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7화 (17/415)

17화. 필요 없다니까(2)

* * *

복도가 일렁거렸다.

분명 다른 복도와 이어진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이 막힌 벽이 되어 나타났고, 피를 쏟으며 사람이 쓰러졌다.

[삐이잇!]

아라가 기겁했다.

"저건… 뭡니까?"

하벨의 눈이 커졌다.

"마법입니다. 결계처럼 설치된 마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약했네요."

카샬은 정화 장치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협력자는 죽었으니 이제 마법사를 찾으러 갈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애초에 마법사 둘 정도라면 이곳 뒷세계를 잡아먹을 만큼 충분했고."

라르웬은 마법사가 죽고 나서 몰려오는 마법 폭주를 대비해 자신의 바람으로 방패를 막듯 앞을 꽉 채웠다.

바람이 몰려왔지만,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살짝 흔든 게 고작이었다.

"봤지? 이 형님이 어디에서 맞고 다니지 않는다니까."

하벨이 반쯤 풀린 눈으로 숨을 깊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이제 뤤트로를 만나면 끝나네요."

아. 하나 더 있었다.

여관에 있다는 검은 달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벨의 입꼬리가 통증 때문에 바들바들 떨렸다.

그 낯짝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으로 봤지만, 직접 보길 내내 기다렸다.

자신의 잠을 깨운 죄.

감히 자신을 노린 죄.

그리고 자유를 향한 첫 발걸음이 아닌가.

"조금 더 쉬시죠."

카샬의 말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힘을 사용하면 통증이 몰려오는 걸 알지만, 죽으면 자신이나 하벨 티에라 둘 다 끝이었다.

'보고 있나, 하벨? 내가 이 몸을 아낀다고 최소한으로 최대의 힘을 끌어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나 네 몸이 너무 이상하구나.'

"막내가 힘을 냈으니 이 형님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 불 마법사는 솔직히 깜짝 놀랐는데 뤤트로인가 뭔가 하는 놈은 글쎄.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드는데?"

라르웬은 자신만만하며 웃었다.

[라르웬.]

계속 얼어붙었던 루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왜?"

[진짜로 쟤가 물의 힘을 받아들인 거야? 내가 제대로 본 거 맞아?]

"그래. 제대로 봤어. 이제 정말 미친 듯이 하벨에게 미안하겠네?"

루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

라르웬이 기쁜 건 바로 그 점이었다.

하벨이 물의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령사라니.

"내가 물을 다루면 안 되는 겁니까?"

하벨은 카샬이 건넨 물로 입을 헹구다 물었다.

곧 보글보글 끓는 정화 장치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눈을 잠깐 감았다.

하벨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자 라르웬은 미안한 표정으로 카샬과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아니. 안 되는 게 아니라 완전 좋지. 그냥 좋은 게 아니라 미친 듯이 좋아!"

"이유가 뭡니까?"

"아마… 음,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렌이고 루룸이고 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는 거 봤지?"

"봤습니다."

"아버지께서 바로 물의 힘을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정령사라서 그래."

하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기서는 좀 그렇고, 어쨌든 굉장히 좋다는 것만 기억해."

라르웬은 일단 말을 줄였다.

시체와 피가 넘쳐나는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 * *

카샬이 하벨의 걸음을 맞추며 앞서 걸었다.

마법사가 사라지자 전투 의욕을 잃었는지 다들 항복을 외치며 납작 엎드리기 바빴다.

알아서 길을 안내하는 이들까지 생긴 와중에 이제 검을 쓸 일이 얼마나 될지 몰라도 카샬은 계속 경계했다.

"신기하네."

장난기가 섞인 하벨의 말에 카샬은 의문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뭐가 신기하십니까?"

"누가 내 앞에 서서 날 지켜주는 게 신기해서."

하벨은 실실 웃었다.

정말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눈빛에 카샬 역시 눈꼬리가 길어졌다.

"당연한 겁니다. 앞으로도 당연할 테니 익숙해지십시오."

"내가 강해져도?"

"물론입니다. 도련님께서 강하든 강하지 않든 상관없이 저는 집사로서 책임을 다할 겁니다."

'하벨 티에라. 그대는 참 복이 많아.'

저 말은 자신에게 향한 말이 아니었고, 그렇게 들어서도 안 될 말이니 하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삐이이.]

하벨의 얼굴에 털을 비비던 아라가 신나게 소리를 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자신이 조금 전 물의 저주 때문에 부작용을 겪을 때부터 저렇게 착 달라붙어 있어서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라야. 내가 줄 물이 사라질까 걱정되는 거야? 내가 걱정되는 거야?"

[삐잇.]

