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1화 (11/415)

11화. 틈의 세계(2)

* * *

* * *

"하."

하벨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긴 숨을 내쉬었다.

공기가 답답한 게 땅굴에는 오래 있기 어려웠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빛이 꺼지다니.'

하벨은 랜턴을 건드렸다.

덩달아 아라가 앞발로 쿡 찌르다 꺄르르 웃었다.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벗어볼까?'

딱히 불편한 것도 없기에 팔찌를 벗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도련님."

뒷세계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페트리오가 입을 열었다.

하벨은 팔찌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도련님."

뒷세계에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페트리오가 입을 열었다.

"왜?"

"무너트리실 건 아니시죠?"

뒷세계를.

페트리오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맞아."

"…위, 위험합니다. 오늘은 상황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왜 뒷세계가 뒷세계이겠습니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경악에 비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지.

"네가 나한테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 가문의 인장이 딴 놈 손에 넘어갈까 봐 겁이 나나?"

"맞… 습니다. 겁이 납니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혼자이잖습니까."

[삐잇!]

나도 있다고.

아라는 불만을 터트렸다.

"나도 생각을 할 줄 알아. 혼자 갈 생각은 없고."

카샬이라는 훌륭한 친구가 있는데 왜 내버려 두겠는가.

검은 써야지 검이 되는 법.

하벨은 실실 웃으며 방금 기절시킨 검은 달 암살자에게서 가져온 종이를 페트리오에게 건넸다.

"혹시 여기에서 너와 같은 일을 했던 놈들이 있는지 봐봐. 네가 건넨 돈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야."

"저도 그냥 심어둔 자들과 스쳤던 자들을 쓰면 되는 게 아닙니까?"

"넌 어차피 저쪽에서 버리는 카드였잖아. 그런 꼬리는 필요 없어."

암살자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

그 중심에 페트리오가 있었다.

그래서 그도 이전에 벌어졌던 암살자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결국 버려지지 않았는가.

가문에 숨어든, 진짜 중요한 인물을 알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럼 왜 겹치는지 물으시는 겁니까?"

"혹시 같은 사건일까 봐."

암살자 사건과 페트리오 좀도둑 사건은 서로 달랐다.

그러나 우연에 우연을 겹쳐 공통된 사건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여기는 없습니다."

페트리오는 확인 후에 다시 종이를 돌려주었다.

"좀도둑."

"예."

"우습게도 너는 나한테 쓸모있는 카드야."

페트리오가 벌인 사건은 단순하지 않았다.

그는 무너져가는 가문을 구하기 위해 강제로 티에라 가문에 있지도 않은 '정화제 제조법'을 구하러 왔다.

당연히 어설펐기에 정령들에게 들켰고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다.

하벨은 구구절절 이어진 페트리오의 말에 처음 든 생각은 '곤란하네'였다.

고작 좀도둑 하나로 무얼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많은 걸 할 수 있었다.

'정화제는 티에라 가문에게 몹시 중요한 거지.'

돈이든 명예든 다 떠나서 정화제라는 의미는 티에라 가문에게는 남달랐다.

그런 정화제가 노려진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내부 경계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외부 경계는 상대적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지.'

페트리오는 고작 좀도둑이 아니라 시종이었다.

즉, 내부자였으니 또 다른 내부자가 있다는 사실에 시선이 쏠릴 게 뻔했다.

'이 사건은 암살자처럼 단순하지 않아.'

무엇보다 뒷세계를 장악했다던 페트리오의 가문이 무너졌다는 말도 신경 쓰였다.

뒷세계가 마을마다 존재하겠지만, 지금 티에라 가문과 가까운 마을도 뒷세계의 주인이 바뀐 상황이 아닌가.

이게 과연 우연일까.

하벨은 작은 물이 아닌 큰 강을 보고자 했다.

"내가 가출을 위해 널 밖으로 꺼냈지만, 다시 들어가야겠어."

"…예?"

"머리를 쓰는 건 피곤하지만, 나는 한 번 마음먹은 건 대충하지 않아."

페트리오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는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라는 말밖에 없었다.

"널 협박한 자는 지금 티에라 가문을 노리고 있어. 널 이용해서."

하벨은 친절하게 말을 꺼냈다.

"저, 정화제가 아니고요?"

"정화제를 훔치면 당장 큰 이득을 얻겠지."

하벨은 정화제가 얼마에 팔리는지 티에라 가문이 그 정화제로 얼마만큼 이득을 챙기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물이 오염된 세상에서 정화제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정화제가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시한부이지 않은가.

"너랑 나는 죽이고 싶은 자가 같아. 그렇지?"

가면을 벗은 하벨의 눈이 휘었다.

페트리오를 꼬드긴 놈이나, 페트리오를 이용해 티에라 가문을 압박하려는 놈은 똑같았다.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가문의 안전은 물론이요, 이 몸의 안전까지 확보가 되어야 했다.

