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1화 (31/415)

31화. 무릎 꿇어

* * *

마법사 협회가 지배했던 뒷세계를 제외하면 4개의 뒷세계가 남아 있었다.

'서로 물어뜯으면 참 재미있겠다.'

하벨은 벌써 볼만한 구경거리라 생각했다.

"먼저 말하는 자만 살려주지."

카샬은 이마를 잡고 주저앉아 있던 시종과 자신의 발밑에 있는 정령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보았고 누구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냈다.

"무르토 마을입니다!"

"무, 무르토 마을이에요!"

아무래도 이런 일에 익숙한 정령 기사가 훨씬 더 빨랐다.

카샬은 주저 없이 시종의 가슴팍을 꿰뚫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피를 털어냈다.

빠악!

정령 기사가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때쯤, 카샬은 그를 기절시켰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일단 데리고 가는 편이 좋을 테지.

"가주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몸도 좋지 않으니 안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하벨은 카샬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페트리오가 하벨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래."

떨어진 우산을 주우려 몸을 숙인 하벨은 순간 밀려오는 현기증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지럽네.'

[삐이이!]

깜짝 놀란 아라가 하벨의 몸을 밀려 애를 썼다.

페트리오는 다급히 하벨을 부축했다.

무얼 보는지 갑자기 그가 웃자 페트리오는 난감했다.

"괜찮으… 십니까?"

"괜찮아. 독을 먹어서 그래."

"……?"

너무도 태연한 말에 페트리오가 그 말을 받아들이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그는 뒤늦게 입을 벌렸다.

"도, 독을 드셨다고요? 제가 독을 조심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제대로 활용을 못 했지만, 어쨌든 알려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저도 자세히 알려드리지 못한 게 큽니다."

페트리오는 우산을 주워 하벨에게 넘겼다.

"그 정보는 어디에서 들었어?"

갑작스러운 하벨의 질문에 페트리오는 잠깐 침묵했다.

하벨은 그 침묵이 수상해 페트리오가 꺼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했다.

"저와 함께 여기로 심어진 놈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정황상으로 봤을 때 놈들이 정말로 그런 일을 벌일 거라 생각했거든요."

'왜 이 정보를 숨기는 거지?'

하벨은 의문을 누르며 마차에 올랐다.

"무르토 마을에 있는 뒷세계는 어때? 뤤트로가 있는 곳이랑 비슷해?"

"티에라 마을에 있던 뒷세계가 뒷세계치고 괜찮은 편이라 기준으로 잡지 마십시오."

"확실히 위치가 지하에 있다는 점과 독이 깔려있었다는 점만 뺀다면야 나쁘진 않았어."

"아무래도 근처에 티에라 가문이 있다 보니 눈치를 보느라 지하에 생겼겠죠. 보통은 지상과 지하 둘 다에 존재합니다. 무르토 마을 같은 경우는 지반이 약한 편이라 지상에만 존재하고요. 아마 무르토 마을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페트리오까지 마차에 올라탔다.

"뒷세계도 생각보다 다양하네?"

"예. 보통은 자연스럽게 섞여 있습니다. 귀족과 상생하거나 배척하기도 하죠. 저처럼 귀족이 직접 운영하는 곳도 있고, 귀족을 짓누르는 곳도 있습니다."

하벨은 동화책을 듣는 아이처럼 페트리오가 꺼내는 말을 신기하고 재미있게 즐기고 있었다.

"재미… 있으십니까?"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뒷세계 이야기에 이렇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

"모르는 게 있다는 것과 모르는 걸 알아가는 자체가 즐거워."

하벨은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사실에 감사하며 말했다.

"도련님."

페트리오가 하벨을 불렀다.

"저번에 제가 죽어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이제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너는 이미 너무 알려졌어. 네 목숨을 노리는 자들은 어쩌면 나보다 많을 거야."

"그렇… 습니다."

"넌 오늘 죽을 거야."

이상할 정도로 여유로운 하벨의 분위기에 페트리오 자신까지 옮았는지 하벨이 꺼낸 말이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늘에서 살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적어도 널 노리는 놈이 사라질 때까지."

"…그럼, 제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페트리오는 곧 밀려오는 불안함에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네가 선택해. 비발체라는 이름을 안고 너와 함께 그늘에서 살아갈지, 아니면 비발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사람들 속에 살아갈지."

"제가… 선택할 수 있습니까?"

"좀도둑."

"예, 도련님."

"난 자비로워. 적어도 기본 도리는 알고 있으면 말이야."

분명 하벨이 웃고 있었지만, 페트리오는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권력자 앞에 섰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이 위압은 대체 무엇인지.

"그것만 기억하면 돼. 간단하지?"

"반드시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오늘 무르토 마을에 있는 뒷세계를 차지하면 너에게 줄게."

