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필요 없다니까(3)
* * *
* * *
처음 페트리오와 함께 뒷세계에 찾아 정보를 얻으러 갔던 그곳에 하벨은 다시 들어갔다.
여전히 살인 현장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저자는 가짜입니다."
뤤트로는 죽어버린 암살자를 보자마자 그를 부정했다.
"얼굴이 훼손됐는데 어떻게 알아보는가?"
당연히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기에 하벨은 뤤트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야 키가 조금 다르니까요. 제가 이렇게 둔하게 생겨도 눈썰미는 제법 좋습니다."
"사실이라면 자네는 정말 눈썰미가 좋은 편이야."
"맹세코, 정말, 무조건 사실입니다."
뤤트로는 가면을 뚫고 올 정도로 날카로운 하벨의 시선에 굽실거리며 말했다.
"…푸흡."
하벨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뤤트로가 아닌 죽은 암살자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정말로 뤤트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벨은 뤤트로를 보며 뼈가 시리도록 차갑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무조건 사실이어야 할 걸세."
"……."
뤤트로는 그 목소리에 잠깐 얼어붙다 천천히, 하벨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딱딱.
입술이 맞물렸다.
"무, 무, 무, 물론입니다! 이제 도련님의 종이 될 텐데 제가 어찌……."
"필요 없다고 했지?"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은 또 누군가의 왕이 될 생각은 없었다.
"형님께 가 있게."
"예, 예!"
뤤트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도중에 넘어졌지만, 하벨의 시선을 잡지 못했다.
"도련님의 가설이 옳았습니다."
카샬은 뤤트로가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그래. 내 가설이 맞았네? 검은 달끼리 의뢰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니. 내 몸값이 비싸긴 더럽게 비싼가 봐?"
"어마하겠죠. 아마 제가 열심히 몇 년간 모은 돈보다 많지 않을까 싶… 젠장."
갑자기 밀려오는 현실 타격에 카샬은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혹시 월급을 올리는 권한이 나한테 있나?"
"그, 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카샬이 껄끄럽다는 듯 말을 꺼내자 하벨은 키득거렸다.
"어쨌든, 승리자는 이 사진 속 암살자네. 아직 여관에 있으면 좋겠어."
하벨은 기지개를 켰다.
적을 사냥할 시간이 찾아왔다.
"동료를 팔아먹으려고 마법사나 뤤트로까지 팔았으면 죽기는. 진짜 한심하네."
"그래서 도련님께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던 게 아닙니까?"
"결과로 따지면 그렇지. 운이 좋았네?"
하벨의 입꼬리가 가득 올라갔다.
"도련님."
"왜?"
"제가 아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싸움은 누구한테 배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제가 감히 도련님께 재수 없다고 말씀드려도 됩니까?"
"원한다면야."
하벨이 싱긋 웃자 카샬은 망설이지 않았다.
"방금 진짜 재수 없었습니다."
"나는 잘하는 만큼 대우해줘. 이번 달에 힘내면 월급이 오를 가능성이 크겠지?"
"방금 진짜 저 암살자 자식이 재수 없었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도련님을 만나 인생 제대로 꼬였잖습니까.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자, 이제 나머지 적도 응징하시러 가셔야죠. 저는 도련님을 믿습니다."
카샬은 집사는 이렇다는 걸 보여주듯 정중한 자세로 충성을 담아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부잣집에 빙의 되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저렇게 두 손에 열이 나도록 비비는 건 자신이지 않을까.
'이건 고맙다, 하벨 티에라.'
* * *
테미도르 여관.
간판을 확인한 하벨은 카샬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톡톡.
창문을 건드리는 빗소리가 들려 하벨은 벌써 죽을 맛이었다.
"안녕."
하벨은 가볍게 인사하며 차가워 보이는 여성 앞에 앉았다.
아주 사진을 빼다 박아 스쳐 가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벨은 손깍지를 꼈다. 팔에 착용한 랜턴이 흔들려 자연스럽게 하벨의 시선을 빼앗았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꺼졌던 랜턴의 빛이 피어났다.
또 그 검은 불꽃.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이 되면 나타난다는 건가?'
앞서 뒷세계도 그렇고, 눈앞에 있는 자 역시 자신의 목숨을 노렸으니.
만약 그렇다면 꽤 마음에 드는 도구가 아닌가.
하벨은 그녀가 먹고 있는 음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맛있는 걸 먹고 있네? 사람 죽여놓고 목구멍에 잘도 넘어가나 봐."
"의뢰를 완수하기 전까지 도망치는 건 내 적성이 아니라서."
"그럼 대화부터 할래? 아니면 칼부림이나 해볼까?"
하벨이 장난기를 마음껏 드러내자 그녀는 포크를 든 채로 피식 웃었다.
이미 칼을 뽑은 카샬을 포크로 가리키며 그녀는 말했다.
"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2 : 1이잖아?"
"원래 다 치사하게 살잖아? 너도 그랬고. 나는 네 동료가 내 잠을 깨워서 좀 짜증 난 상태야."
