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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9화 (29/415)

29화. 정리해(2)

* * *

* * *

"…나한테만 독이 통했다는 말은 뭔가와 섞였을 때 독으로 작용하는 약물을 썼다는 말이잖아? 그러려면 일단 내가 먹는 약들을 다 알아야 할 테고. 그렇지?"

하벨은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듣고 있어, 카샬?"

"듣고… 있습니다."

"진짜 안 어울린다."

하벨은 툭 하고 튀어나온 자신의 말에 잠깐 놀라다 곧 흡족해했다.

아까부터 갓 널은 빨래도 아니고 축 처져 있는 게 꼴 보기 싫던 참이었다.

상대가 룬델이라면 몰라도 카샬이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나 안 죽었어, 카샬. …아라야. 넌 손가락 좀 그만 물어."

딱딱.

아라가 신나 하며 이빨을 움직였다.

"제… 실수입니다."

"괜찮다고 했잖아. 됐어. 그만해."

하벨은 드디어 아라의 이빨에서 해방된 손가락을 보자 경악했다.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조그만데 왜 이렇게 치악력이 좋아?"

쑥쑥 커서 겨우 손바닥만큼 커진 것치고 아라의 이빨 힘이 좋았다.

[삐잇!]

아라가 으쓱거렸다.

"칭찬 아니야."

[…삣!]

아라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

'꿈에서 봤을 때는 그래도 의젓했는데.'

하벨은 아라를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리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카샬."

"예, 도련님."

"도로 내놔."

하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는데 왜 이러는지.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추가 임금에 이번 달 월급까지."

"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카샬은 살짝 뒷걸음질 쳤다.

그만큼 무서운 말이었다.

하벨은 카샬이 겁에 질린 만큼 히쭉 웃었다.

"아니. 네가 이번 일로 너무 힘들어 보이길래. 견디기 힘들면 힘든 만큼 날 위해 무임금으로 일하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하늘과 같은 도련님의 마음씨에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큰일을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금세 철면피를 깐 카샬의 태도에 하벨 역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그래. 아까 말을 이어서 하자면, 내가 지금 먹는 약이 여러 개잖아?"

"예. 대부분 물의 저주 때문에 먹는 약들이죠. 나머지는 열이 잡히지 않으시거나, 속이 좋지 않으시거나 등 그때마다 비상용으로 드립니다."

카샬은 다시 한 걸음 침대 쪽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살짝 민망해 보였기에 하벨은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평소라면 '그러니 가출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였겠지만.

"그 약을 제조한 건 헤레스잖아?"

"맞습니다."

"이번 일은 제조법을 알지 못하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어. 그렇지?"

"헤레스 씨는 절대 아닙니다!"

카샬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아라가 깜짝 놀랐다.

[삐이익!]

"…죄송합니다, 도련님."

카샬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헤레스가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일반인도 아니고 마법사잖아? 제조법을 어떻게 훔치겠어?"

마법사라는 말에 카샬은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지만 그 사실은 절대로 숨기려던 게 아니……."

"가주님께서 이번 일을 내게 맡기셨어."

"…가주님께서요?"

카샬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하벨을 끔찍하게도 생각하는 룬델이 다른 사건도 아니라, 하벨이 죽을 뻔한 일을 맡기다니.

자신이 본 룬델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독의 후유증 때문에 창백한 하벨의 안색과 링거를 맞으며 침대에 누운 그 모습에 카샬은 솟구치는 말을 참지 못했다.

"도련님. 제가 감히 이런 말을 올린다는 게 죄송스럽지만, 이번 일은 가주님께 맡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니. 내가 해."

하벨은 간단하게 거절했다.

이렇게 쉽게 거절할 거라 생각을 하지 못한 건지, 카샬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대로 멈췄다.

"헤레스 방 근처에 청소하든 뭘 하든 오래 머물었던 시종들을 조사해줘."

"방금 간곡하게 말씀드렸는데."

"나도 겨우 가주님을 설득했어."

"혹시 둘째 도련님께서는 아십니까?"

"형님도 알아야 해?"

