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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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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이제 반년 정도만 더 버티면 이 고등학생 생활이 끝이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자전거에 몸을 실었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여고생. 공부를 엄청 잘하지는 못하지만, 최근 6월 모의고사에서 나온 성적 대로라면 원하는 대학에 아슬아슬하게 붙을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자전거를 타다가, 집과 학교의 중간에 있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이 언덕을 '분기점'이라고 부르는데요. 집과 학교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 언덕을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사이를 기점으로 제 기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 큰 이유입니다.
높지는 않은 언덕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의 체력으로는 페달을 밟아 올라가기엔 힘들겠죠. 그래서 자전거에서 내려 5분 정도는 끌고 올라가야만 합니다.
등하굣길에 언덕이 있으면 자전거를 타는 대신 걷거나 버스를 타는 것도 좋지만, 사실 제가 자전거를 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언덕입니다. 언덕의 정상에 다다른 뒤 다시 자전거에 타서 올라온 길의 반대쪽으로 페달을 살짝 밟으면,
“하아아아아~!”
언덕의 경사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는 자전거에 몸을 맡겨, 정면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내려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해방감과 긴장감이 제가 자전거를 끌고 기꺼이 올라가는 이유라고요! 언덕으로 올라오는 고생은 물론이고, 수험 스트레스까지 날려버리는 이 상쾌함이 좋으니까요.
물론 이대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항상 언덕 중간에서 브레이크를 조금씩 밟습니다. 이대로 내려가면 왕복 8차선 도로인데, 제 정신인 사람이라면 이 속도로 그 큰 도로에 자전거로 진입할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평소처럼 브레이크를 조금씩 잡으려고 했는데,
“……어?”
브레이크가 양쪽 다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었는데, 갑자기 망가져 버린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양쪽 다 망가져 버려서 자전거의 속도는 줄지 않고 점점 가속되기만 하는데……이거 조금 위험한 거 아닌가요?
고민하는 사이에도 자전거는 빠르게 미끄러졌습니다. 언덕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자전거를 억지로 넘어뜨려서 멈추기로 결정하고, 핸들과 몸을 오른쪽으로 급하게 틀었습니다. 자전거가 균형을 잃고 아래쪽으로 넘어지고, 저 또한 자전거와 함께 언덕 아래쪽으로 구르며 떨어졌습니다.
“아야야…….”
팔꿈치와 무릎에 제법 큰 까진 상처가 생기는 느낌이 났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겠죠. 무사히 자전거를 멈췄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빠아아아아앙!』
어느새 차도에 진입해버린 저를 향해서, 화물차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부딪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 의식이 깜깜해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 이름은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현재 일곱 살. 앙겔로풀로스 공작의 외동딸입니다.
어렵게 얻은 유일한 자식이라서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으며 자랐고, 그 결과 뻔뻔하고 오만하게 자랐습니다. 메이드들에게는 소리를 지르고, 집사들에게는 제멋대로의 심부름을 시키고, 싫어하는 요리가 나오면 요리사에게 짜증을 내는 성격의 아가씨라고 설명할 수 있겠죠.
“아가씨, 마리입니다. 일어나셨나요?”
“네. 방금 막 일어났어요.”
“그럼 몸단장을 준비해드려도 될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문이 열리고 전속 메이드인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제 아래에서 2년이나 근무하고 있는 베테랑 메이드입니다.
“…….”
……어째선지 방으로 들어온 마리가 말없이 저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데요.
“왜, 왜 그러죠, 마리?”
“평소와는 조금 다르신 것 같네요. 일찍 일어나시고, 짜증 안 내시고, 소리도 안 지르시는 모습이요.”
“아.”
그랬었죠. 아침의 저는 항상 늦잠꾸러기에, 무단으로 방에 들어온 마리에게 소리를 지르고, 억지로 깨워져서는 짜증을 내는 시끄럽고 건방진 아가씨니까…….
“아, 그건, 어…….”
큰일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마리는 제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버린 모양입니다. 하지만 원래대로의 오만하고 이기적인 아그네스 아가씨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니, 18살이나 살아왔던 기억이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마리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좋은 모습이시네요. 아가씨도 슬슬 바뀌시려고 하는 거죠?”
“아, 네. 그래요! 저도 앙겔로풀로스 공작의 영애로서 언제까지나 어리광만 피울 수 없으니까요.”
마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넘어갔습니다.
“오늘은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왕자님과 처음으로 만나는 날이니까요. 변하기로 마음먹기에는 가장 좋은 날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요. 첫인상은 중요하니까요.”
공교롭게도 오늘은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가 저희 앙겔로풀로스 가문에 방문하는 날이네요. 니콜라스 왕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성격이 바뀐 핑곗거리로 사용하도록 하죠.
