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시비를 걸었습니다
* * *
인사를 마치고 주위를 보니 사용인들이 말을 잃고 제 쪽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용인들에게는 귀족 영애다운 예법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기도…….
반면에 부모님은 '역시 우리 딸이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신데, 이건 이것대로 부담스럽네요.
“서, 성대한 환영에 감사합니다. 아그네스 아,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 호의에 감사하며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니콜라스 왕자 측은 긴장해서인지 살짝 말을 더듬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아무리 고등교육을 받는 왕자라고 해도 일곱 살의 나이라면 당연히 보이는 모습이죠. 저도 일곱 살이지만, 전생의 나이까지 합하면 니콜라스 왕자를 훨씬 웃돌고 있구요.
저와 니콜라스 왕자의 인사가 끝난 뒤, 부모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의도로 각자의 전속 사용인과 왕자와 저만 응접실에 데려다 놓고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물론 부모님의 의도대로 얌전히 사이가 좋아질 생각은 애초부터 하고 있지 않지만요. 지금부터 철저하게 왕자에게 시비를 걸고, 최악의 첫인상으로 남아 관계를 파탄낼 예정입니다.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영애, 오늘 저희를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다가 방금의 그 인사말도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지금까지 만난 귀족 자제분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사말이었습니다.”
“저희 둘만 있는 자리에서는 격식 차리지 않도록 하죠. 보아하니 아직 니콜라스 제1 왕자님께서는 예의범절이 어색하신 모양이니까요. 그리고 저희 마리···사용인은 입이 무겁기도 하고요. 그쪽의 집사분도 니콜라스 왕자님의 전속이신 것 같은데, 왕자님의 사생활을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닐 위인은 아니시죠?”
“물론입니다.”
우선 첫 번째, 은근슬쩍 방금 니콜라스 왕자의 실수를 지적하고, 제 본래 오만했던 시절 모습을 살짝 해방해서 왕자에게 정이 떨어지게 만들어서 첫인상을 비호감으로 만드는 작전입니다.
전생에서 배운 지식에 의하면,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인상입니다. 사람에 대한 호감도의 약 80%는 첫인상에서 그대로 이어진다고 하니까요. ‘나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어!’ 같은 극적인 이미지 변화는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거든요. 만나자마자 본인을 험담하고 잘난 척을 하는 인상을 심어줘서 비호감 이미지를 만들어줍시다.
“공작 영애치고는 꽤 오만하시네요. 앙겔로풀로스의 방침인가요?”
가정교육을 어떻게 배운 거냐, 라고 말씀하고 계시네요. 니콜라스 왕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작전은 순조로운 느낌이네요.
“당연하죠. 전 이미 공작 영애로서의 수준은 충분히 달성하고 있으니까요. 예의, 사교댄스, 교양, 스타렌스어 정도는 이미 어지간한 귀족의 수준을 웃돌고 있습니다.”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앙겔로풀로스는 후계의 교육에 열정적인 가문이니까요. 어머님 아버님은 교육 시간이 아닐 때는 최대한 편의를 봐주시지만, 공작으로써의 지식을 갖추는 것에는 엄격하십니다. 스타렌스어를 배우는 중에 운 적도 있었지만, 그때도 아버님은 엄격하게 대처하셨습니다. 물론 교육이 끝난 후 아버지가 잔뜩 달래주시긴 했지만요.
그렇기에 일부러 잘난 척을 더 해서 밉상으로 보여야겠죠. 물론 왕자가 더 고등교육을 받은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게임에서는 어린 나이에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한 천재 왕자라는 설정이 붙어 있고, 단순하게 생각해도 왕가에서의 교육이 공작 가문에서보다 많은 것은 상식이니까요. 더 우수한 교사도 많이 붙어 있을 테고요.
“하지만 정치, 군사, 과학, 경제, 프레타리아어에 관한 지식은 아직이겠죠?”
“어머, 그건 마치 왕자님께서는 깨우치고 계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당연합니다. 물론 아그네스 영애분이 아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 지식의 깊이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방금은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을 뿐입니다.”
~아스토리아~에서 니콜라스 왕자는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니 이렇게 잘난 척을 해 두면 당연히 부정하려고 하겠죠.
“그렇다면 스타렌스어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인연을 만나다’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아시나요?”
조금 놀리는 어투로 니콜라스 왕자에게 다소 어려운 문장을 번역하게끔 시켜보았습니다.
“‘사틱 카두 네가이디타 비에타’ 맞습니까?”
“흐응,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역시 니콜라스 왕자,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모법 답안을 보여주시네요. 하지만 그 대답에 대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이번에는 왕자 쪽에서 제게 문제를 냈습니다.
“제 차례입니까? 아그네스 영애는 ‘아는 척 밖에 할 줄 모르는 멍청이’를 프레타리아어로 말할 수 있으십니까?”
이 왕자 예상했던 것보다도 자존심이 엄청나게 강합니다. 일부러 제가 배운 적 없는 프레타리아어 질문을 하고, 게다가 번역하라고 건넨 예문도 감정이 실려 있네요.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작전을 위해서는 아는 문제가 나왔더라도 일부러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뭐죠?
“이 정도도 모르십니까? 아그네스 영애도 ‘에나스 일리디오스 포우 제레이 포노 포스 나 프로스피이테’ 이신 모양입니다.”
