 좀 재미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게 왜 이렇게 미행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드라마요? 연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카샬. 돌을 던져야 한다니까."

"제가 그냥 처리하겠습니다. 쪼그려 앉으니 다리가 아프네요."

"아니. 나도 머리 깰 줄 알아. 조금 더 지켜보자."

"…예?"

"던져."

"진짜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냥 내가 할게."

카샬은 하벨이 돌멩이를 손에 쥐자 어깨에 힘을 뺐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근처에 있던 돌을 던졌다.

탁.

절묘하게 굴러간 돌 소리에 정령 기사가 반응하자 페트리오는 태연하게 말했다.

"제 실수입니다."

당장 페트리오의 옷자락을 쥐며 정령 기사가 얼굴을 구겼다.

"조심 좀 해. 내가 거지 같은 정령을 얼마나 달랬는지 알아?"

지금 간신히 달랜 정령들이 낯선 소리에 저 문을 열고 나오면 끝이었다.

[삐…….]

하벨은 화가 난 아라의 입을 막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아라 널 좋아해."

[삐이.]

헤헤.

아라가 배시시 웃으며 하벨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보셨죠? 기가 막혔죠?"

카샬이 우쭐거리는 것도 모자라 가까이서 들리니 더 듣기 싫었다.

"얄밉네."

"이제 움직입니다."

카샬은 정령 기사가 밖으로 향하는 뒷문을 열자 바로 보고했다.

"신나 보인다?"

하벨은 갑자기 적극적인 카샬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반응했다.

"사고를 치고 난 후라서 그런지 재미있네요."

"그렇지? 나도 신나."

"이게 다 제가 기가 막히게 던져……."

"따라가자."

하벨은 자연스럽게 카샬의 자랑을 끊으며 움직였다.

쳇.

카샬이 혀를 차자 하벨은 실실 웃었다.

* * *

밖에는 마차가 떡하니 준비되어 있었다.

정령이 돌아다니지 않는 건 아니지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벨은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허점이 너무도 잘 보였다.

왜 티에라 가문의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지를 이해했다.

'아마 룬델은 정령들에게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알려달라고 했을 거야.'

자신의 사고와 인간의 사고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정령과 사람이 생각하는 수상함 역시 달랐다.

이전에도 정령 기사와 시종이 같이 쓰레기를 버리러 간 적이 있었기에, 저택 밖에 마차가 있던 적이 있었기에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

'수상한 자가 아니라 그냥 CCTV처럼 보고하는 형태로 바뀌었어야 했어.'

하벨은 카샬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모처럼 굳어져 있었다.

"네 눈에도 보이지?"

"예. 뭐가 문제인지 제 눈에도 보입니다. 속이 끓네요. 저택 밖에 마차가 있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일인데. 왜 지금까지 가주님께 보고가 닿지 않은 건지."

"나도 말할 거지만, 너도 가주님께 제대로 말해."

티에라 가문의 중심이 룬델에게 있었기에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힘이 한곳으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허점을 정령들로 메우는 방식을 택했지만, 그마저도 큰 허점이 드러났다.

하벨은 허리춤에 찼던 우산을 빼 손에 쥐었다.

"…도련님은 가만히 계셔주십시오."

카샬이 부탁했다.

"왜?"

"어제 독에 중독되신 걸 잊으셨습니까?"

"아, 맞다. 소중히 하기로 했지."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을 바라보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런데 던지는 건 별로 안 힘들어."

카샬이 말리기도 전에 갑자기 일어난 하벨은 집중해서 페트리오 옆에 있던, 시종 한 명을 향해 우산을 던졌다.

"내가 못 살아!"

카샬은 그대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스겅.

검을 뽑자 하벨이 던진 우산이 시종의 발등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카샬은 힘겹게 웃음을 참으며 집중력을 이어나갔다.

'이런.'

하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어라!"

카샬은 정령 기사가 소리치며 휘두르는 검을 피했다.

베는 척하다 손잡이로 시종의 이마를 가격한 후 발로 기사의 머리를 후려찼다.

빡!

비틀거리는 정령 기사의 모습에 다리를 걸어 넘어트려서는 목에 칼날을 겨눴다.

의문으로 가득 찬 정령 기사의 눈빛에 카샬은 비웃음을 그렸다.

"그래. 내가 왜 집사인지 의문이겠지. 나는……."

"좀도둑."

하벨은 자연스럽게 카샬의 말을 자르고는 멍하니 있던 페트리오를 불렀다.

"예, 예!"

"타."

하벨은 자연스럽게 말을 달래며 다른 손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페트리오의 눈이 커졌다.

"타… 다뇨?"

"털러 가야지. 그런데 나는 운전할 줄 몰라. 누구 할 줄 아는 사람?"

하벨이 손을 흔들자 카샬은 발로 정령 기사의 팔을 짓누르며 기겁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 시각이 몇 시인데 이러십니까. 도련님께서는 얼른 쑥쑥 크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가야지. 나도 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

하벨은 말이 진정되자 아공간 주머니에서 가면을 세 개 꺼냈다.

"짠."

"설마 저희가 써야 하는 겁니까?"

카샬이 꺼리며 물었다.

"맞아. 각자 취향대로 골라 봐."

"제 취향은 없습니다."

"그럼 이걸로 해."

하벨은 가장 화려한 걸 카샬에게 넘겼다.

카샬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벨이 키득거리며 페트리오에게도 가면을 건넸다.

"좀도둑."

"예, 도련님."

"여기 뒷세계에 마법사가 있어?"

하벨은 추가로 종이 한 장을 페트리오에게 건넸다.

남자가 적었던 뒷세계 위치였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됐네. 그럼, 카샬. 이놈들이 어디 뒷세계에 왔는지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

하벨의 눈매가 한순간 서늘해졌다.

"그리고 싹 정리해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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