티에라 가문이 망한다면 정화제를 수월하게 공급받지 못하는 이 몸의 결말은 죽음이었다.

"혹시 저한테도 독을 심으셨습니까?"

페트리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떨 것 같아?"

"…독을 조심하십시오."

페트리오의 경고에 하벨은 흥미진진한 감정을 드러냈다.

"묻지 않은 걸 막 알려주네? 이건 또 무슨 수작일까."

"수작이 아니라 조금 전 한배를 탔다고 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한배는 아직 안 탔는데."

"예? 아니, 방금 그렇게 말씀하지……."

"내가 배에 탔고, 넌 줄에 매달려서 바다를 건너고 있어. 파도에 휩쓸리면 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건 너야. 아마 그 상황이 계속 반복되겠지."

페트리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설명만으로도 고생길이 훤했기에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 널 배에 태울지 말지 고민하는 것도, 네 줄을 끊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다 내가 선택해."

"뭐 이런… 헙."

페트리오는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순간 울컥해 실수하고 말았다.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너를 괜찮게 보고 있어. 진심이야."

하벨은 키득거렸고, 페트리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가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야. 그래서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든 용기를 높게 보고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페트리오는 혼란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너를 미끼로 쓸 거야."

그럼 그렇지.

페트리오는 몰려드는 절망감에 깊은 한숨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이미 실수를 하지 않았는가.

"이 역할만 잘 끝내면 네 손에 뭐가 떨어져 있을지를 생각해."

하벨은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를 꺼냈다.

그러나 무거운 눈빛.

그 눈빛에 페트리오는 자신이 무얼 놓쳤는지를, 하벨이 무얼 주고자 하는지를 알았다.

"…정말이십니까?"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제게… 복수의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그래. 네가 역할을 잘 해낸다면."

"저는… 좀도둑입니다."

"좀도둑이기에 네 목이 아직도 붙어있는 거야."

하벨은 멍하니 자신을 보는 페트리오의 시선에 키득거렸다.

"그렇다고 네가 저지른 죄가 사라진 건 아니야, 좀도둑."

눈치가 빠른 자.

용기를 가진 자.

자신이 좋아하는 덕목이었다.

자신은 절대자가 아니기에 좋아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벨은 근처 웅덩이로 걸어갔다.

아라는 얼른 웅덩이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첫 가출인데 억지로 끌려 집에 들어가는 건 꼴 사나우니 내가 다시 가야지.'

웅덩이를 바라보며 하벨은 세렌을 불렀다.

"세렌. 이제 볼일 끝났어."

[삐삐!]

꼬물거리며 웅덩이를 바라보던 아라는 털을 부르르 떨었다.

물이 회오리치며 세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의 형태로만 봐도 세렌은 화가 가득 난 것처럼 보였다.

[너어……!]

"오. 이게 되네?"

하벨은 좋은 걸 알았다는 듯 신이 난 표정을 했다.

[빨리 가버려! 어디론가 멀리 가라고! 내 시야에서 멀어져!]

물웅덩이가 요동치자 누가 봐도 정령이 화가 난 게 보였다.

"안 돼. 가출은 이제 끝났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서."

"하."

[…허?]

페트리오와 세렌 둘 다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벨은 자신의 단어 사용이 부적절했나 생각하다 당당하게 말했다.

"왜? 집을 몰래 떠나면 가출 맞잖아?"

"…예. 뭐어, 맞긴 맞습니다. 뜻만 본다면요."

"넌 좀 떨어져 봐."

하벨은 페트리오를 또 뒤로 물리며 물웅덩이를 보는 척 세렌에게 말을 걸었다.

"세렌. 혹시 나 찾는다고 난리가 났어?"

[아직. 카샬 혼자 난리가 났…….]

세렌은 순순히 대답하다 말고 말을 멈췄다.

[네가 진짜 싫어! 싫다고!]

[삐이잇!]

아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해석해보자면 '우리 대장 건들지 마라!' 가 아닐까 싶은데."

하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인간들이 그렇게 조기교육, 조기교육 하는 모양이었다.

훌륭했다.

[……?]

세렌은 아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상황이 그래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거 대체 뭔데?]

"정령? …아마도?"

[정령이라고? 정령? 얘가?]

이미 목소리에서 세렌의 곤란함이 드러났다.

[난 이런 정령은 처음 보는데?]

킁킁.

세렌은 아라 주변에 맴돌며 냄새를 맡았다.

[뭐지? 이 냄새는? 되게 좋잖아…!]

세렌이 살포시 아라를 껴안는지 양 날개가 포개어졌지만, 아라는 '삐잇!' 소리치며 하벨에게 찰싹 붙었다.

[…씨이.]

선의 형태로도 세렌이 자신을 노려본다는 게 느껴졌다.