"…어, 음, 어차피 알게 되시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불같은 성격이시라 제가 또 멱살이 잡힐 것만 같거든요."

"오. 이참에 잡히면 되겠네. 네가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했으니 형님이 날 대신해 잡아 준다고 생각하고 잡히면 마음의 짐을 덜지 않겠어?"

하벨이 싱긋 웃자 카샬은 자신의 입을 때렸다.

"…와. 제 입이 화근이 될 줄이야."

"아 참, 저번에 빗자루 놈 기억해?"

"기억합니다. 도련님께서 던지는 걸 못하셔서 팔의 힘을 기르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할지, 조준점을 겨냥하는 연습을 시켜드려야 할지 생각했거든요."

"목구멍이 뜨겁네. 아, 독이 넘어가서 그런가."

하벨이 목을 만지작거리자 카샬은 백기를 올렸다.

"…당분간 자제하겠습니다. 그럼, 그놈부터 데려오면 되겠습니까?"

"그래. 걔도 데려오고, 명단도 뽑아와 줘. 아, 좀도둑부터 데려와 줘. 할 말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카샬은 고개를 숙인 뒤에 문으로 향하다 잠깐 멈춰 섰다.

"아프지 않으십니까?"

"고마워, 카샬."

카샬이 숨을 다급히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서…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벨은 카샬이 떠난 문을 바라보며 그리움이 묻어난 미소를 그렸다.

'괜히 옛날 생각이 나게 하네.'

자신에게도 카샬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참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용왕님. 당신의 사랑이 다정하고 기쁘나 저희에게 마음을 주셔서 나중에, 저희가 사라진 뒤에 마음이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럴 일이 있다면 제발 부탁드리옵건대 저희를 잊어버리십시오. 저희는 용왕님의 슬픔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미안하구나. 너희가 그렇게 부탁했는데 들어주질 못했다.'

그들은 자신에게 기쁨보다 더 큰 슬픔이 되었다.

아라가 하벨의 얼굴로 달려들자 그는 그제야 생각에 벗어났다.

[삐이?]

괜찮아?

그렇게 묻는 것 같아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현재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페트리오가 자신에게 '독'을 조심하라 경고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그가 감옥에 있었기에 대화를 나눌 상황이 오지 않았다.

'좀도둑이 탈출할 시기와 독 사건이 벌어진 시기가 예쁘게 맞물린단 말이지.'

독 사건은 어제, 페트리오 탈출 계획은 오늘.

감옥에 있는 페트리오는 지금 독 사건을 모를 가능성이 컸다.

'내가 좀도둑의 약점을 쥐지 않았다면 좀도둑이 억울하게 죽을 뻔했다.'

하벨은 손가락에 보드라운 털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렸다.

페트리오는 귀족들의 숨통을 쥐기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그의 가문이 가진 정보가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내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위험해 부서트렸지만, 제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는 귀족들은 결국 또 대체재를 찾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놈을 보지 못했다면 조사가 길어질 뻔했고.'

뒷세계에서 빗자루 놈을 보았다.

헤레스가 있음에도 구태여 뒷세계에 약을 구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자신을 보고 놀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니.

하벨은 느긋하게 카샬을 기다렸다.

똑똑.

"들어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벨은 상체를 일으켰다.

[삐삐!]

아라가 누우라며 이마로 박치기를 시도했지만, 물결이 살짝 머리를 스치고 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도련님. 오늘이 탈출 일인데 왜 갑자기 부르셨습니까?"

페트리오는 어설픈 가발에 커다란 안경까지 쓴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몸이 안 좋아보이십……."

"좀도둑."

"예."

"저번에 네가 나한테 복수할 기회를 주겠냐고 물었지?"

페트리오는 그 말에 안경을 벗으며 무겁게 대답했다.

"그랬습니다."

"어떤 복수를 원해?"

"저는 페트리오 비발체입니다."

"알아. 가문 인장에 비발체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이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귀족이나, 뒷세계 인간입니다."

"그래."

페트리오는 하벨의 덤덤한 대답에 다음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만약 하벨이 자신의 말을 비웃었다면 한 가닥의 희망마저 자신이 직접 끊어내려고 했다.

