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우당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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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좋습니다."
카샬은 하벨을 바라보며 비웃음을 그렸다.
"그만 좀 말해. 벌써 스무 번 넘게 말했잖아."
하벨은 정화 장치에 링거까지 추가해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속이 울렁거렸다.
[삐삐.]
아라도 불만을 터트리며 하벨의 배 위에 정화 장치처럼 울어댔다.
'역시 너밖에 없다, 아라야. 쟤는 글렀어. 내 평생 저런 시종은 처음 보네.'
하벨은 또 '꼴 좋습니다'라고 말하는 카샬의 말을 흘리며 손을 움켜쥐었다 폈다.
고작 한 방울의 오염된 물이었는데 몸이 이렇게까지 약해질 줄이야.
"이참에 오십 번은 채울 겁니다. 꼴 좋습니다, 도련님."
"카샬."
"예, 도련님."
"여기서 잘리면 갈 데가 없다며?"
"그럼 아쉽지만, 다음번에 채우도록 하지요. 이제 몸은 어떠십니까?"
입을 싹 닦는 모습에 하벨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잘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이겠지.
"카샬. 있잖아."
"말씀하십시오."
"이 팔찌 달린 랜턴에 불이 들어오는 거 못 봤어?"
"…다시 체온을 확인하겠습니다."
평범한 팔찌에 달린 랜턴에서 불이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만 보이는 건가?'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하벨은 슬쩍 팔찌를 빼보았다.
'……?'
빠지지 않았다.
무언가 손목에서 걸리는 기분에 하벨은 그대로 다급히 손을 놓았다.
신기한데 섬뜩했다.
"역시 체온을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카샬은 갑자기 창백해진 하벨의 얼굴에 체온계를 꺼냈다.
"아니야. 됐어."
하벨은 고개를 가로젓다 상황을 환기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조금 전부터 팔찌 말고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 몸 말이야. 원래 이래?"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물을 한 방울 맞았어."
"예. 도련님의 손등이 아직도 푸르잖습니까. …헤레스 씨가 2시간이 다 되어도 푸른 기가 사라지지 않으면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말했는데."
카샬은 시계를 확인했다.
"20분 정도 남았네요."
"겨우 물 한 방울로 내가 쓰러졌어.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속도 울렁거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열까지 나시는 상황이죠."
카샬은 불그스름한 하벨의 얼굴을 보며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도련님께서는 오염된 물의 내성이 전혀 없으셔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도련님께 오염된 물은 독과 같죠. 독 한 방울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데 오염된 물이라고 왜 못 하겠습니까?"
카샬은 남아 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도련님. 제가 미리 알려드렸어야 했고, 말려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빈정거릴 때는 언제고.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아니. 죽을죄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해?"
"죽을죄가 맞습니다. 저는 당신을 모시고 있는 집사니까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탁.
문이 열렸다.
"그래. 죽을죄지."
라르웬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들어왔다.
"말 잘했네, 카샬. 아, 노크 안 한 건 미안해."
사과도 덤으로 꺼냈다.
하벨은 가뜩이나 몸이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에 목소리가 하나 더 늘어나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일단 말할 건 말해야지.
"그러니까, 당신은 라르웬이고 하벨 형님이잖습니까?"
모처럼 제대로 나온 말에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나는 하벨이 아닙니다."
"됐어. 넌 내 동생이야."
라르웬은 가뿐하게 하벨의 말을 내던졌다.
"……?"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너는 내 동생이라고."
"왜 다들 후회할 짓을 하는 겁니까? 물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걸 아는데 이렇게 겁 없이 달려들어도 되는 건지 다시 생각해보시죠."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계속 하벨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멋대로 '하벨 티에라'라고 받아들이는지 몰랐다.
분명 후회할 테지.
"내 선택이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말고."
라르웬은 손을 대충 휘휘 젓다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라르웬 티에라. 네 형님의 이름이니까 잘 기억해 둬."
"원하신다면."
하벨은 몸에 힘을 살짝 뺐다.
라르웬이 옳았다.
자신은 사실을 알렸고, 선택은 그들이 하지 않았던가.
후회도 저들의 몫이겠지.
"원래 용왕이라 불렸을 뿐, 이름은 없었습니다. 가주님께 '하벨 티에라'라는 이름을 허락받아 쓰고 있습니다."
"그래, 하벨."
따악!
하벨은 자신의 이마를 치고 간 통증에 눈을 깜박거렸다.
웃음을 참는 카샬이 보이자 하벨의 입꼬리가 황당함으로 바르르 떨렸다.
'미쳤는가, 이 새끼야.'
"미치셨습니까? 이 새끼야."
"집에서 나가려면 당당하게 허락을 받아야지. 가출이라니! 머리가 빠지도록 맞고 난 뒤에 정신 차릴래?"
"그럼 막질 말든지. 못 나가게 해놓고 허락이라고?"
"아버지한테 물어봤어?"
"……."
"봐. 맞을 만했잖아?"
