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필요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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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사냥에 중요한 건 '호흡'이야."
라르웬은 산책을 하듯 적을 베어나가며 입을 열었다.
티에라 가문 근처에서 만들어진 뒷세계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숫자만 많을 뿐 마나조차 깨우치지 못한, 몸이 조금 좋은 일반인이 대다수였다.
더불어 다른 곳보다 규모가 작은 편이라 관심도 두지 않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계속 말씀하시죠."
하벨의 재촉에 라르웬은 번개 창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대다수 마법사가 마법을 쓸 때는 무조건 숨을 참아. 마나의 파동을 유지할 집중력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자세히는 몰라."
"숨이 마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방해를 한다더군요."
카샬이 적의 목을 베어내며 슬쩍 한 줄 추가했다.
"어쨌든, 놈들은 마법 유지나 사용을 위해 현란한 손동작, 화려하지만 자잘한 마법 등등 네 눈을 홀릴 거야. 그렇기에 다 필요 없고 '호흡'만 기억해."
라르웬은 창을 비수로 만들어 적의 가슴을 꿰어냈다.
파지직.
번개에 삼켜진 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좋은 정보네요."
하벨은 제 주머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라를 다독였다.
"가만히 있어, 아라야. 너는 지금 좋은 걸 봐도 모자라니까."
[참 특이해. 갓 태어났어도 우리는 처음부터 알 건 알아. 사람은 언제가 됐든 죽는다는 것도.]
루룸이 슬쩍 말을 걸었다.
"조금 더 있다가 봐도 괜찮을 것 같아서. 아라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하나씩 생기는 걸 보면 아라는 불안정하게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고집이 있지만, 조금 약한 편이고.
덕분에 조기교육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하벨은 자신을 빤히 보는 루룸을 만졌다.
찌르르.
교감을 할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있겠는가.
짜악!
루룸이 하벨의 손을 내쳤다.
[만지지 마.]
"왜?"
하벨은 어떤 감정도 싣지 않고 물었다.
세렌도 그렇고 루룸이라고 불리는 저 정령도 다른 정령들과 달리 자신을 막 싫어하지 않았으니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기분 나쁘니까.]
"그럼, 네가 원할 때까지 만지지 않을게. 약속해."
[약속한다면야… 좋아. 날 웃겼으니까, 봐줄게.]
루룸은 자비를 베풀었다는 듯 낄낄 웃다 라르웬에게 찰싹 붙었다.
'아, 하나 더 가르쳐주는 걸 잊었네.'
라르웬은 살아 있는 놈을 카샬에게 대충 던져주고는 하벨에게 걸어갔다.
더는 집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피로 물든 장소에서도 하벨은 태연했다.
진짜 괜찮은 건지, 넋이 나가버렸는지 알기에는 참 모호한 표정이었다.
"막내야."
"예, 형님."
"버틴다고……."
라르웬은 말을 멈추고 장갑에 두른 번개를 쏘아냈다.
파지지직!
번개에 잡힌 건 불꽃을 두른 구였다.
라르웬이 그 구를 쪼개기도 전에 카샬의 검이 움직였다.
서걱.
구가 반으로 쪼개지자 마법을 유지할 매체가 사라져 타오르던 불꽃은 사라졌다.
"나머지는 내가 맡는다. 카샬 너는 마법사의 목을 베어버려."
"원래 그러려고 했습니다, 둘째 도련님."
카샬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전개된 마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건 특정 매개체였다.
그걸 베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단 한순간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방금 그게 마법입니까, 형님?"
하벨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떤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
'화르륵' 울리는 소리에 눈치를 챘고, 주변이 환해지는 불빛에 인식할 뿐이었다.
참 재미있는 힘이 아닌가.
"맞아. 보시다시피 불 마법사야."
라르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불이 좀 세지 않은가.
"방금 마법이 내 눈을 홀릴 어쩌고저쩌고한 게 이겁니까? 눈을 홀리는 것치고 살벌한데요?"
라르웬은 하벨의 물음에 지팡이를 잡고 복도 끝에 서 있는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아니. 지금은 예외 상황이야. 아무리 봐도 사냥감은 저놈이 아니라 우리가 된 것 같으니까."
"소란을 이리도 피우기에 어찌 오지 않을 수 있는가. 반갑네."
마법사가 지껄이는 개소리는 흘린 채 라르웬은 생각했다.
'마법사가 이렇게 나타났다는 건 준비가 완벽하다는 거겠지. 그나저나 물은… 좀 어려운데.'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 힘은 번개였다.
루룸 역시 번개의 특성을 더 강하게 타고난 정령이었고.
'그러면 뭐 어때? 머리와 목이 분리되어도 살아 움직일 수 있는 놈은 없지.'
