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2화 (12/415)

12화. 틈의 세계(3)

* * *

"야. 하벨?"

라르웬은 멍하니 선 하벨을 다시 불렀다.

갑자기 팔찌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랜턴 모양을 한 장식을 보는 걸까.

불조차 들어오지 않은 그냥 장식일 뿐인데.

곧 라르웬은 우수수 올라오는 소름에 틈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꿰뚫린 괴물은 다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하. 귀찮은 놈들."

라르웬은 하벨을 보며 휘휘 손을 저었다.

하필 여기에 틈의 세계가 열릴 줄이야.

만약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하벨에게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개새끼들.'

라르웬의 이가 맞물렸지만, 그의 신경은 뒤에 선 하벨에게 쏠려 있었다.

"막내야. 괜히 휘말리지 말고 저쪽으로 가 있어."

"나는 하벨이 아닙니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저쪽으로 가라고."

하벨은 라르웬의 손짓과 행동이 불쾌했지만,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다.

라르웬은 정령사였다.

정령사 가문 내에 있었지만, 정령사가 어떻게 싸우는지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유일하게 따르는 정령 아라가 있으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이곳에서 그대를 보마.'

"여기서 보겠습니다."

하벨은 고작 두 걸음만 물러섰다.

"…너 미쳤어? 아니지. 저걸 보고 안 미치는 게 이상하지."

라르웬은 화를 내려다 참았다.

틈의 세계를 쫓다 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곤 했다.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지금 하벨의 몸이 떨리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너무 놀라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움직이면 안 된다."

대체 어디에서 카샬을 떨어트리고 왔는지 몰라도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그 이상함은 뒤로 미뤘다.

화르륵.

순환의 길에 차오른 정령수를 사용해 왼쪽 장갑에 불꽃을.

파지직.

오른쪽 장갑에 번개를 휘둘렀다.

[라르웬. 내가 봐도 오늘 쟤는 좀 이상하네.]

"쟤가 아니라 하벨이야. 내 동생, 하벨.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래?"

라르웬은 자신의 머리에 타고 있는 고슴도치 형상을 한 정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쟤랑 마주치기가 싫은 건데. 거기까지 해.]

"루룸."

[여기까지 하라고 했잖아, 바보야! 나한테 시비 걸지 마. 가뜩이나 저것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니까.]

루룸은 틈의 세계를 보며 가시를 세웠다.

"빨리 처치할 거니까, 그만 좀 투덜거려."

[그래 주면 나야 좋지. 둘 다 보기 싫으니까. 그리고 나는 투덜거리는 거 몰라. 왜냐고? 위대하니까!]

루룸은 해맑게 웃으며 라르웬에게 정령수를 콸콸 부어주었다.

불꽃은 붉은 검으로, 번개는 보랏빛 검으로 각각 모습을 형상화하며 라르웬의 손에 쥐어졌다.

그가 검을 각각 손에 쥐자마자 그의 팔을 타고 불꽃과 번개가 휘감아졌다.

하벨의 눈이 순간, 꿈틀거렸다.

'다른 속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불과 물은 상극이라 치지만, 저 두 속성은 상극은 아니더라도 달랐다.

달랐기에 저토록 균형 잡힌 조화는 어려울 텐데.

'저게 가능한 건가?'

하벨은 라르웬 주변에 맴도는 삐죽삐죽한 형상을 한 정령을 바라보았다.

조화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저 정령이 담당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삐.]

아라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 듯했다.

바람이 불었다.

아니, 라르웬은 바람을 타고 움직인 것처럼 가뿐한 걸음으로 그대로 높게 날아서는 허공에 발로 디뎌서는 역으로 땅으로 떨어졌다.

쉬이이익!

떨어지는 속도 그대로 힘을 실어 두 검이 공간을 베어내듯 괴물을 절단 냈다.

라르웬의 검은 거기서 멈추질 않았다.

또다시 휘두르며 괴물을 한 번 더 베어냈다.

"하벨."

그는 앞으로 나가며 자신을 불렀고, 몸이 조각조각 갈라졌음에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괴물을 가리켰다.

점점 투명해지더니 그 몸에서 조금 전에 없던, 보석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섭고, 보기 싫겠지만, 잘 봐. 너도 알 건 알아야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좋은 기회야."

라르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잊어버렸겠지. 어쨌든 저게 틈의 세계를 유지하는 핵이야. 이번에는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

라르웬의 얼굴에 하벨과 닮은 장난기 어린 미소가 피어났다.

그의 검은 틈의 세계에서 꿈틀거리는 놈들에게 파고들었다.

푸와아아아!