"비발체 가문은 귀족들이 제 손을 더럽힐까, 꺼리는 더러운 일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보통 무슨 일을 맡는데?"

"시체 처리와 증거나 정보 조작을 맡았습니다."

"그럼 네 가문을 건드리기가 어려웠을 텐데?"

더러운 일을 하는 건 페트리오였지만, 이를 시킨 건 귀족들이었다.

손에 피가 덜 묻냐, 묻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죄를 저지른 건 똑같을 텐데.

"맞습니다. 저희도,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뒷세계에 더 단단히 뿌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페트리오는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역으로 그 죄를 물어 저희 가문을 토벌했습니다."

"누가 시켰지?"

"…그 이름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옷자락을 잡는 페트리오의 손에 붉어지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대법관, 피나토 웬을요."

"대법관이라고?"

"귀족을 벌할 수 있는 자는 귀족뿐이죠. 이를 허락한 자는 대법관이고요."

"걔는 허락만 했을 수도 있잖아?"

"그렇죠. 하지만 관련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놈 역시 더러운 일에 저희 가문의 힘을 빌렸으니까요. 대법관 자리에 오를 때 말입니다."

페트리오는 비웃음을 흘렸다.

"대단한 가문이었네?"

하벨은 새삼 신기하다는 듯 반응했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비밀이 많을수록 적이 많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멍청이일 뿐이니까요."

"아니. 단지 멍청이한테는 이렇게 안 해."

하벨의 부정에 페트리오는 어떤 기대를 담았다.

"너희가 대단했던 거야. 그래서 아직도 널 쓰고 있잖아? 티에라 가문의 내부 경계심도 올리고, 너랑 비슷한 일을 하는 가문에도 경고하고 말이야."

사건이 하나씩 보이자 하벨은 흥미로웠다.

역시 독 사건에 귀족이 얽혀 있을 줄 알았다.

자, 이제 정화제 사건이랑 독 사건이 어떻게 얽혔는지가 중요했다.

"그래서 왜 하필 정화제를 훔친 건데?"

하벨은 처음 페트리오를 봤을 때 묻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멍청이가 되어야 살 수 있었거든요."

페트리오는 자신을 비웃듯 말을 꺼냈다.

"정화제의 제조법이 없는 걸 알면서도, 가문이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좀도둑 짓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야 하벨은 페트리오가 제대로 보였다.

비록 좀도둑이나, 그는 용기와 책임감이 있는 자였다.

"대법관은 얼마나 높은 관직인데?"

"……."

페트리오가 갑자기 얼빠진 표정을 하자 하벨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눈밭에 뒹군 부작용이야."

"…아."

그제야 페트리오는 시선을 살짝 흘리며 안타까움을 속으로 숨겼다.

"높은 관직입니다. 이 나라 사법 기관의 대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 진짜 대단했네."

하벨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대법관이 나서야 할 만큼 페트리오의 존재가 위협적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 비참해집니다. 저는 결국, 여기에 있잖습니까?"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다시라는 말에 페트리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떳떳한 행동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시궁창에 사는 쥐처럼 더럽고 추잡하게 살았습니다."

"나도 다시 시작하고 있어."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였던 자신도.

"……?"

"눈사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다르거든."

'그럼 그때 새로운 병이랑 같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페트리오는 이전에 하벨이 피를 쏟았던 상황을 떠올리며 창백한 그의 낯짝을 살폈다.

"좀도둑아."

하벨이 페트리오를 부르자, 팔을 따라 흔들리던 랜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분명 점보다 작은 검은 불꽃이었지만, 환한 불꽃으로 바뀌었다.

점보다 작은 빛으로.

하벨의 눈이 휘었다.

"내가 너한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면 해볼래?"

"정말… 이십니까?"

"그럼. 난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해. …아, 그 전에 물을게."

"뭐, 뭐든 말씀하셔도 됩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이 꺼낸 저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 판단했다.

짧지만, 그는 정말로 하고자 한 일을 이뤄내지 않았는가.