아라는 고민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곧 질끈 감아버렸다.

"그래. 모르면 차라리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낫지."

하벨은 현명한 아라의 결정에 흐뭇하게 웃었다.

"여기야?"

안내자 역할을 자청하던 이가 멈추자 라르웬이 물었다.

"마, 맞습니다. 이 앞에 있습니다. 저 방에는 제가 알기로는 탈출로는 없습니다."

"그럼, 열어."

라르웬은 고갯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끼이익.

살짝 녹슨 듯한 문이 열리자마자 수십 명의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하벨 일행을 바라보았다.

파지지직!

라르웬은 여유롭게 손에서 대검의 형상을 한 번개를 꺼내왔다.

"한 번에 베어주지. 뤤트로가……."

"무조건 항복입니다! 살려주십시오!"

모두가 납작 엎드려 한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 * *

"…아, 그러니까, 도, 도련님?"

뤤트로는 계속 방긋방긋 웃으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뤤트로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려왔다.

"그래. 말하게나."

여전히 하벨의 말투는 가벼웠으나, 상대를 하대하자 자신이 쓰던 말과 비슷한 어투가 튀어나왔다.

하벨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제가 평소에 티에라 가문을 존경했습니다. 절대로 티에라 가문이 있는 방향으로 방귀조차 뀐 적도 없지요."

깍지를 낀 하벨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잡설이 너무 길구나."

"혀, 협박당했습니다. 정말로 마법사 그 새끼들… 아니, 그놈한테 협박당했습니다!"

"협박?"

"제가 맨입으로 말씀드리면 당연히 못 믿으실 거라 생각하고 자료를 다 준비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뤤트로는 당장 일어나 벽에 귀를 대고 여기저기를 치더니 '쾅쾅'이 아니라 '쿵쿵'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벽이 열리더니 그 속에 종이가 가득했다.

"보십시오. 마법사들 눈을 피해 야금야금 모았습니다. 놈들이 쓰다 버린 종이까지도요."

뤤트로는 눈 밑에 힘을 주며 간신과도 같은 웃음을 흘렸지만, 하벨도, 그 뒤에 서 있는 두 명의 표정도 너무나 싸늘했다.

자료를 하벨에게 넘긴 뤤트로의 이마에 어느덧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마법사들이 제 주인이었던 '아카른'을 죽이고 부대장이었던 저를 뒷세계의 주인이 되게끔 올렸습니다. 그리고 저를 조종했지요. 즉, 저한테 원수인 셈입니다."

이제는 죽었지만, 자신의 잠을 방해했던 암살자가 있었던 그곳도 마법사가 뤤트로의 이름을 빌려 건든 걸까.

'굳이 왜?'

하벨은 일단 뤤트로를 바라보았다.

"제 전 주인은 물론 저 역시 맹세코 티에라 가문과 척을 질 생각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네가 한 행동이 사라지는 건 아닐세."

"아, 압니다. 설령 조종당했다 한들 여러분께 검을 들이민 행동과 마법사에게 동조한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압니다. 하여 이곳 티에라 마을에 형성된 뒷세계는 티에라 가문에 영원히 복종하겠다 맹세하겠습니다! 아니, 이곳 주인은 이제 도련님들이십니다!"

"맨입으로?"

라르웬이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다 계약서를 받아올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난 그런 자리 필요 없어. 그거 말고."

하벨이 거절하자 뤤트로는 눈을 깜박거렸다.

"예……?"

"여기 뒷세계에 있던 암살자들이 날 공격했어."

하벨은 검은 달이 진짜 뒷세계 암살자인지 아닌지, 마지막 확인을 위해 말을 던졌다.

천천히 뤤트로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에 드러나 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 그럴 리가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뤤트로는 이제 땀이 비가 오듯 줄줄 흘러내리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곳 뒷세계는 아주 작죠. 작습니다. 무, 물론, 암살자라고 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솔직히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누군가를 찾는 건 기가 막히게 잘하거든요."

'좀도둑이 일단 거짓말을 한 건 아니네.'

하벨은 페트리오를 감옥에서 꺼내주며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쫓는 곳'을 물었다.

―여기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냄새를 기가 막히게 쫓거든요.

"흐음."

하벨 일부러 침음 소리를 흘리자 뤤트로는 발작을 일으킬 만큼 벌벌 떨었다.

저 모습이 마냥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 설령 그런 의뢰가 들어온다고 한들, 간이 손톱보다 더 작아서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놈들입니다! 아니, 아니. 여기에 발을 들인 놈치고 티에라 가문의 위용을 두려워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뤤트로가 기어코 눈물을 흘리자 그의 눈과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은 점점 깊어졌고, 그는 자신을 누르는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아예 땅에 무릎을 꿇었다.