니콜라스 왕자가 방문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목적 없는 방문이 아닙니다. 제1 왕자와 나이가 비슷하고, 가문의 위상도 높은 제가 니콜라스 왕자의 약혼자로 적합한지 알아보기 위한 방문입니다.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입니다만……물론 제1 왕자이니 언제든지 들을 기회야 있었겠죠? 하지만 어째선지 굉장히 불길하고 음험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제 이름인 아그네스도 어디선가……아!
“마리? 제가 열네 살이 되면 들어가게 되는 학교의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아스토리아 왕립학교입니다.”
그 이름을 듣고 나니 확신이 생겼습니다. 이 세계는 여성향 게임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의 세계입니다.
『사랑과 운명 ~아스토리아~』. 전생의 여성향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이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3만 장 정도가 팔린 게임으로, 대흥행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매니아 팬층이 많은 게임입니다.
그 이유는 이 게임의 엔딩 장면에 있습니다. 이 게임에는 각 캐릭터별로 공략에 실패했을 때 공략 대상이 라이벌 영애와 결혼한 뒤 단죄하는 연출이 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심한 캐릭터는 메인 공략 대상인 니콜라스 제1 왕자로,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는 스트레스와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위압감으로 인해 남들 앞에서는 가면을 쓴 듯 웃음을 잃지 않지만, 이면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디스트로 성장하는 인물입니다.
대표적인 단죄 연출은 거꾸로 매달아 채찍으로 때리거나, 가시가 박힌 침대에 눕혀서 촛농을 떨구거나, 손톱 밑을 바늘로 파고드는 등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고 참혹한 고문을 즐긴다는 게 특징일까요.
이 단죄 연출은 아마 라이벌 영애들에게 벌을 주겠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긴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라이벌 영애들의 단죄 장면이 어울린다면서 매니아 팬층을 불러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의 라이벌 영애가 바로 저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 공작 영애라는 것인데……가장 큰 문제는 제가마조히스트가 아니라는 거죠.
매일 밤 육체적인 고통이 가득한 고문과 사랑이 없는 상대의 매도를 받는 것은 절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아스토리아~를 플레이하면서 아그네스가 니콜라스에게 당하는 모습으로 몇 번이나 돌려보지 말 걸……아그네스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저에게 내려진 처벌인 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게임대로라면 약혼은 성사될 가능성이 크고……억지를 부리면 약혼이 취소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저희 앙겔로풀로스 공작의 위신이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저를 길러 주신 이쪽 세계의 부모님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단 이 작전은 일단 보류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죠.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 측에서 제게 정이 떨어져서 스스로 약혼을 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행히 원작 설정에서 니콜라스는 아그네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아그네스가 왕자의 외모에 반해 떼를 부려서 성사시켰다고 했으니, 원래부터 호감도가 낮은 왕자를 상대로 일부러 왕자를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거나 말꼬리를 잡으며 약을 올리고 친목을 거부하면 왕자 측에서 이미 약혼을 거절해주겠죠!
“아가씨,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마리의 부름에 방에서 나온 저는 홀에 나와 부모님 사이에 나란히 섰습니다. 니콜라스 왕자와 그의 전속 집사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귀빈을 맞이하는 십수 명의 사용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니콜라스 왕자는 역시나 어린 모습으로도 잘생긴 아우라를 뽐내고 있네요. 반짝반짝한 금발에, 바다처럼 맑고 깊은 파란색 눈동자, 그리고 천사와도 같은 생긋생긋한 미소에서 대놓고 잘생기게 만드려고 했던 제작진의 의도가 보이네요.
전생에서 게임으로 플레이했을 때부터도 ~아스토리아~ 공략대상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외모였습니다. 그것을 게임 내에서 이미 왕자에게 반해있는 캐릭터의 시선으로 보니 더욱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게다가 게임에서는 회상으로 한두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일곱 살의 왕자 모습을 실시간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다니……헉! 위험했네요. 하마터면 약혼 파기고 자시고 저 외모에 그대로 넘어갈 뻔했네요.
정신차려야죠. 저 왕자는 10년만 지나면 극악의 사디스트 왕자로 진화하니까요. 아그네스를 고문하는 니콜라스 왕자의 회상 장면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힙시다.
“평안하신지요, 니콜라스 알렉산드로스 제1 왕자님, 아그네스 앙겔로풀로스입니다. 오늘은 저희 앙겔로풀로스 공작가에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실 테니 아무쪼록 계실 동안 자유롭게 지내주시길 바랍니다.”
실수할 수도 있기에 당주인 아버님이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희 가문에서는 실패해도 괜찮으니 이번 기회에 사교계의 예절을 실천해 보라는 아버님의 말씀에 제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다행히 귀족 예법은 틀리지 않았네요. 원래부터 아그네스가 받아왔던 교육도 있고, 전생에서 했던 다양한 여성향 게임의 경험 덕에 자연스러움 문장으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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