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카펠라의 마탑
* * *
발 쪽으로 마기를 모으자 몸이 전체적으로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왕의 말대로 아직 마기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던 것 같다. 혈관에 피가 아니라 날카로운 칼날이 흐르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이 멍청이가 사용하지 말랬더니.]
“그래도 한 달이나 기다릴 시간은 없어.”
그동안 이자벨라가 어떠한 짓을 당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지금 애런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구해주고 싶었다.
[인간의 말 중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초조함에 일을 서두르다 그르치지 마라.]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당장 가브리엘이라는 놈이 얼마나 괴물인지는 너도 봤을 것 아니냐. 한 달 정도로는 그 녀석을 이기지 못한다. 너도 잘 알 텐데.]
도로시를 데리고 도망칠 때의 가브리엘이 떠올랐다. 순백의 날개 6장을 펼친 가브리엘은 두 성녀의 신성 마법으로 몸을 강화했는데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자는 전생 용사의 애런의 힘에 가까운 괴물 같은 힘이었다.
이 평범한 몸으로 그런 강함을 얻을 수 있을까. 애런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만 하고 있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강해지기 위해서 마법을 배우려는 것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콰앙! 충분히 마기를 모으고 도약했다. 카펠라가 있는 정상까지 올라간다면 좋겠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방어막...!”
낮게 깔려있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자 투명한 방어막이 보였다. 그걸 보고 미호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쾅!! 방어막과 애런의 몸이 부딪쳤지만, 다행히 충격은 없었다.
방어막은 고무처럼 주욱 늘어나 애런을 집어삼켰다. 투웅. 그리고 다시 뱉어냈다. 애런은 방어막에 튕겨나 빠른 속도로 다시 땅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아!!”
“애런 님?!”
도로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애런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걱정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애런의 몸 상태로는 대처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 저럴 줄 알았지.”
이런 일이 될 줄 알고 있었던 미호는 아무렇지 않게 애런을 받아내기 위해서 영창을 했다. 하나 남았던 꼬리가 사르르 사라졌다.
“oouega jawoo luouega.”
빠르게 떨어지던 애런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1m 정도 둥실 떠올랐다. 미호가 손가락을 튕기자 툭 떨어졌다.
“악!”
“엄살이 심하군.”
낮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등을 부여잡고 인상을 찌푸린 애런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알겠지? 억지로 마탑을 올라가는 것은 무리다.”
“확실히... 힘들 것 같네.”
미호는 애런의 등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 주고 자연스럽게 자기 자리를 찾아가듯 등에 업혔다.
“아니, 왜 업히냐.”
“네놈을 구하느라 마나를 다 써버렸다. 이제 몸이 움직이지를 않아.”
“그런 거라면 아픈 애런 님한테 업히지 말고 저한테 오세요.”
도로시가 등을 내어주었지만 미호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네가 말했잖느냐. 사람이랑 접촉하는 게 두렵다고. 이제 사이 좋게지내야할텐데 네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하지 않겠다.
“지, 지ㄹ…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얄밉게 웃으며 말하는 미호를 보고 성녀답지 않게 나올 뻔한 욕을 참았다. 사이좋게 지낼 생각도 없고, 싫어할 만한 짓만 골라 하는 주제에… 오래 살아서 뻔뻔함만 늘어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뭐,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는 애런은 성치 않은 몸으로 미호를 업어서 카펠라의 마탑으로 걸어갔다.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며 낼름 혓바닥을 내미는 여우의 대가리에 주먹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건 애런이 없을 때 하자며 뒤로 미뤘다.
“그보다 미호, 너도 마탑주인데 네가 카펠라에게 만나자고 하면 되는 것 아니냐?”
“잘 물어봤다.”
미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펠라, 고 계집애는 나를 싫어한다. 아니, 애초에 나를 좋아하는 마법사가 적기는 하다만… 그 녀석은 나를 남들보다 더 싫어한단 말이지. 뭐, 마족처럼 생겼다고 해서 싫어하는 모양이던데, 그런걸로 따지면 너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너도 내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눈빛이 살벌했으니 말이다.”
“그럴 만도 하지.”
그녀는 애런과 같이 마왕을 토벌하러 갔을 때, 미호와 같은 짐승의 형태를 한 마족도 많이 보아왔다. 평범한 마족보다도 몸놀림이 재빠른 수인은 카펠라의 마법을 피하고 몇 번이나 위기로 몰아갔다. 그러니 미호를 경계하고 싫어하는 것을 애런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 녀석을 찾아왔다고 한다면, 몇 년을 기다리더라도 만날 수 없을 거다.”
“왜 그걸 아주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건가요…?”
“외견 때문에 혐오를 당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나? 불쌍하지 않나? 더욱더 나를 못 버리지 않겠나?!”
너무 노골적으로 애런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것에 도로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다니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대마법사라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해서 애런 님에게 붙어있고 싶나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미호는 피식 웃으며 뻔뻔하게도 모르쇠로 일관했다.
“도착했네요.”
애런의 말에 서로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고 있던 미호와 도로시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건 또 새로운 광경이네요.”
카펠라의 마탑 1층은 마치 작은 우주였다. 외부는 회색 벽이었던 것에 비하면 내부는 검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작은 별들이 공중을 떠돌아다니며 광원 역할을 하였다.
“마탑은 마탑주에 따라 제각기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카펠라 녀석 같은 경우는 우주와 관련된 마법을 사용했으니 마탑도 그 영향을 받은 거지.”