'부러운가?'

하벨은 보란 듯이 아라를 쓰다듬었다.

[저딴 놈 말고 나한테 와. 내가 잘해줄게. 응?]

"집으로 가자, 세렌."

하벨은 아라를 계속 쓰다듬으며 말했다.

찌르르.

"오. 아라야. 너, 나랑 마음이 통했나 봐?"

갑자기 느껴진 교감의 감각에 하벨은 눈을 반짝거렸다.

하긴 세렌이 막 친절한 정령은 아니지.

[삐이.]

쏘오오옵.

아라는 무언가를 요구했지만, 하벨은 아라의 순수한 마음만 보기로 했다.

[그건 내가 결정해. 위대한 내가 결정한다고!]

"그럼 결정해 줘. 이렇게 너랑 떠들어도 나쁘지 않으니까. 너랑 계속 떠들까, 내가 입 다물고 집으로 갈까?"

[입 다물고 집으로 가는 걸로 해.]

세렌은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좋아. 아까 감옥으로 가줘."

[그것도 내가 선택해.]

"어디로 갈까? 내 방과 감옥 중 선택해줘."

[감옥으로 갈 거야. 무조건.]

하벨은 세렌의 대답에 웃음을 꾹 눌렀다.

"그럼 얼른 가자."

[가는 것도 내 마음이야.]

세렌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부리를 딱딱 부딪쳤다.

[삐로로.]

신경질이 가득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좀도둑."

하벨은 페트리오를 보며 이리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페트리오가 다급히 달려왔다.

세렌이 날개를 흔들자 물로 된 손이 튀어나와 하벨과 아라, 페트리오의 뒷덜미를 잡았다.

'잡힐 때마다 참 기분 나쁘단…….'

오싹.

순간, 하벨은 몸을 스쳐 가는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화르륵.

랜턴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검은 불꽃이었다.

'……?'

콰드드득.

무언가가 뜯기는 소리와 함께 페트리오가 먼저 세렌의 물에 삼켰다.

하지만 하벨은 뒤를 돌았다.

세렌이 만든 물의 손이 어떤 힘 때문에 끊어지는 걸 보았다.

[도망…….]

세렌의 목소리마저 물에 잠겼다.

드르르륵.

어설프게 벤 자국과 함께 허공에 공간이 갈라졌다.

길쭉한 팔이 튀어나왔다.

손가락 끝에 달린 뾰족한 손톱이 허공을 긁고 있었다.

끼기긱.

'이게… 뭐야?'

하벨은 온몸을 덮치는 섬뜩함에 멍하니 바라보았다.

[삐이이잇!]

다급한 아라의 목소리를 이어 비명에 찬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트, 틈의 세계가 열렸다!"

틈의 세계?'

하벨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도망가는 상황에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저 상황 자체가 '틈의 세계'라는 걸 이해했다.

말 그대로 벌어진 틈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란 말이 아닌가.

끼기기긱.

허공을 긁던 기다란 팔에 틈을 벌렸다.

포댓자루를 뒤집어쓴 듯한 머리가 이어 튀어나와서는 맹렬하게 소리쳤다.

크오오오오!

단지 소리만으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놀랍네.'

저 괴물이 무엇인지 몰라도 눈에 어린 짙은 증오만큼은 자신을 오싹하게 할 만큼 강했다.

'하나가 아니야.'

틈 사이에 증오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이 또 있었다.

덜덜.

온몸이 떨려왔다.

이 두려움은 자신이 아니라 하벨 티에라의 두려움이었다.

'어쩌면…….'

위험을 알릴 때, 랜턴에 검은 불꽃이 나타나는 걸까.

처음 암살자를 마주할 때도, 폭탄에 죽을 뻔했을 때도.

저렇게 크고 짙은 검은 불꽃이 일렁거리지 않았던가.

[삐잇!]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물었다.

"아. 나는 괜찮아."

곧 이 떨림은 멎을 거니까.

이제 이 몸을 통제하는 건 하벨 티에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콰르르르릉!

순간,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벼락이 매섭게 놈의 머리를 꽂혔다.

하벨은 번쩍이는 빛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콰앙!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번개를 두른 창이 괴물의 머리를 또 꿰뚫었다.

움푹 팬 바닥에 괴물이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은 꽤 볼만했다.

"괜찮다니. 짜식, 안 본 사이에 허세만 늘어나서는."

'누구지?'

하벨은 남자가 다가오자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야, 하벨."

은빛이 도는 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한쪽으로 내린, 짧게 땋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가 섭섭함으로 가득 찬 짙은 보라색 눈과 마주했다.

"기껏 네 걱정이 되어서 달려왔더니 왜 처음 보는 사람처럼 보고 있냐?"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차차 밀려오는 기억에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라르웬 티에라.

티에라 가문의 둘째이자 하벨 티에라의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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