"그 마법사들이 미친 겁니다. 제정신이 아니죠. 그렇습니다. 결국, 저렇게 죽었잖습니까. 심지어 저는 그 상황을 생생하게 드, 들었습니다. 지금 감히, 감히 도련님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점점 빨라지던 뤤트로의 말이 어느 순간 멈추고 '꺼이꺼이' 울며 살려달라 빌기 시작했다.

고작 3명이서 1시간도 걸리지 않은 시간에 마법사들도 죽이고, 제 부하들도 절반 이상 죽이지 않았는가.

가뜩이나 두려웠던 티에라 가문은 이제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넘어선 곳이 되어버렸다.

"마법사를 고용한 놈이 누구인가?"

하벨은 뤤트로가 울든 말든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중요한 건 마법사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짜증 나게.

"귀, 귀족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후.

그 순간, 누군가 바람을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의 시선이 움직이다 설마 하며 시선을 내렸다.

뒷세계에서 있는 동안 꺼지지 않았던 랜턴에 불꽃이 사라졌다.

마치 사건 하나가 끝났다는 걸 알리듯.

하벨의 표정이 굳어졌다.

"귀족이라고?"

라르웬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걔들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을 텐데?"

이는 오만함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당장 티에라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면 정화제는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하지만 맹세코! 감히 도련님들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분명히 귀, 귀족이었습니다."

뤤트로는 벌벌 떨며 조심스레 허락을 구했다.

"그 증거가 제 안쪽 주머니에 있습니다. 꺼내도 되겠습니까?"

"꺼내 봐."

라르웬은 뤤트로의 손을 주목했다.

하지만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뤤트로가 꺼낸 건 타버린 옷자락 일부였다.

"불 마법사가 이곳에 올 때 입었던 옷입니다. 다 타기 전에 일부를 겨우 건졌죠."

그가 옷자락을 뒤집자 특정 문양이 드러났다.

라르웬은 물론 카샬도 눈빛이 바뀌었다.

'마법사 사건은 진짜 귀족과 얽혔나 보네.'

하벨은 이미 결론이 났다고 생각했다.

"도련님들. 저는… 감히 귀족을 건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이렇게 간직하고……."

"다 챙겨, 카샬."

그렇기에 하벨은 뤤트로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카샬에게 명령했다.

이제 알아낼 건 다 알아냈다.

지금은 당장 다른 걸 확인할 차례였다.

"형님."

"그래. 네가 괘씸해서 다 죽여달라고 말하면 그렇게 할게. 솔직히 내 마음은 그래. 한 번 뒤통수친 놈이 두 번은 못 할까?"

"아뇨.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 뒷세계가 무너지면 이곳에 있던 이들이 위로 향할 테고, 그 원망이 어떤 식으로 번질지 모릅니다."

하벨은 자신의 감정과 별개로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뤤트로가 뒷세계의 주인이라 한들 모두가 이번 사건에 관여한 건 아닐 테지.

그들은 무슨 죄인가.

"설령 죽어도 뤤트로와 관련자들만 죽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악명이 뒷세계에 퍼질 테니 피를 더 흘릴 필요도 없고요."

실실 웃는 하벨의 미소와 달리 그의 말은 한없이 진지했다.

라르웬은 속으로 감탄을 삼키며 하벨을 따라 웃었다.

진중한 분위기보다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가 더 무서울 때가 있었으니.

"그래, 막내야. 뭐 마려운 개처럼 앉아 있는 걸 보면 지금 내가 보기에 네가 딱 뭘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거든. 그게 뭔데?"

"뭐 마려운 건 내가 아니라 형님처럼 보이지만, 지금 뤤트로를 데리고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 마려운 건……."

"그만 좀 하시죠. 두 분 다 뭐 마려운 것처럼 보이니까요."

카샬은 깔끔한 결론을 낸 것처럼 뿌듯함이 얼굴에 살짝 드러났다.

"봤지, 막내야? 네 집사가 저래."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형님. 좀… 그렇네요."

라르웬과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입을 벌렸다.

"와. 진짜 뭐 마려운……."

"뤤트로."

하벨은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예!"

"따라오게. 뭐 마려운 너도, 카샬."

하벨은 밖으로 나가려다 라르웬을 슬쩍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이기니까."

"맞습니다, 도련님. 둘째 도련님께서는 어딜 던져놓아도 잘 사실 분이십니다."

카샬의 대답에 하벨은 미련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제 검은 달의 진짜 모습을 털어볼 시간이었다.

단지 뒷세계 암살자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지.

'이번에야말로 대화를 좀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교양있고, 우아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