“잘 아네.”
“베네쿠스에서 지내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들이지.”
도로시는 입을 벌리고 낮게 떠 있는 별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아, 그거 만지시면 안 돼요!”
그때 긴 흑발을 땋고 안경을 쓴 남자의 로브에서 빠져나온 손이 도로시의 팔을 잡아서 그걸 말렸다. 도로시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리고 남자의 손을 쳐내자 남자가 들고 있던 책이 우르르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멋대로 여성의 몸에 손을 대서 불쾌하신 것은 분명 제 잘못이지만, 그걸 만지면 위험하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떨어진 책을 주우며 말했다. 도로시도 쪼그려 앉아 책을 주우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손을 쳐낸 이유는 불쾌해서가 아니라, 말 못 할 다른 이유가 있거든요. 여기요.”
“감사합니다.”
“혹시 이 마탑 소속의 마법사이신가요?”
애런은 로브를 입고 나 마법사예요 라고 티를 내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맞아요. 에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등에 업혀계신 분은 몸이 조금 작아지기는 하셨지만, 미호 님이 아니십니까?!”
“쉿. 조용하거라! 그걸 말해봤자 지금은 좋은 것 없느니라.”
미호는 누가 들었을까 봐 주위에 있는 마법사들을 둘러보며 에즈라를 조용 시켰다. 그러나 에즈라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다른 마법사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오랫동안 행방불명이 되어서 다들 죽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대마법사나 되시는 분이 그리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에에잇… 애런, 이 녀석의 입을 좀 막거라.”
결국 흥분한 에즈라의 입을 막고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아픈 상태였는데, 끌려가는 에즈라의 몸부림은 그걸 더 악화시켰다.
‘망할 마기… 마왕만 봉인하지 않았더라면.’
[허어… 이제는 무슨 일이든 내 탓을 하려는 셈인가?]
….
“미호 님 어떻게 되신겁니까?”
마탑의 구석에서 에즈라가 물었다.
“잠깐 여행을 다녔다.”
“허어…”
제자에게 습격을 당해 도망쳤다는 걸 사실대로 말하기는 창피했는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미호를 벌레보듯이 도로시가 쳐다봤다.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거라!”
“여행을 마치고 다시 마탑주가 되기 위해서 베네쿠스로 돌아오신 거군요!”
“아, 아… 아직은 아니다. 이자들과 여행을 하는 도중에 잠깐 들린 것뿐이다.”
마나 회복 기관인 여우 구슬이 없어서 애런이 없으면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는 미호는 당연히 마탑주로 되돌아 갈 수가 없다. 그 자리는 이론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 남들과 궤를 달리하는 실력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우 구슬을 되찾을 때까지는 여행을 다닌다는 설정인가…’
거짓말이 능숙한 것도 오래 살아왔기 때문일까. 애런은 그리 생각하며 미호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미호, 에즈라한테 빨리 카펠라를 만날 수 있냐고 물어봐 줄래? 너를 따르는 것 같으니까 긍정적으로 대답해줄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여행을 하느라 바빠서 그런데 카펠라와 빠르게 만나볼 수 있겠느냐?”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에즈라는 노트를 꺼내서 휙휙 넘기며 카펠라의 일정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당장 비울 수 있는 약속은 일주일 후에 있기는 합니다만… 제가 단언할 수는 없고, 카펠라 님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 그럼 물어봐 주겠나?”
애런은 그것만으로는 미호와 사이가 좋지 않은 카펠라가 만나주지 않을 것이리라 생각했다. 운 좋게 기회가 생긴 지금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서 한 마디를 더 붙였다.
“혹시 카펠라 님에게 이 말도 전해주실 수 있나요?”
“이상한 것만 아니라면요.”
카펠라에게 자신이 전생 용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말이지만, 남이 들었을 때는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내 바지에 저질렀던 일을 알고 있다고 전해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에즈라는 의미를 모르겠는 애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트에 필기하고 돌아갔다.
“애런 님, 아까 하신 말은 무슨 뜻인가요?”
“무슨 암호인 거냐?”
도로시와 미호가 방금 한 말에 관해서 물어봤지만, 애런은 어깨만 으쓱할 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죽을 때까지 묻어두기로 카펠라와 약속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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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정상, 카펠라의 넓은 방은 책과 서류가 가득했으며 벽에는 거대한 시계가 걸려있었다.
“오늘 행방 불명이 되었던 미호 님이 베네쿠스로 돌아오셨습니다.”
카펠라는 잠깐 눈썹을 치켜떴지만,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서류 작성을 이어갔다. 싫어하는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든 말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카펠라 님을 만나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 100년 후에 만나는 거로 해둬.”
몇년만에 돌아온 것이지만 미호를 대하는 차가운 태도는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에즈라가 남은 말을 전했다.
“같이 온 일행분 중 한 명이 카펠라 님에게 전해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또 만나 달라며 덧댄 말이겠지.”
“그게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내 바지에 저질렀던 일을 알고 있다고 전해달라고만 했습니다.”
뚝. 카펠라가 쥐고 있던 펜이 반으로 부러졌다. 흥분했는지 꽉 쥔 주먹은 떨리고 있고 얼굴은 붉어졌다. 하지만 에즈라는 왜 그러는지 묻지 않았다.
“정말 그 사람이네.”
이때까지 꽤 오랜 시간 카펠라의 곁에 있었지만, 본 적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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