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아리아나 영애가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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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회의가 있던 날로부터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제는 아버지가 시종들과 함께 남동생이 지낼 방을 만드는 것을 도와드렸고, 어제는 언제나처럼 방문하는 니콜라스 왕자의 상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오전 중에 외국어 수업을 전부 끝내고, 점심 이후로는 일정이 빌 예정이었습니다. 요즘 하지 못했던 독서를 하려고 하기 위해, 햇빛이 은은하게 드는 테라스에서 따뜻한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 중 한 권을 펼치는 순간,
“아가씨, 세이타리디스 후작 가문의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마리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서둘러 머리를 빗고, 드레스룸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 아리아나 영애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습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영애.”
제가 들어가며 인사하니, 아리아나 세이타리디스 영애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말 그대로 정말 갑작스럽긴 하네요. 매주 두 번째 요일이 빈다고 편지를 보낸 것이 3일 전이니까요. 그 서신은 아무리 빨라도 그제 저녁은 되어야 도착했을테고요. 받자마자 하루 만에 준비를 마치고 왔다는 게 되겠네요.
그만큼 니콜라스 왕자와의 혼약을 기대하고 있다는 거겠죠. 대의는 서두르는 것이 좋다고 하니 급하게 시작해도 나쁠 건 없겠죠.
하지만 그 전에,
“마리. 아리아나 영애와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나요?”
“알겠습니다.”
마리를 신용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곤란한 이야기니까요. 제1 왕자와의 약혼을 파기하려고 하는 공작 영애와 그것을 돕는 후작 영애라니, 정보상에게 팔면 금화 몇백 개짜리 정보일까요.
마리가 알면 곤란한 정보까지는 아니지만, 마리가 알게 되면 마리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정보니 퇴장시켜놓는 편이 마리에게도 좋겠죠.
아리아나 영애도 처음부터 시중을 들이지 않은 것 같네요. 마리가 나가고 단둘이 되니, 아리아나 영애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아그네스 님, 우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아리아나 영애?”
“무도회 때 있었던 일은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갑자기 아리아나 영애가 무릎을 굽히고 절을 했고, 예상치 못한 행동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아리아나 영애. 편지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아무런 응어리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그네스 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죄를 범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리석은 저를 깨닫게 하려고 아그네스 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고, 저를 위해 희생하게 하셨습니다.”
딱히 니콜라스 왕자를 양보하겠다는 건 희생하려는 게 아닌데……. 일단 이대로 두면 이야기할 수 없으니 달래야겠죠.
“아리아나 영애, 제 눈을 봐주세요.”
“…훌쩍.”
아리아나 영애가 부은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제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리아나 영애가 정말로 진심인 것 같으니 말씀드릴게요. 저는 원래부터 니콜라스 왕자는 제게 부담스러운 약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리아나 영애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우선 눈물을 닦고 자리에 앉아주세요. 예쁜 얼굴이 상하겠어요.”
손수건으로 아그네스 영애의 눈물을 닦았습니다. 아그네스 영애가 눈을 감고 제 손에 얼굴을 맡기는 모습이 다람쥐 같아서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님. 이 손수건은 제가 손수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괜찮아요. 안 돌려주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가보로 삼을게요!”
“아니……그냥 평범하게 사용해 주세요.”
손수건 본체도 별로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아그네스 영애를 자리에 앉히고, 맞은 편에 앉아서 마리가 내리고 간 로즈메리 차를 따랐습니다. 로즈메리는 심신안정에 효과가 좋은 허브니까요.
“드세요. 로즈메리예요.”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님.”
아리아나 영애가 따뜻한 로즈메리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진정되신 듯 얼굴을 편안하게 풀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언가 가져온 물건을 꺼냈습니다.
“우선 사죄의 표시로 갖고 온 물건입니다. 프레타리아에서 유명한 다과입니다.”
“한 번 열어봐도 될까요?”
화려하게 생긴 상자를 여니 안에 있던 것은,
“아, 이거!”
도넛이었습니다.
그것도 부드럽게 버터에 튀겨서 초콜릿 크림을 바르고 설탕 과자를 장식한 전생에 먹었던 가게에서 파는 도넛이었습니다.
“아그네스 님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이 세계에 있는 도넛이라고는 밀가루 반죽에 설탕을 섞어서 기름에 튀긴 딱딱한 도넛만 있는 줄 알았는데!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친구를 만난 기분이라 감동이 벅차오르네요.
하지만 전 이 세계에서 도넛이 어떻게 불리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잘 모른다고 대답해야겠죠.
“이름은 잘 모르지만, 외국에는 버터로 튀긴 케이크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인지도 몰라서 어떤 맛인지 상상만 했습니다.”