이어 팔을 감쌌던 불꽃과 번개가 길을 따라 달리는 오토바이처럼 매섭게 틈의 세계를 향해 돌진했다.

불꽃과 번개가 춤을 추는 광경에 라르웬의 눈이 번뜩거렸다.

타올랐고, 지져지는 그 소리가 너무도 생생했다.

퀘에에에엑!

하지만 틈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비명보다 더 날카롭지는 않았다.

귀를 찌르는 듯한 소리에 하벨은 오만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툭.

라르웬은 번개로 만들어진 검으로 핵을 가볍게 베어버렸다.

"이걸 부숴야 틈이 닫혀."

고오오오오.

음침한 소리가 주변에 깔리며 조각난 괴물마저 틈의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허공에 난 상처마저 천천히 아물어가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오늘은 운이 좋아. 딱 열렸을 때 발견했으니까. 보통은 열린 후에 발견돼서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는데."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라르웬은 불꽃과 번개를 지웠다.

"저게 뭡니까?"

하벨은 그 모든 과정을 본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오싹했고, 놀라웠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꿈틀거릴 만큼 깊은 슬픔과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틈의 세계."

라르웬은 흔들리지 않는 하벨의 눈동자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조용한 절망이라고도 불리지."

"저게 가능한 일입니까?"

"가능하니까 이렇게 나왔던 게 아니겠어?"

"방금 치명상을 입혔는데도 살아 있었습니다."

"쟤들은 안 죽어. 잠깐 행동을 멈출 뿐이지."

그 이유 때문일까.

하벨 티에라가 말했던, 세상이 멸망할 거란 말이 떠올랐다.

"왜 절망이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이해했네요. 그런데 왜 안 죽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는데, …흠. 너 좀 이상하다?"

라르웬은 하벨이 겁에 질려 발작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싶어 자신에게 약이 있었던가 생각하며 아공간 주머니를 뒤지던 참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침착했고, 오히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바라보듯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참 이상했다.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니. 그랬다면 이 세계는 진작에 멸망했겠지."

라르웬은 최근에 그 빈도가 늘어났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아, 내 저 틈의 세계에 정신이 팔려 인사를 하지 못했다. 아마 나중에 들으면 알겠지만, 나는 하벨이 아니라 용왕이다.'

"실례했습니다. 아마 차차 알게 되겠지만, 나는 하벨이 아니라 용왕입니다, 형……."

하벨은 모처럼 수월하게 나오는 말에 방심하다 마지막에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형님 소리를 내뱉으면 앞서 한 말이 뭐가 될까.

"마지막 말은 실수입니다, 형님. … 아씨, 그만 좀 해."

일부러 이러는 건지.

하벨은 신경질을 담아 자신의 입을 때렸다.

[…푸흡.]

"푸하하하!"

그 모습에 라르웬이 대놓고 웃었다.

"이 형님을 웃기다니. 이제 하산해도 되겠다."

[나도 살짝 웃었어. 아씨, 자존심 상해.]

루룸은 짧은 앞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웃긴 사람이 다름 아닌 하벨이라니.

"농담이 아니라 나는 하벨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보고자 하벨은 말과 함께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기보다 멀쩡하네."

라르웬은 생각보다 건강한 하벨의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팔찌도 못 보던 거고. 가짜 불꽃이라도 있었으면 예뻤겠네."

"……?"

하벨은 의문을 담아 팔찌에 달린 랜턴을 보았다.

이제야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지 않은가.

"이게 안 보이신다고요?"

[라르웬, 저기 안 보여?]

루룸이 하벨의 정화 장치를 가리키자 라르웬은 웃음기를 싹 지웠다.

정화 장치가 보글보글 끓고 있지 않은가.

"소리를… 껐어?"

"예. 시끄럽잖습니까."

"빛도?"

"예. 그럴 일이 있었죠."

뒷세계에 가니 혹시 몰라 다 꺼두었다.

약점을 노출할 수는 없지.

라르웬은 다급히 정화 장치에 소리 버튼을 눌렀다.

삐삐삐!

정화 장치가 열심히 울어대자 아라가 옆에서 같이 '삐삐' 거리며 노래하듯 소리를 냈다.

루룸은 그제야 아라를 눈치채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말은 취소야. 너, 미쳤어?"

라르웬의 언성이 올라갔다.

"아뇨. 보시다시피 지극히 정상입니다."

"소리를 끄면 어떡… 아니, 그래. 후. 시끄러울 수 있지. 그래서 끌 수도 있지. 그럼, 그럼."

라르웬은 힘겹게 화를 억눌렀다.

하벨의 눈동자가 살짝 풀려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빛은 왜 껐어? 저거라도 있어야 네 상태가 어떤지 제대로 알 거 아니야?"