라르웬의 미소가 길어졌고, 하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탁.
이번에는 라르웬의 주먹을 막자 하벨은 우쭐거렸다.
하지만 순간, 라르웬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딱!
"주먹은 두 개다, 이 멍청아."
라르웬은 붉어진 하벨의 이마를 보며 낄낄 웃었다.
"그나저나 멍청아, 어떻게 가출했는데? 누가 도와줬어?"
"멍청이는… 솔직히 뺍시다. 저 소리는 처음이라 충격이 좀 큰데요?"
하벨은 진심을 털어놓았다.
지금 손이 떨렸다.
언젠가 한 번은 들어보고 싶었지만, 저 정도로 충격이 클 줄이야.
어쩌면 본능적으로 '멍청이'라는 말을 거부하는지도 몰랐다.
라르웬의 시선이 카샬에게 향했다.
"전 아닙니다."
"멍청이 카샬은 입 다물어."
"옙."
"그래서 누군데?"
라르웬은 아라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아까 전부터 하벨에게 달라붙어 있는 걸 보았다. 떼려고 했는데 해가 없는 걸 확인하고 내버려 뒀다.
참 묘한 생물이었다.
"날 도와줄 수 있는 건 정령뿐이잖습니까, 멍청아."
"보기보다 성깔이 좀 있네. 그런데 정령이 널 도와줄……."
라르웬이 멍청한 표정을 짓자 하벨은 보란 듯이 웃어주었다.
이제 멍청한 건 라르웬이었다.
"너… 너, 보여?"
"내 정령입니다. 이름은 아라죠."
하벨이 아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삐이잇!]
아라가 기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어, 어."
라르웬의 손가락이 하벨과 아라를 번갈아 가리켰다.
저게 정령이라고?
"보입니까? 이래서 내가 하벨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당분간은 비밀로 할 겁니다."
"딱히 비밀은 아니잖습니까. 이미 저랑 둘째 도련님이 알아버렸으니까요."
"두 사람이 입을 다물면 비밀이잖아."
장난기가 가득한 하벨의 미소에 카샬은 몸을 잠깐 떨었다.
단지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경고였다.
"…와."
라르웬이 자신의 목을 만지작거렸다.
"잠깐만, 잠깐만, 시간 좀 줘봐."
하벨은 라르웬을 봤을 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꺼냈다.
상대가 비틀거릴 때, 물어뜯어서 원하는 걸 쟁취해야지.
"암살자가 날 죽이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새끼를 검은 달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또?"
"하지만 나는 잡았죠."
"잡… 았다니?"
라르웬의 시선이 카샬에게 향했다.
"저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생각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벨은 코웃음에 라르웬은 당장 미간을 찌푸렸다.
"가출이 잘한 건 아닌데?"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둘째 도련님."
카샬은 당장이라도 손뼉을 마주하고 싶다는 심정으로 목소리를 냈다.
"가출 자체가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
"캬. 한마디, 한마디가 명필과도 같습니다."
카샬은 이어진 라르웬의 말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꼴 좋습니다'를 연발할 때보다 더 꼴사나워 하벨은 한쪽 눈을 찡그렸지만,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몸을 죽이려고 했던 암살자, 검은 달의 꼬리를 잡았습니다. 바로 뒷세계에서 말입니다."
"허어……."
라르웬은 황당함에 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눈에 뒹군 후유증으로 하벨에게 자아 혼동이 찾아왔는데, 그 자아가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아무래도 뒷세계도 손봐야 할 듯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가 얽혀 있더라고요. 겸사겸사 괜찮잖습니까?"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확실한 건 하벨의 모습을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었다.
진짜로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모습에 라르웬은 흔들리다 혼란함을 잠재우며 하벨의 생각을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안 말리십니까?"
"일단 들어보고. 지금 일이 들어오면 어쩔 수 없지만, 당분간은 집에 있을 생각이라 한가하거든."
강제로 하벨과 새롭게 시작하는 셈이니, 처음에는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시간이었다.
더불어 하벨이 정말 암살자를 붙잡았다면 뒷세계를 처단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고.
'안타깝구나. 나는 이제 이틀 됐다지만, 용왕이라는 묵중한 책임에서 벗어나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네요. 고작 이틀 됐지만, 일하지 않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거든요."
"그걸 백수라고 하지."
"나쁘지 않더라고요."
하벨이 실실 웃었다.
라르웬도 실실 웃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하벨이 하려는 것들을 '일'이라고 칭할 수 있는데.
"전 두 분이 부러울 뿐입니다. 월급으로 살아가는 놈의 마음은 모르시겠죠."
카샬은 시계를 확인하며 부러움을 털어냈다.
"듣자 하니 뒷세계에 주인이 바뀌고 그놈이 마법사를 고용했다고 합니다."
하벨은 물렁물렁해진 분위기 속에 화두를 던졌다.
페트리오도 당황했던 일이니 저들은 오죽할까.
실실 웃던 라르웬이 눈썹을 꿈틀거렸고, 카샬은 시계를 닫았다.