일부러 프레타리아어로 모욕하다니! 저건 누가 봐도 예문을 프레타리아어로 번역한 것 아닌가요! 의도한 것인데도 분할 정도로 자존심이 상하는데요!
하지만 여기서 감정을 조절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음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해서 화를 식히고, 비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일곱 살인데도 대단하시네요.”
“······대단하다고요?”
“네, 대단하세요. 고작 일곱 살의 나이인데도 나라의 국운을 이끌 수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시네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전 외국어를 배울 때 너무 어려워서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왕자님은 제 배 이상의 지식을 배웠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네요.”
다음 작전은 비꼬면서 말하는 작전입니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는 식으로요. 실컷 잘난 척을 하고 비아냥대다가 자신이 이길 수 없을 것 같을 때는 감정적으로 변해서 비난할 때, 남자들은 정말 싫어하니까요.
“감탄스럽다니, 저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는 물론 왕족 앞에서도 당당한 영애분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전 왕자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충분히 당당할 자격이 있으니까요. 겨우 일곱 살에 예의 사교댄스 교양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 자체만으로 저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백작 가문의 영애는 저와 같은 나이에서 2가지라도 배웠을지 모르겠네요. 자작 가문은 어떨까요? 남작 가문은 어떨까요? 서민의 아이라면 7살의 나이에 글이라도 읽고 쓰면 대단한 정도지요. 오히려 왕자님은 저보다도 오만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오만해지라는 말입니까?”
“제1 왕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지만, 일곱 살은 아직 한참 어린 나이잖아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실패해도 괜찮고 어떻게 만회해야 하는지 알 기회가 주어지는 나이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아무것도 아닌 겨우 일곱 살의 대외적인 이미지에 치중한다면, 남들에게 군림했을 때는 실수한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어요? 지금 시기가 오만하고 뻔뻔해질 수 있는 마지막 시기라고 생각하네요. 왕자님을 아무도 지적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게다가 저의 이런 성격은 당연하다는 식의 책임회피 발언까지 해봅니다. 같은 일곱 살인 니콜라스 왕자가 듣기에는 분명 코웃음이 나오는 핑곗거리겠죠. 이 발언으로 니콜라스 왕자는 제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겁니다.
“일곱 살이 실패해도 괜찮은 나이라니, 전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왕자는 그 얘기를 하더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제 마무리 일격을 넣으면 끝나겠네요.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전 좀 더 당당하고 일곱 살 다운 뻔뻔함을 가진 사람이 취향이니까요. 니콜라스 제1 왕자님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담을 수 없는 여자는 싫어하시죠? 오늘 약혼 얘기는 왕자님께서 잘 말씀해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게요.”
에둘러서 완벽한 거절을 하면서도 마치 약혼 파기의 선택권을 왕자에게 주는 듯한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약혼이 파기되었을 때 제 책임은 전혀 없으니까요. 제가 생각해도 정말 완벽한 설계가 아닐까 싶네요.
“아그네스 공작 영애, 헤어지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들어보고 결정하죠.”
“만약 제가 왕이 되어 모두가 제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릴 때도, 당신은 제가 잘못했을 때 지적할 수 있으십니까?”
이 질문은 테스트네요. 저를 니콜라스 왕자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테스트가 틀림없습니다. ~아스토리아~에서 니콜라스 왕자는 자신의 손아귀에 모든 것을 쥐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여기서의 대답으로는 최대한 반항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게 좋겠죠.
“당연하지 않나요? 전 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이상한 질문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어째선지 니콜라스 왕자는 웃음을 짓더니 만족스러운 얼굴로 응접실을 나갔습니다. 더 들어볼 가치가 없다는 데서 나온 비웃음일까요. 일단 이것으로 어찌어찌 해결된 것 같네요.
“왕자님의 표정을 보니,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 같네요.”
“당연하죠, 마리.”
서희도 울고 갈 정도로 완벽한 약혼 파기 담판이었습니다. ······분명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왕가로부터 제 앞으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아그네스 님. 왕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읽어 보시겠습니까?”
아마 저번 약혼 관련해서 결과를 보낸 서신이겠죠. 니콜라스 왕자를 실컷 약을 올리고 무례하게 굴었으니 결과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테고, 이대로 ~아스토리아~의 줄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퇴장새서 적당히 후작이나 백작 영식과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지내면 되겠죠. 전생에서는 평생 공부만 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했으니까, 이 정도 행복은 누려도 되지 않을까요?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마리가 읽어주세요.”
마리가 봉납이 된 봉투를 정성스럽게 열어 서신을 꺼내고, 내용물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아하고 의연한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에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드리고 싶지만, 바쁜 관계로 이렇게 편지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입니다. 닷새 전, 아그네스 영애와의 만남과 약혼에 관하여 이야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아그네스 영애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영애분 중 가장 지혜롭고 곧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아그네스 영애보다도 교양이 많거나 친절한 영애는 있었지만, 아그네스 영애만큼 왕비의 자질을 보여주신 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아그네스 영애를 제 약혼자로 공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아직 제가 부족하여 아그네스 영애의 눈에 차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그네스 영애를 점차 알아가며 당신에게 걸맞은 약혼자가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당신의 약혼자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라고 적혀있습니다. 아그네스 님이 말씀하신 대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네요. 경하드립니다, 아그네스 님.”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