"살 만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흘리며 라르웬은 카샬을 찾았다.

"카샬은 어디에다 버리고 왔어?"

"집에 잘 있습니다. 아마도?"

"……."

라르웬은 잠깐 뺨을 맞은 듯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생각하니 참 이상했다.

호위도 없고.

'아니지, 없을 수도 있지. 그래. 없을 수도 있어.'

최대한 넓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카샬이 집에 있다니?'

얼마 전에 하벨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 충격적인 일에 어떻게 일이 손에 잡히겠는가.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도 틈의 세계를 닫고 왔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하던 와중에 또 다른 소식을 전해 받았다.

―하벨 발견. 산 위에서 오염된 눈에 오랫동안 방치. 현재 중태.

'아버지는, 아니, 아버지라면 하벨을 이렇게 덩그러니 보내실 리가 없지.'

라르웬의 표정에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너. 솔직히 말해."

"뭘 말입니까?"

"가, 가출했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아하하, 그렇게 티가 났습니까?"

천연덕스러운 하벨의 미소에 라르웬은 혈압이 오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

"이제 집에 돌아가던 참이었습니다. 원래는……."

"이, 이 미친놈아!"

라르웬은 더는 화를 참지 못했다.

"미친! 이 미친놈!"

"아니. 뭘 그렇게……."

툭.

물 한 방울이 하벨의 손등에 떨어졌다.

금세 푸르게 물들며 돌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어?'

[삐이잇!]

아라가 깜짝 놀라며 하벨의 손등에 앉았다.

삐삐삐삐!

정화 장치가 더 요란하게 울리며 하벨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거 좀 이상한데? 속이 울렁거려. 아니. 속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다, 다 이상한데?'

"…이런."

라르웬은 어서 아공간 주머니에서 우산을 꺼내 들었다.

너무 황당해서 틈의 세계가 끝나면 그 일대에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다니.

라르웬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하벨을 익숙하게 붙잡았다.

"너, 집 가면 뒤질 줄 알아라. 가출? 가추울?"

쏴아아.

비가 내렸다.

* * *

"…와."

라르웬은 얼이 빠진 얼굴로 룬델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서 걔가 좀 이상했네.]

루룸이 룬델의 손길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살살 녹는 표정을 짓자 슬쩍 라르웬을 살폈다.

"아버지. …아버지, 이거 진짜입니까?"

"그래. 헤레스가 진찰한 결과다."

룬델은 차분히 차를 머금었다.

"지, 지금 차가 넘어갑니까?"

"넘어가니 마시는 게 아니겠더냐?"

룬델의 미소에 라르웬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룬델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라르웬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하벨이 혼자서 저 호위를 뚫고, 하물며 카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 하네요."

점점 라르웬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래. 설마하니 오늘도 하벨이 밖으로 나가다니."

룬델은 찻잔을 내려놓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나간 게 아니라 가출이랍니다. 가출이요. 나이를 대체 어디로 먹은 건지."

라르웬은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는지 이를 갈았다.

"너무 혼내지 말거라. 하벨은 지금 정상이 아니니."

"누님은… 압니까?"

"아직."

"온다고는 합니까?"

"글쎄."

"글쎄입니까? 지금 누님이 해결하시는 정화제 문제만으로 복잡한데 괜히 건드리지 말자는 심정인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그저 누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건지 알고 싶습니다."

"둘 다일지도 모르겠구나."

룬델은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전자였지만, 지금은 넬시아가 바뀐 하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선뜻 연락하기가 어렵단다."

"잘하셨습니다."

라르웬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솔직히 저도… 좀 그렇습니다.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어려운데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손을 만지작거리다 라르웬은 룬델의 시선을 피했다.

"…저는 하벨이 아직 어렵습니다."

"하나씩 하렴. 이제는 말이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봅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잖습니까?"

라르웬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벨에게 가는 것이더냐?"

"예. 이번 일과 별개로 가출은 혼내야죠. 아버지께서 하지 않으시면 제가 합니다."

라르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룬델의 시선에 묘한 의문이 가득했다.

무얼 묻는 건지 이제는 빤히 보였다.

"사람이 바뀌든 뭐든 하벨은 제 동생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내뱉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라르웬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막지 못했다.

룬델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 몫까지 혼내주렴. 아직은 그 아이를 혼내기가 어렵구나."

"예. 적당히 하겠습니다."

자리를 떠나는 라르웬을 보며 룬델은 차를 마셨다.

'하벨. 너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 험한 산을 올랐더냐?'

이제는 묻지 못할 말이기에 룬델은 가슴에 묻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