"나는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이렇게 암살 대상이 제 발로 걸어와 죽여달라고 찾아오는 건 처음이야. 영광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여성은 반쯤 먹던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 안에 넣었다.
하벨은 물론, 아라 역시 케이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되게 맛있어 보이네."
"살아 있다면 시켜줄게. 원하는 만큼."
"좋아. 네 지갑에 손대도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도발과 같은 하벨의 말에 그녀는 비웃음을 흘렸다.
"너는 도망을 갔어야 했어, 하벨 티에라. 아니, 티에라 가문에 숨어 머리카락도 보이지 말았어야 했지."
"카샬. 넌 얼마나 강한데?"
하벨은 그녀가 지껄이든 말든 느긋하게 등에 기대어 물었다.
"어디서 맞아 죽지는 않을 겁니다. 뭐, 마법사한테 약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상성이란 게 있잖습니까. 저한테는 마법사가 그런 존재죠."
"그래서?"
팅!
카샬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암기를 튕겨내며 말했다.
"제가 검을 좀 다룰 줄, 아… 먹던 포크를 던지다니. 직업병이 꿈틀거려 짜증이 좀 납니다."
포크가 날아갈 동안 생크림이 튈 테고, 튄 부분을 찾아서 치워야 하고, 시트에 튀면 바꿔야 하고.
카샬은 상상만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니까, 치사하게 이기자고."
하벨은 실실 웃었다.
"아뇨. 도련님께서는 지금 절 시험하시고 계십니다."
"아닌데?"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진짜 치사하게 이기려고 카샬을 데리고 왔는데.
"월급, 꼭 올려주시리라 믿고 반드시 시험에 통과하겠습니다."
"그건 좀 진짜 치사하네."
"기회가 왔으면 노려야죠. 감사합니다."
카샬은 미리 여관 주인을 통해 사람을 내보냈기에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정말로 신이 나 보였다.
'돈이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크잖아?'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정령수 없이 천천히 물을 만들어냈다.
킁킁.
[삐삐?]
이거 내 거야?
눈이 너무도 반짝여 그런 물음이 아닐까 싶었다.
하벨이 고개를 가로젓자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며 아예 몸을 돌려버렸다.
'거참. 잘 삐진단 말이야.'
그녀의 단검이 하벨에게 향하자 그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까드드득.
카샬의 검이 그녀의 검을 막자 벽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도련님. 다 좋은데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겁니까?"
"좀 피곤해서. 왜? 날 지키는 게 버거워?"
치사하게 이긴다는 하벨의 계획은 아직도 여전했다.
그저 느긋하게 틈을 노릴 뿐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계속 앉아 계셔도 됩니다. 아, 제가 도련님을 위해 미리 차를 따랐어야 했는데."
카샬은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
타악!
순식간에 그녀의 목을 노리며 내질러진 카샬의 검에 그녀는 이를 살짝 악물며 두 손에 들린 양 단검으로 막았다.
까앙!
생각보다 저 남자의 검이 매서웠다.
"가만히 있으려니 좀 심심하네."
하벨은 카샬을 딱히 믿는 건 아니지만, 그가 질 것 같지 않았다.
"암살자야, 날 죽이라 시킨 의뢰인이 누구야?"
그러니 자신은 자리에 앉아서 입이나 놀릴 생각이었다.
"그런 중요한 정보를 흘리면 더는 암살자 짓도 못 해 먹어서 곤란해."
그녀는 한 손으로 카샬의 검을 튕기고는 그 틈에 하벨에게 암기를 날렸다.
타악.
카샬이 다급히 세운 받침대가 암기를 맞고 땅으로 뒹굴었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끈질기네!"
암살자의 감정이 흔들리자 하벨은 천천히 그녀를 흔들었다.
"네가 죽인 그놈, 아, 친구? 아니야. 이건 너무 친근하지. 동료였던 놈이 다 털어놓던데? 날 죽이는 의뢰를 두고 싸웠다고 말이야."
"혀 놀림이 예사롭지가 않네?"
"그럼 입 좀 터는 김에 경고하지. 나한테 습격해온 두 암살자가 있었어. 두 놈 모두 진짜 죽었을 것 같아?"
하벨은 또 말을 던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뒷세계 암살자인 척하는 검은 달을 찾았겠어?"
아차.
하벨은 말하고도 움찔거렸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정한 '검은 달'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이 느려졌다.
'뭐야……?'
하벨은 속으로 당황했다.
저 암살자는 마치 자신보고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쳐다봤지 않던가.
'진짜 암살자 단체 이름이 검은 달이었어?'
하벨은 머릿속에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난 너희 지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데."
하벨은 거짓말을 떠벌렸다.
또 그녀의 행동이 느려지며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라고?'
하벨은 속으로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챙!
카샬의 휘두르는 검을 막다 그녀의 단검이 하나 날아갔다.
그녀는 여유를 잃었고, 초조함이 하나씩 피어올랐다.