자신은 무언가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넘겨줄 셈이었다.

"……."

페트리오는 잠깐 숨을 멈췄다.

오만함에 차서 꺼낸 말도 아니었으며 허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당연함이 섞인 말에 페트리오는 숨을 내쉬며 비로소 하벨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가벼움으로 위장한 그 모습 속에 숨은 고귀함이 보였다.

어느 귀족에게도, 하물며 왕에게까지 보지 못했던, 그 찬란함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고귀하다는 게 무엇인지 오늘에서야 이해했다.

난생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에 페트리오는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왜? 뭐 묻었어?"

하벨이 얼빠진 표정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자 페트리오는 그제야 눈을 깜박였다.

방금까지 있었던 고귀함이 사라진 채 귀티가 흐르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사람의 눈을 홀릴 만하나, 조금 전 감각 때문인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정체가 뭐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페트리오는 뒤이어 몰려오는 후유증에 입 안이 바짝 말라 갔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페트리오는 아주 잠깐, 자신이 잡은 동아줄이 악마가 내린 동아줄이 아닐까 생각했다.

* * *

푸르릉!

카샬이 친 손찌검에 말은 놀라 달아났다.

"도련님. 더는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떨어지십니다."

그의 시선은 절벽 앞에서 쪼그려 앉은 하벨을 향했다.

"안 떨어져. 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삐잇!]

아라가 갑자기 신나 하며 달려들자 하벨의 몸이 휘청거렸다.

절벽 밑에서 한순간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를 때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몸이 앞으로 쏠리자 카샬은 하벨을 붙잡아 불만을 털어냈다.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이래서 가까이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 깜짝이야. 진짜 놀랐네."

하벨은 주저앉아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아찔한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에 힘이 풀렸지만, 하벨은 달빛에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아찔한 만큼 아름답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멀찍이 서 있던 페트리오의 다급한 걸음과 함께 걱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괜찮아. 아직도 가슴이 쿵쿵거려."

하벨은 금세 카샬에게로 도망친 아라를 보며 언성을 높였다.

"아라야, 이리 와.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삐이.]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며 눈을 아래로 떴다.

"내가 죽으면 너도 가장 맛있는 걸 잃어버리는 거야. 괜찮아?"

[삐잇! 삐! 삐!]

아라가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힘없이 날아오던 아라가 하벨의 이마에 제 몸을 콩 찧었다.

[…삐삐.]

"그래. 이러면 안 돼."

"도련님께서도 이러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는……."

카샬은 더 잔소리하려다 페트리오를 의식하며 말을 삼켰다.

하벨이 페트리오의 목줄을 잡았다고 말했지만, 카샬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귀족들이 경계한 것도 모자라 작정하고 짓누를 정도라면 위험한 인물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래. 조심할게."

"예. 어린아이시잖습니까."

하벨이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보든 말든 카샬은 그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들려오는 말이 없자 카샬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음, 인정할게."

긴 세월을 산 자신이 방금 카샬의 말에 기분이 나빴다.

이곳에 새로운 몸으로 산 지 9일 정도 됐지만, 유아는 너무하고, 성인이 되지 않은 나이라고 하니 딱 그 정도로 합의를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난 어린아이야."

하벨은 큰마음 먹고 인정했다.

모름지기 융통성을 가져야지.

"……."

카샬은 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온도계를 꺼냈다.

삑. 삑. 삐비빅.

"역시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네요. 해열제 하나 드시죠."

카샬은 그제야 안도하며 약을 꺼내 넘겼다.

"인정했는데 왜 그래?"

"예, 예. 그러니 어서 드세요. 이마가 뜨겁잖습니까?"

하벨은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약을 얌전히 받았다.

둘의 모습을 페트리오가 어색하게 바라보다 깊은 혼란에 빠졌다.

꼭 멍청한 형제를 연기하는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연기인가? 진심으로 이러는 건가?'

자신의 시선을 느낀 건지 하벨과 눈이 마주쳤다.

"넌 이제 잠깐 죽은 거야, 좀도둑."

조금 전 어설픈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하벨의 묵직한 말에 페트리오도 덩달아 진지하게 대답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는 마차와 함께 이미 자신을 버렸다.

"예. 비발체 가문도 잠깐 사라진 겁니다."

하벨이 나무에 묶인 정령 기사를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쟤도 널 도울 거니까."

폭발할 듯한 정령 기사의 의문에 하벨은 모르는 척 앞으로 움직였다.

자신이 왜 저 의문을 가르쳐줘야 하겠는가.

"출발."

[삐이!]

하벨과 함께 아라도 힘차게 소리쳤다.

* * *

하벨은 자신을 노려보는 정령들을 향해 활짝 웃었다.

