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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 용사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47화 (47/92)

〈 47화 〉 미호

* * *

“에잇… 하여간 인간들이란 은혜를 베풀어줘도 갚을 줄 모르는 족속들이라니까.”

미호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리며 걸었다. 흥분해서 씩씩 들이쉬는 숨에 따라 어깨가 들썩이고, 꼬리는 산만하게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식을 알려주지 않는 거다… 그렇게 은혜를 저버리고 갚지를 않으니까. 근성이 있는 녀석이라면 싫어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미물에게까지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좋아한다.

그런 의미에서 애런은 꽤 마음에 드는 사내였다. 제1 사도를 상대로 비극적인 운명을 사는 성녀를 구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무법지대에서 보잘것없는 미물이었던 여우를 돌봐주었다.

그래서 기껏 마법을 알려주려고 했더니, 제자에게 당해버린 주제에. 라고 말하며 거절을 해버리다니. 내로라하는 대마법사들도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왔는데, 마법도 쓰지 못하는 녀석이 내 가르침을 거절해?

미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덩치 큰 사내가 길을 막아섰다. 미호는 사람을 피해서 걸어가려고 했으나,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사내가 몸을 움직이며 길을 막았다.

“뭐야.”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일부러 길을 막는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하네. 조금 작아지기는 했어도 악덕 마탑주다.”

“응?”

눈앞에 있는 사내의 얼굴을 미호는 알고 있었다. 분명 제자로 삼아달라며 마탑에 기어 왔던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꽤 오랜 시간 제자로서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나 약해져서는 나한테도 두들겨 맞겠네.”

사내가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미호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어린아이인 미호는 저항하지 못하고 남자의 손에 따라 머리가 휙휙 움직여졌다. 하지만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자신의 머리를 잡아챈 사내를 노려봤다.

“이 눈깔에 힘 준 거 봐라. 역시 마탑주 미호 맞잖아.”

노려보고는 있지만, 그런다고 눈앞에 있는 사내가 죽거나 도망치지는 않는다. 미호의 마나양이 눈에 띄게 적은 것을 확인하고 덤벼든 사내는 오히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미호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이대로는 큰일 나겠군.’

조금 전에 스스로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나와서 창피하지만, 별 방법이 없다. 쓰으읍… 미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외쳤다.

“애애애애애러어어어언!!!”

“미친년.”

“구해다오오오오!!!!”

대마법사라는 자가 자존심도 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사내는 어이가 없어 벙찐 표정으로 말했다.

“대마법사가 되어서 창피하지도 않냐!”

“지금은 그냥 어린애거든!!”

사실 사내의 말대로 엄청나게 창피하다. 자신의 노예로 생각하던 자조차 상대할 힘이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다니. 대마법사의 자존심이 아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미호 님, 하셨던 말을 1분도 지키지 못하셨네요.”

꼴 좋다고 생각하며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도로시를 보니 이가 갈렸다. 이년이 애런에게 가진 감정은 알겠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을 싫어해서 상대하기가 거북했다.

“애런의 품속에서 봤을 때는 이런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사실 저도 제가 이렇게까지 독점욕이 강한 성격인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갇혀 지내느라 몰랐던 것들을 애런 님 덕에 알게 되네요.”

“나는 그런 생각으로 붙어있었던 게 아니었다만.”

도로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것도 싫어요.”

“넌 뭐냐.”

자신을 무시하고 둘이서만 대화를 하는 것을 보고 사내가 말했다. 도로시는 그 말도 무시한 채 미호와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마나란 건 저한테서도 얻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 굳이 애런 님에게 붙어계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애런 님한테 딱 붙어있는 것을 보면 제가 어떻게 생각하겠나요?”

“이래도 무시할 거냐?”

사내가 발동한 화염 마법이 도로시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능력을 발동한 도로시에게는 닿지 않고 마나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마법처럼 소멸하기 싫다면 미호 님을 내려놓고 가시는 게 좋을거에요.”

“고작 하급 마법 무효화를 했다고 자만하기는!”

화륵­! 다섯 개의 파이어볼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도로시를 향해 날아갔다. 물론 도로시에게는 어림도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아까 전처럼 사라진 마법을 보고 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고작 마법 무효화로 보이시나요?”

“... 마법 무효화가 아니군.”

“네, 저한테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실험해보시겠어요?”

“사양하지.”

사내는 도로시의 알 수 없는 능력을 경계하며, 뒤를 보이지 않고 인파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미호는 입을 열었다.

“참 편리한 능력이야. 마나도 들지 않고 신성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데, 위력은 좋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도로시는 미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가 손이 떨려서 그만두었다. 대신 눈을 부릅뜨고 미호를 노려보았다.

“사람하고 닿는 게 두려워지는데도요? 미호 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신체접촉을 저는 엄청나게 떨면서 한다고요. 애런 님을 부축할 때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혹시나 제 무의식이 능력을 발동할까 봐요.”

“그래, 미안해. 너무 성내지 마라.”

도로시와 미호 사이에 차가운 분위기가 겉돌고 있을 때, 애런이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왔다. 그리고 엉망이 된 미호의 머리카락을 봤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 역시 내 노예가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신세 지도록 하마.”