"죽을 준비는 됐어?"

"…예?"

페트리오는 장난스레 다가온 하벨의 목소리에 입을 살짝 벌렸다.

* * *

똑똑.

"들어 와."

하벨은 두 번째 손님을 맞이하며 카샬에게 붙잡혀 달달 떨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과 시선도 마주하지 못할 만큼 한눈에 봐도 겁에 질려 있었다.

저게 진짜 모습이라면.

탁.

카샬이 문을 닫자 남자는 움찔 놀라며 다급히 숨을 삼켰다.

"여기 명단이 있습니다."

"빨리 가져 왔네?"

"예. 제가 좀 빠릅니다. 부디 오래오래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샬은 영업원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명단을 넘겼다.

뻔뻔함을 모르는 걸까.

하벨은 명단을 받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그, 저, 저,……."

"구면인데 편하게 말을 하게. 이미 뒷세계에서도 보지 않았는가."

하벨이 자연스럽게 사실을 털어놓자 남자는 대뜸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비볐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도련님!"

"혹시 범인입니까?"

카샬이 검을 뽑아 남자의 목에 겨누자 그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힉…!"

"일단 심부름꾼일 거야. 그렇지?"

"마, 맞습니다! 맞습니다! 저한테 그냥 주, 주문한 약을 가져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게 뭔지 정말 몰랐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간단하게 묻겠네."

하벨은 명단을 남자에게 넘겼다.

룬델이 입단속을 시켜도 소문은 새어 나가기 마련이었다.

지금쯤 범인이 신나게 탈출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 명단에 적힌 이들 중 자네에게 이번 일을 권한 자를 가리키게."

"이, 이자입니다."

남자는 손을 덜덜 떨며 이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잡아 오죠."

이름을 확인한 카샬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주님께 넘겨."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놈과 같이 계셔도 괜찮으시겠……."

쾅!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우산을 꺼내 바닥을 찍었다.

카샬이 숨을 짧게 내쉬었고, 남자는 제 몸에서 일어난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대가리를 깰 힘은 있어."

"바닥은… 나중에 수리하도록 하죠."

카샬은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나하고 나눠야 할 말이 있으니까 아직은 기절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하벨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공포에 질린 남자를 보며 가볍게 말을 던졌다.

"쫓겨나는 건 당연하지만, 죽이지는 않으마."

그제야 남자는 언제 떨었냐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영악한 놈.'

하벨은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꾹 누르며 물었다.

"나랑 눈이 맞았던 뒷세계 말고 또 들린 곳이 있나?"

"있습니다."

"혹시 다른 뒷세계인가?"

"마, 맞습니다."

"그럼 들렸던 곳이 어디인지 적게. 펜은 근처에 있는 거 아무거나 써도 되고."

"알… 겠습니다."

남자가 펜을 놀릴 동안 하벨은 생각했다.

저놈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에게 썼던 독은 지금 카샬이 잡으러 간 놈에게 있을 테고.

하벨은 링거가 달리지 않은 손으로 우산을 꼭 쥐었다.

"다, 다 됐습니다, 도련님."

남자가 종이를 넘기자 하벨은 물었다.

"이게 다인가?"

"예. 전부입니다."

"고생했네."

하벨은 종이를 받고는 아라를 바라보았다.

"잠깐 눈 감고 있어, 아라야."

"…예?"

자리에서 일어난 하벨은 우산을 들어 남자의 턱을 쳤다.

빠악!

이빨 몇 개가 날아가며 피가 흘러내렸다.

남자는 입을 뻐금거리며 하벨을 쳐다보았다.

"돈을 받고 뒷세계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걸 자네는 알았을 걸세."

하벨은 침대에 걸터앉았고 우산 끝으로 남자의 발을 내리찍었다.

"끄아아악!"

"설령 몰랐다고 한들 오늘 일어난 사건은 분명 들었을 테지. 자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눈치채지 않았는가? 내 앞에서 영악하게 연기할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어야지."

장난기가 가득했던 하벨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차갑게 변해갔다.

"나는 기본적인 도리도 없는 놈을 제일 싫어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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