아직 마을 밖이라 주변을 의식할 이유가 없어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부정한 것들을 치워줄게. 그 대가로 축복을 내려줬으면 해."

무르토 마을에 들어서려던 순간, 아라가 기겁하다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때 하벨은 눈치챘다.

마법사 협회가 개입되었다기에 설마 했는데 진짜로 부정한 것들이 마을에 그려져 있다니.

왜 부정한 것들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라르웬이 알려준 가르침을 써먹을 순간이었다.

[부탁해도 우리가 해.]

정령이 차갑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나한테는 부탁하지 않을 거잖아."

정령들의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에도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맴돌고 있던 정령들과 눈이 마주했지만, 저들은 자신을 무시했다.

정령사가 귀한 세상에 정령들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덜어주겠는데 왜 그렇게 싫다는 건지.

하지만 하벨은 저들이 마을을 보며 애타듯 그리워하던 말을 들었기에 자신 있었다.

[저 인간과 말할 거야. 너는 싫어.]

정령들 속에 행복하게 있던 아라가 눈을 크게 뜨며 털을 바짝 세웠다.

[삐이…….]

"이 인간은 정령을 배신했어."

하벨은 정령이 가리킨 정령 기사를 고발했다.

정령 기사의 눈이 요동쳤다.

"저는……."

"입 닥쳐."

카샬은 정령의 기사를 위협했고,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사실을 알렸다.

"'거지 같은 정령'이라고 말하더라고. 실수였다 쳐도 정말 대화하고 싶어?"

[…진짜라고? 정말 우리를 그렇게 말했다고?]

[삐이잇!]

아라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은 가면을 벗어 정령들에게 자신을 내보였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 하벨 티에라야."

[웃기지 마. 걔는 우리를 못 봐.]

"지금 보고 있잖아."

하벨이 웃자 정령들은 서로를 보는지 한곳에 뭉쳤다.

[쟤 본 적 있는 정령 있어? 아니, 하벨 티에라를 본 적이 있으면 말해줘.]

[얘가 진짜라고 말을 하는데?]

정령들은 잠깐 아라를 쳐다보았다.

아라는 저들의 시선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삐잇!]

힘찬 소리에 정령 중 하나가 아라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하게 믿음직스러워.]

[하긴. 나도 그런데.]

[…어, 어! 나 봤어. 세렌한테 놀러 갔다가 잠깐 봤는데 쟤, 하벨 티에라가 맞아.]

정령 중 하나가 앞발을 들어 흔들었다.

[진짜라고?]

[그래. 진짜야.]

[티에라 가문 사람이라면… 으음, 거절하기 힘든데.]

'속닥거리려면 멀리 가서 속닥이지.'

대놓고 작전 회의를 듣는 기분이라 하벨은 간지러운 입을 꾹 참았다.

[쟤가 우리를 모욕한 건 확실해?]

정령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하벨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가문을 걸고 맹세할게."

[있지. 나 오늘 쟤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거든.]

정령 중 하나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방금까지 하벨을 꺼리던 정령들은 곧 해맑게 웃으며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자신들끼리 나누는 말에 재미없는 이야기가 있을 수 없으니 절로 기대감이 높아졌다.

[무슨 이야기?]

[쟤가 부정한 것들을 없애고 그걸 그렸던 마법사까지 죽여줬대.]

[뭐라고? 정말?]

정령들은 믿을 수 없었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은 자신들한테도 꽤 유명한 아이였다.

자신들을 볼 수 없었고, 존재만으로 불쾌함을 주는 아이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하벨 티에라가?

하지만 정말로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상황은 달랐다.

최소한 대화할 기회를 줘야 했다.

[응. 정말로. 그래서 되게 신기한 이야기라서 말해주려고 했지.]

정령이 헤실헤실 웃었다.

[…으음.]

고민하던 정령이 하벨에게 말을 꺼냈다.

[좋아. 우리와 짧게나마 말을 나눌 기회를 줄게.]

마치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한 오만한 말이었지만, 하벨은 가만히 있었다.

황금을 걷어찰 마음은 없었다.

[우린 지금 화가 났어.]

[맞아! 엄청 화가 났지!]

[…슬프기도 하고.]

"왜?"

[인간들이 저 부정한 것들을 이용해 우리의 장소를 빼앗았거든.]

[이곳뿐만이 아니고. 다른 곳도 뺏겼어!]

순간, 하벨의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사실이 있었다.

독 사건과 얽힌 귀족들의 영토.

"나한테 뭘 원해? 들어줄게."

하벨은 그들이 바람을 꺼내도록 살살 긁어냈다.

[우리의 보금자리를 되찾아줘.]

정령은 말에 분노를 실었다.

[그럼 우리가 축복을 내려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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