“왜 그렇게 되는 거죠? 한 번 구해줬는데 이제 빚은 없는 것 아닌가요? 아까 알아서 하신다고 하셨는데, 얼른 마탑으로 돌아가기나 하세요.”

미호는 가라는 듯 손짓하는 도로시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애런의 손을 잡았다. 그걸 본 도로시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이마에 핏줄이 섰다. 어이가 없어서 떨리는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역시 여우 구슬 없이 마탑으로 돌아가는 건 자살 행위야. 그걸 되찾기 전까지는 같이 다니자고. 틈틈이 마법도 알려줄 테니까, 응?”

“뭐, 죽을 것 같다는 녀석을 내버려 두기도 좀 그렇고.”

“애, 애런 님...!”

미호는 승리의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라는 것은 지날 수록 지식을 쌓아준다. 그건 사람에 대한 것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법지대에서부터 2년간 애런을 봐왔던 미호는 상대적으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로시보다 애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중에는 애런의 성격이 있다. 이 남자는 불쌍한 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못한다. 그런 확신이 있던 미호는 일부러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강조해서 말했던 것이다.

“내가 여우 구슬을 되찾기만 하면 네 언니를 구하는 것도 도와줄 수 있으니 네게도 좋은 것 아니냐.”

그리고 도로시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을 들은 애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마법사가 있다면 든든하긴 하겠네요.”

“... 네, 조금이라도 빨리 언니를 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미호의 동행이 결정되었다.

*

며칠이 흘렀다. 이제 애런의 몸 상태도 괜찮아져서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면 고통도 덜했다.

“슬슬 움직여도 괜찮겠네.”

[이제 몸 안에서 폭주했던 마기도 안정화되었다.]

“오랜만이네.”

애런이 정신을 잃고 난뒤로는 마왕이 말을 걸어왔던 적이 없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평소에는 말이 많던 녀석이 조용하게 있으니까 내심 걱정을 할 뻔했다는 사실이 애런을 짜증 나게 만들었다.

[네 몸 곳곳을 침식하고 있던 마기를 흡수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러냐. 그럼 이제 써도 되냐?”

[아직은 무리일 거다. 괜히 몸이 멀쩡해지기 전에 마기를 사용해서 상태를 악화시키지나 말고 한동안은 사용하지 말고 있어라.]

“그러지 뭐.”

베네쿠스는 평화로운 나라였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마법 연구에만 몰두해서 타인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6개의 마탑은 거대한 마법진을 이뤄 베네쿠스를 감싸는 거대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어서 외부에서 위협이 될만한 것도 없었다.

“자, 그럼 카펠라의 마탑으로 가보죠.”

카펠라를 만나는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애런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둘째는 베네쿠스에서 아일라의 수련을 도와주는 카펠라의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아일라에게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반지 때문에 아일라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다만… 카펠라를 만나기 위해서 약속은 하고 가는 거겠지?”

카펠라의 마탑으로 길 안내를 하던 미호가 애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애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약속을 해야 해?”

“허…”

대마법사 카펠라를 만나러 가는데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무작정 탑으로 찾아가는 애런이 어이가 없어서 미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애런은 전생의 기억으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미호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생 용사 시절에는 마탑주든 대마법사든 애런이 찾아가기만 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마탑주보다 위에 있던 입장이 익숙했던 애런은 마탑주가 뭐가 그리 대단하냐며 오히려 미호에게 되물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이래서는 카펠라를 만나려면 몇 년은 기다리게 생겼군.”

“어? 그만큼이나?”

“성녀인 제가 부탁해도 오래 걸릴까요?”

뒤에서 애런과 손을 잡고 있는 미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도로시가 말했다. 미호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모르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네가 성녀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인가? 지금 앙겔로크라티카에서는 너나 네 언니의 존재를 부정할텐데… 오히려 성녀라고 말했다가 이단심문관이 쫓아오는 것 아니냐?”

“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기도 하네요.”

도로시가 성녀라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현재 앙겔로크라티카에서 교황과 가브리엘이 도로시를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텐데, 괜한 정보를 흘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대신 약속을 앞으로 당기는 방법은 있다.”

“그건 뭔데?”

“돈을 바치는 거지. 애런, 네게 있는 금화 전부를 바친다면, 음… 한 달 내로는 만나지 않겠나?”

“그걸 다 바쳐도 한 달이나 걸려?”

“당연하지. 마탑에서는 마법 연구를 위해서 돈이 얼마만큼 있어도 부족하다. 그 점을 노린 부자들은 마탑주를 만나기 위해서 돈을 쏟아부으니 금화 2000닢으로도 그 정도는 걸릴 거다.”

그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카펠라의 마탑의 아래까지 도착했다. 원기둥 형태의 마탑에 틈틈이 창문이 나 있었고, 그것으로 안에 있는 마법사들이 몇 명 보였다.

“그냥 벽 타고 들어가는 건 안 돼?”

“그런 방법이 되겠느냐.”

“안해보고는 모르는 일이지.”

스르르… 애런은 도약하기 위해서 발에 마기를 모았다.

“뭐, 몸으로 배우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미호는 도약할 준비를 하는 애런의 손을 놓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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