"곤란해 보이십니다."
하벨은 우산을 손에 쥐고서는 순진하게 웃었다.
"아닌데? 완전 괜찮은데?"
쭈욱!
루룸이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당겼다.
[괜찮다고? 저놈 눈을 봐봐, 라르웬. 또라이 짓을 하기 30초 전처럼 보인다고!]
"취소. 곤란한 상황이야. 저놈이 여길 다 태울 목적으로 온 것 같아서."
라르웬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복도는 좁았고, 불이 번지기에 딱 좋았다.
단숨에 끝을 내야 했다.
"하긴, 여기에 원수 같은 놈이 왔는데 동반 자살을 하든 뭘 하든 죽이고 싶은 심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벨은 아라를 살살 건드리며 말했다.
[삐이?]
아라는 주머니 틈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어.'
마법사라는 존재가 저렇게 미친놈인 줄 알았으면 적어도 계획을 짜고 왔을 텐데.
용왕이었을 때도 많은 이들을 봤기에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이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정답일세."
마법사가 웃었다.
아니, 어쩌면 여기까지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저 마법사의 계략일지도 몰랐다.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었네.'
하벨은 순환의 길에 차오르는 정령수를 느끼며 계속 마법사를 관찰했다.
저 존재를 머릿속에 박아넣어야 다음에는 마법사를 대비할 수 있겠지.
"여기에 널린 장작도 이렇게 많은데 같이 죽으세. 우리 마법사들을 위해서. 그대들이 사라지면 마법사들의 자유가 한 발자국 가까워진다네."
루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봐봐! 저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 봐보라고! 누가 보면 우리가 저놈의 목에 목줄을 걸어놓은 줄 알겠어!]
마법사의 손끝부터 타올랐다.
그대로 벽을 잡자, 마나를 먹은 불꽃이 단숨에 벽을 삼키며 타올랐다.
불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골 때리는 새끼. 사람보고 장작이라니!"
라르웬이 바람을 타고 달려가 망치 형상을 한 흙을 벽을 향해 휘둘러 불을 꺼트렸다.
'저 자식. 진짜 다 태울 작정이야.'
자신이 마주했던 마법사 중에서도 상위에 있을 만큼 미친 자식이었다.
적어도 다른 놈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데.
콰앙.
라르웬이 착지하자마자 마법사를 향해 흙이 날카롭게 치솟아 올랐고, 라르웬의 눈앞에 작은 폭죽이 터졌다.
퍼버버벙!
짙은 연기가 퍼졌지만, 바람이 나타나 단숨에 연기를 지워버렸다.
솟아오른 벽이 폭죽의 여파를 막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오."
마법사 짧게 감탄하며 호흡을 멈췄다.
하벨은 라르웬이 말한 '호흡'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마법이란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아라에게 받은 정령수로 물을 만들어냈다.
치이이익.
'불로 장난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대는 수염이 새하얗게 변할 때 동안 배우지 못했는가?'
"불장난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데. 안 배웠어?"
"……!"
장난기가 어린 웃음소리에 숨죽여 조용히 마법사의 목을 베려던 카샬도, 마법이 멈춘 마법사도, 그런 마법사와 대적하던 라르웬도 모두가 하벨을 보았다.
각자 의미가 달랐지만, 그들이 주목하는 건 하나였다.
[무, 물이라고?]
루룸이 당황했다.
하벨이 받아들일 수 있는 주 힘이 물이라니.
그럴 리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물의 힘을 강하게 타고난 세렌마저 모르지 않았던가.
'왜 이렇게 놀라지?'
하벨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기사가 폭탄을 터트렸을 때도 자신이 막지 않았던가.
그 사실을 아는 카샬마저 놀라다니.
'…아. 잠깐 일어난 행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네.'
하벨은 생각을 집어넣고 카샬을 불렀다.
"뭐 해, 카샬? 놀러 왔어?"
설령 의문이 있다 한들 나중이었다.
하벨은 카샬을 자극하는 척했다.
이미 카샬의 검은 마법사를 향해 궤적을 그리고 있었으니.
화르르륵!
하지만 마법사의 모자가 타오르며 카샬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카샬은 모자를 베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눈치가 빠른데.'
하벨은 아쉬움을 드러내며 양손에 뿜어져 나오는 라르웬의 번개를 바라보았다.
"쿨럭……."
하벨이 피를 쏟아내며 낸 소리는 번개가 내지르는 소리에 묻혔다.
파지지직!
라르웬과 마법사의 거리는 가까웠다.
그의 번개가 마법사에게 닿자마자 복도를 가릴 만큼의 화염이 솟구쳤다.
불길이 미친 듯이 번지자 라르웬은 손을 휘둘렀다.
짜악!