"마법사를 고용했다고? 이거… 이거 엄청 수상한 냄새가 흐르는데?"
라르웬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마법사가 정령사를 증오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아. 걔들은 여기 '에르티안' 왕국 말고도 놈들이 속한 나라 어디든 강제로 마법사라는 사실을 등록해야 해. 하지만 우리는 아니니 얼마나 질투가 나겠어?"
라르웬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입에 문 루룸을 내려놓았다.
하벨의 시선이 정확히 루룸을 향하자 라르웬은 속으로 놀란 감정을 삼켰다.
'진짜로 보이네?'
혹시나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닐까 싶었는데.
[저리 치워. 짜증…….]
라르웬은 하벨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루룸의 배를 간질였다.
금세 루룸의 얼굴이 행복하게 풀어졌다.
라르웬은 정령사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카샬을 바라보았다.
"도련님께서는 앞으로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합니다. 숟가락도 제대로 쥐지 못하십니다."
"숟가락질도 못 한다고? …상태가 많이 나쁘네."
"밥은 먹을 줄 압니다."
하벨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고민에 빠진 라르웬의 미간에 더 깊은 주름이 자리를 잡았다.
"이거… 심각하네?"
"됐고. 계속 설명해보십시오."
하벨은 카샬이 끼어들기 전에 라르웬을 재촉했다.
"일단 묻자. 얘가 정령이라고?"
[삐잇.]
라르웬의 손가락에 아라가 하벨에게 착 붙어 귀를 움직였다.
"그럼 뭡니까?"
"음… 아버지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어떤 형태도 없이 태어난 정령은 처음 보았기에 라르웬은 무어라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만약 정령이라면 저대로 계속 하벨을 좋아 해주면 좋으련만.
라르웬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정령사는 쉽게 말하면 선택된 자야. 무조건 정령의 손길에서부터 시작돼. 거기에서 깨우치거나 깨우치지 못한 자로 나뉘어."
"깨우친 자만 정령사가 될 수 있습니까?"
"일단은?"
마지막 가능성을 남기는 말에 하벨은 하벨 티에라는 하지 못했지만, 자신은 정령을 보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든, 정령사가 된 후에도 우리는 정령의 선택을 받아야만 해. 적어도 정령은 우리가 또라이 짓을 하게 두진 않아. 대부분은."
[또라이 짓이라니. 품위 없게. 당연한 소리잖아. 상도덕은 지켜야지.]
"들었어?"
루룸이 꺼내는 말에 라르웬이 물었다.
"들었습니다."
"저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마법사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거야. 분명 비슷한 능력을 쓰는 것 같은데 자기들은 차별하고 우리는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질투가 확실하네요. 음…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라르웬 형님. 형님까지 제대로 불러. 너는 내 동생이고, 티에라 가문의 막내니까."
라르웬은 '막내'라는 말을 강조했다.
"강합니까?"
"형님을 붙이라니까, 동생아."
순간 하벨은 울컥하려다 생각해보니 라르웬을 형님이라 불러도 될 듯했다.
'원래 세계에서 나이가 많다고 한들, 내가 이 세계에 온 날짜로 따져야 맞는 거겠지.'
이틀.
이게 현재 자신의 나이였다.
"강합니까, 형님?"
"음… 이 형님이 어디서 맞고 다닐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면 알아들으려나?"
"그럼, 됐습니다."
"뭐가 됐는데?"
"마법사와 정령사 사이도 잘 들었고, 수상하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럼, 같이 갑시다."
하벨은 씩 웃었다.
카샬만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황금이 알아서 또르르 굴러왔으니 손에 쥐어야지.
뒷세계의 주인, 뤤트로 목은 자신의 것이었지만, 그 외에는 아니었다.
누가 베든 일단 베기만 하면 충분했다.
"물론, 너도 카샬."
"제가 말리면 안 가실 겁니까?"
"여기랑 가까운데 뭐. 가기 싫으면 말고."
"저야 속으로 간절히 제발 저를 데려가 주시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몰래 나가셨다면 정말로 도련님이고 뭐고 뒷덜미를 잡고 끌고 오려고 했거든요."
이미 휘어 있는 카샬의 눈이 더 길게 휘었다.
"도련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다 베겠습니다."
"오. 이제야 집사처럼 보이네."
하벨은 자신의 손가락을 보다 엄지를 올렸다.
인간들은 이런 찬사를 보내곤 했다.
"하벨아."
라르웬이 눈을 깜박거리며 하벨을 불렀다.
"예. 말씀하시죠."
"이렇게 3명, 가자고?"
"뒷세계에 단순한 경고만 남기는 게 아닙니다. 뼛속까지 공포를 심어줘야죠."
하벨의 입가에 악동과도 같은 미소가 어렸다.
"우르르 몰려오는 것과 단 3명으로 뒷세계를 박살 내는 것 중 뭐가 더 무섭겠습니까?"
장난기가 한껏 담긴 그 제안에 라르웬과 카샬 역시 물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