“프레타리아에서 케이부티루라고 불리는 과자입니다.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먹는 방법은 조금 예의에 어긋나지만, 손으로 초콜릿이 묻지 않은 아랫부분을 살짝 잡아서, 입으로 조금씩 배어드시면 됩니다.”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죠! 오히려 도넛을 그렇게 먹는 법 이외의 방법이 또 있을까요.
“아리아나 영애, 저……실례되는 행동이지만…….”
공작 영애로서 굉장히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미 제 머릿속은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상태였습니다.
“1개만 이 자리에서 먹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아그네스 님. 6개 전부 지금 드신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리아나 영애, 얼마나 착한 아이인 거죠? 손님을 앞에 두고 선물 받은 음식을 자리에서 먹어버린다니, 품위와 교양을 의심하게 할 만한 행동이었지만 얼마 만에 만난 도넛 앞에서는 자제할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도넛의 아랫부분을 잡고, 초콜릿 부분과 빵 부분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도록 베어 물었습니다.
부드러운 빵의 감칠맛과 달콤한 초콜릿 크림이 어우러져 입안에서 달달하게 섞여갑니다. 이 식감, 이 맛, 정말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네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다가,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에 있는 도넛 1개를 다 먹은 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칠칠찮은 모습을 보였네요.”
“아니요, 정말 귀여우셨어요.”
“귀엽다니요…….”
맞은편에서 싱글싱글 미소를 짓는 아리아나 영애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마 지금 제 얼굴은 틀림없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겠죠.
“어쨌든, 오늘의 의제로 들어가도록 합시다. 아리아나 영애는 혹시 질문이 있으신가요?”
니콜라스 왕자가 좋아하는 것은 뭔지, 이성 취향은 어떤지, 싫어하거나 꺼리는 것이 있는가에 관하여 물어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아나 영애는 상정 외의 질문을 했습니다.
“아그네스 님은 프레타리아어를 하실 줄 아시나요?”
“네? 저요?”
“네, 아그네스 님이요.”
어째서 니콜라스 왕자가 아니라 제가 프레타리아어를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일까요. 뭔가 의문은 들었지만 성심성의껏 대답했습니다.
“프레타리아어는 간단한 인사말과 자기소개 정도만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안에서는 스타렌스어를 우선해서 배우니까요.”
“그렇군요. 스타렌스도 좋은 곳이죠.”
제가 프레타리아어나 스타렌스어를 할 수 있는지가 니콜라스 왕자를 유혹하는데 관계가 있는 걸까요.
“제가 프레타리아어를 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가요?”
“그렇게 중요하진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알고 있으면 더 좋으실 테니까요.”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그네스 님은 후에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되실 테니까, 가능하면 그 나라 언어를 알고 있는 게 좋으니까요. 프레타리아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타렌스도 고려해 봐야겠네요.”
뭔가 이야기가 맞물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제가 후에 외국에 나가서 살게 된다……아!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에서 아그네스 영애는 니콜라스 왕자가 공략당했을 때 국외로 추방된다는 설정을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을 포함한 니콜라스 왕자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을 집요하게 괴롭혔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나라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 스토리였죠, 분명.
아리아나 영애의 통찰이 날카롭습니다. 확실히 니콜라스 왕자는 제가 ‘국외 추방을 당할 정도의 잘못’ 정도는 일으키지 않는 한 약혼을 파기하지 않겠죠. 아리아나 영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이 니콜라스 왕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파혼한 뒤의 제 안위를 먼저 생각해주고 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는 걸까요.
“저희 집안은 상업 가문이니까, 저도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아그네스 님이 나중에 편하게 사실 수 있도록 여건이 되면 외국에 토지를 사서 별장을 지어 놓을 생각입니다. 아그네스 님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몸만 와도 될 정도로요.”
“아리아나 영애,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말씀해주세요. 혹시 프레타리아나 스타렌스가 아닌 다른 나라가 좋으신가요?”
“아리아나……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네! 네! 부디 그렇게 해주세요, 아그네스 님!”
아리아나……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기분이네요.
“고마워요, 아리아나.”
“저도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님.”
그 이후로는 아리아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최종적으로는 프레타리아로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리아나가 프레타리아에 방문한 적이 많고, 언어는 제가 배우면 되는 것이니까요. 프레타리아에서 도넛을 판다는 것도……아주 약간 의사 결정에 영향을 끼치긴 했고요.
“그럼 다음 주 두 번째 요일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아리아나가 떠나가면서, 오늘의 급작스러운 손님맞이는 끝이 났습니다.
……근데 다음 주에도 오시는 건가요? 설마 매주 두 번째 요일이 빈다고 적었던 것을 매주 방문해도 된다는 것으로 해석한 건……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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