"웃기지 마!"
"그 가짜가 살려고 별의별 말을 떠들더라고. 뭘 또 떠들었는지 궁금하지? 내가 지부의 위치만 들었을까?"
하벨은 미소를 지었다.
"티에라 가문이 정말 움직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 순간, 그녀가 쥔 마지막 단검까지 날아갔다.
카샬은 숨을 참았다.
잠깐 그녀의 손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나타났다.
쉬이이익!
카샬이 눈을 떴다.
한꺼번에 날아가는 소리가 카샬의 귓가에 웅웅 울렸다.
위치는 물론, 어딜 향할지까지 들렸다.
'자, 카샬이 움직일 테고, 나는 마무리 지어야지.'
하벨은 손가락을 튕겼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카샬의 검 사이를 부드럽게 통과한 물방울 여러 개가 그녀에게 날아갔다.
팅! 팅!
팔을, 다리를, 그리고 턱을 맞추며 그녀는 그대로 기절했다.
힘을 잃은 암기가 고스란히 땅에 떨어졌다.
"……!"
카샬은 황당한 얼굴로 하벨을 보았다.
"왜 그렇게 봐?"
자신이 마주했던 첫 암살자는 자살했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자살할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 지금 도련님께서 마무리하신 겁니까?"
"보면 알잖아?"
"왜 치사하게 절 이기십니까?"
"카샬. 아무래도 까먹은 모양인데 나는 사냥감을 양보하지 않아."
다른 건 몰라도 마무리는 참을 수 없지.
"여관 주인을 불러와. 저 암살자의 방이 어디인지 조사해야겠지?"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암살자를 가리켰다.
"아 참, 포박하는 것도 잊지 마."
* * *
"……."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어쩐지 불안함이 자신을 휩쓸었다.
"좀 후회되는데?"
"암살자를 잡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조사 겸 방에 들어오신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둘 다."
하벨은 조금 전에 잡은 암살자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인질이 있었다.
"읍읍!"
증오에 찬 눈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의 모습에 다시금 불안함이 넘실거렸다.
만약 인질이라면 저런 눈빛은 하지 않을 텐데.
"카샬. 내가 몰라서 그런데 암살자가 보통 인질을 잡아?"
"그러면 암살자라는 이름을 떼고 인질범을 달았겠죠."
"그렇지? 되게 수상한 거 맞지?"
"맞습니다. 엄청 수상합니다."
"날 죽이려고 연기하는 거 아니야? 밧줄이 생각보다 덜 튼튼해 보이는데?"
"쇠사슬로 감겨 있습니다. 저번 시력 검사 때, 양쪽 다 1.5로 나왔습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가득하네. 요리라도 하는 건가?"
"검을 잡았습니다. 상처도 있네요. 최근에 생긴 상처죠."
하벨은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자신을 카샬이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화났어, 카샬?"
"아뇨. 하지만 도련님께서도 보이시잖습니까? 방금 잡은 암살자와 저 사람의 옷이 비슷하다는 걸요."
"옷이야 비슷할 수도 있지."
"그럼 귀걸이가 비슷하잖습니까. 아, 손등에 검은 달 무늬가 나타난 거 안 보이십니까?"
"…화났네, 화났어."
하벨은 방금 자신이 잡은 암살자와 포박된 저 암살자가 연관 있다는 사실을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일단 대화라도 들어봐야겠다 싶어 입가에 붙은 테이프를 뜯었다.
찌이익.
"저 새끼를 죽이게 해줘. 내가 다 말해줄게. 아니, 내가 네 밑에 기어들어 갈 테니까, 제발, 저 새끼만 죽이게 해줘."
"……."
하벨은 그녀가 내뱉은, 피부가 저릴 정도의 살벌한 말에 눈을 깜박거렸다.
"네 밑에 들어간다고. 짖으라면 짓고, 뛰라면 뛸게."
"…아니. 그런 건 필요 없는데."
"나, 사람 잘 죽여. 네가 가리키면 내가 슥 그어서 죽여줄게. 배신? 내 목줄을 쥐여주면 되는 거지? 아… 내가 계속 속으로 빌었거든. 저 개새끼를 죽일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사람을 신처럼 모신다고. 축하해. 이제부터 네가 내 신이야."
"필요 없어."
하벨은 정말로 필요 없었다.
아니, 자리를 박차고 나고 싶을 정도였다.
"못 믿어? 믿기 어려워? 그래. 이해하지. 내가 미친년처럼 보이겠지. 그럼 저놈을 죽여볼게. 3초면 될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카샬을 향했다.
광기가 어린 듯한 눈빛에 순간 카샬은 흠칫거렸다.
"아무리 봐도 미친 거 맞는데요?"
그녀는 카샬을 더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2초 만에 죽여 주지."
"진짜로 필요 없다니까?"
하벨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다른 놈을 죽여줄게. 말해 봐."
"아니, 아니, 필요 없다니까!"
하벨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