바람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단숨에 마법의 매개체가 되는 옷을 찢어버렸다.
"저항이 심한 게 아닌가?"
마법사는 자신의 옷을 바라보다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 닥쳐."
"내 그대들이 오는 걸 알고 있었네. 그럼, 왜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가."
마법사는 불꽃이 잠잠해지자마자 자석처럼 순식간에 달려드는 카샬의 검을 지팡이로 막았다.
"이 집 자체가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법사의 웃음소리가 번지며 그의 눈동자에 마나가 번져가는 게 보였다.
팅!
하지만 순간, 마법사의 이마가 뒤로 넘어갔다.
물 한 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홀라당 다 타버릴 뻔했어."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릴 무렵 마법사는 자신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마를 때린 공격은 누가 그랬는지.
땅을 적신 저 피는 누구의 것인지.
그걸 알기도 전에 마법사의 세상은 암흑으로 물들었다.
카샬이 쥔 검의 끝에 피가 맺혔다.
"막내야! 이거 터진다! 빨리 덮어! 루룸, 너도 가!"
라르웬은 마법사의 시체를 흙으로 덮으며 외쳤다.
자신이 가진 정령수는 충분했다.
'…양심이 없네.'
하벨은 바들거리는 손으로 벽을 잡고 숨을 골랐다.
또 순환의 길로 기어오르는 불순물의 행동에 온몸이 찔리는 듯한 고통이 치솟았다.
하지만 하벨의 눈동자는 잠잠한 파도처럼 깊어졌다.
아라에 이어 루룸까지 정령수를 쏟아붓는 게 아닌가.
기어오르는 불순물이 정령수로 녹아내리자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하벨 주변에 물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정령들의 힘을 빌려 만들어내는 물은 손바닥만 한 크기를 너머 웅덩이 여러 개를 합친 듯 커졌다.
'딱 좋은 크기다.'
하벨의 길어진 미소와 함께 손바닥으로 내려치듯 물은 천장에서 내려왔다.
찰싹!
묵중한 무게와 함께 흙을 압박하며 그 속에 자꾸만 고개를 들어내는 불을 꺼트렸다.
치이이익.
연기가 피어올랐다.
"…커헉!"
하벨의 몸이 무너져내렸고, 피도, 제어력을 잃은 물이 바닥에 쏟아졌다.
[삐이이잇!]
아라가 주머니를 뚫고 하벨의 얼굴에 찰싹 붙었다.
바닥이 울렁거리는 상황에 하벨은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순환의 길에 차오르던 불순물이… 덜 차올랐는데?'
이전에는 그 차이가 너무 희미해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보였다.
가령 정령수로 힘을 사용해 5만큼 비어낸 순환의 길에 4.8에 가까울 만큼 불순물이 차올랐다면 지금 10만큼 비어낸 순환의 길에 다시 차오른 불순물의 양은 8.2 정도인 듯했다.
'힘을… 사용하는 크기가 클수록 차오르는 저 불순물의 양도 적어져.'
요컨대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고 점점 힘을 기르면 물의 저주와 상관없이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하벨은 웃었다.
'봤지, 하벨 티에라? 내가 맨입으로 그대의 몸을 쓰지 않는다는 걸.'
"카, 카샬? 막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한데?"
하벨을 부축하던 라르웬이 경악하며 물었다.
저 상태로 웃다니.
"둘째 도련님께서 시키셨잖습니까! 도련님. 지금 제정신 맞습니까?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카샬은 당장 아공간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빼내며 물었다.
반짝반짝.
이미 조금 전부터 붉은빛을 내는 정화 장치의 빛이 더 빨라진 것 같았다.
마법사가 죽으면 마법 폭주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기에 집사로서 하벨을 말려야 했는데 말릴 수 없었다.
"…일만 잘하는 카샬."
하벨이 피가 묻은 입으로 씩 웃었다.
"깜짝이야. 정상이네. 그렇지 카샬은 일만 잘하지. 저 주둥아리가 문제지만."
라르웬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닌데요. 정화 장치 보면 모릅니까? 도련님의 몸에 불순물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라르웬은 주사기를 놓는 카샬을 무시하며 밝게 웃었다.
"잘했다. 잘했어, 동생아."
"아직 좋아하기엔 이릅니다. 마법사를 더 잡으러 가야죠."
"그럴 필요 없어."
"이유가 뭡니까?"
라르웬은 복도 끝을 향해 무언가를 날렸다.
조금 전 전투 때 루룸이 살짝 알려주지 않았던가.
―바람이 불어오는데?
푹!
정령수를 통해 만들어진 바람은 라르웬의 손을 타며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고, 누군가를 꿰뚫었다.
"불이 잘 타려면 약간에 바람이 필요하지. 누가 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