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018. 그 사람에 관해서 (6)
* * *
큰 아가씨께서는 먼저 이런 경고를 입에 담았습니다. 어떤 것이든 지나치게 확신하지 마라.
저는 그 경고의 의미를 깊게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저희는 이 궁벽한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있습니다만 반면 누구인지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적은 실시간으로 자신의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만 논하겠습니다.
저와 설혜윤이 소동을 벌이고 있는 동안, 큰 아가씨께 영상 편지가 하나 도착했다고 합니다.
발신자는 동남의 수호자들 대표 이세형. 그는 일방향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오늘 죽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일방향성이 강조되는 것은, 인명중시의 큰 아가씨가 이세형의 계획을 무마시키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이세형에게 재차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고 맨 처음 떠오른 의문은 발신자가 정말로 이세형이 맞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큰 아가씨는 제법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셀카모드로 찍은 영상 편지였거든요.
저도 뒤늦게 감상했습니다. 벌써 몇 년째 도촬질을 일삼은 경력자로서 말씀드리자면 조작된 영상이 아닙니다.
화면 바깥의 누군가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도 않고요.
“그런데 죽겠다? 어떻게 말입니까?”
“방법은 나와 있지 않아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죽겠다는 선언은 주어졌습니다. 결행할지 모르고요.”
“자기 말의 무게를 짊어지는 인간이라면 그렇겠죠.”
제가 아는 이세형은 그런 인간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한 장난으로 이런 메시지를 보낼 리도 없죠. 속임수라고 해도 그곳에는 의도가, 진심이라도 해도 마찬가지로 특정한 의도가 있습니다. 차라리 전자라면 나을 텐데, 후자라면 사람 하나가 죽게 생겼군요.
경찰에 연락한다는 아이디어도 있습니다만, 보류됩니다. 이 상황에 경찰은 신뢰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이세형은 일개 공무원들에게 자기 계획을 내어줄 위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영상에서 자신의 자살 예고를 신뢰할 만한 인원에게만 전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건 말건, 일단은 정보 공유의 대상을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보다 제가 큰 아가씨께 제법 신뢰받는 몸이었던 모양입니다?”
조금 뿌듯하군요.
그러자 큰 아가씨가 얼굴을 붉히며 팔짱을 낍니다. 츤데레 포즈입니다.
“특별히 폴트 당신을 신뢰하는 건 아니에요. 달리 사람이 없었을 뿐이죠.”
“폴트가 아니라 제니입니다. 어쨌거나 진실을 혼자 감내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요. 다만 평소 같았으면 한나진 씨에게 먼저 달려가셨을 텐데 오늘은 제가 됐군요.”
“어쩔 수 없잖아요. 영상 편지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한나진 씨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명시돼 있었던걸요.”
“왜 그랬을까요?”
저는 묻습니다.
그 말에 큰 아가씨는 어깨를 으쓱합니다.
“뭐가요?”
“왜 한나진 씨를 제외하길 청했을까요?”
“……나진 오빠는 이세형의 현재 위치를 알고 있어요.”
“압니다. 처음부터 한나진 씨와 작은 아가씨 팀이 오늘 회담하기로 했던 표적들 중 하나였으니까요.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닙니다. 왜 계획의 진면모를 저희에게 먼저 알렸냐는 것이죠. 근처에 있는 한나진 씨가 아니라.”
“나진 오빠가 알았다면 말렸을 테니까요. 제가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그것뿐일까요?”
“무슨 뜻이에요?”
어려운 뜻이 담긴 멘트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세형 대표의 메시지가 주어졌습니다. 자기는 죽을 것이다.
참고로 이세형 대표에게는 한나진 씨를 통해 우리가 획득한 정보들이 전달되었죠. 저쪽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용의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진범찾기는 뭉뚱그린 추측에 불과합니다.
우리에게는.
이세형 대표를 포함한 우리에게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큰 아가씨, 이세형 대표는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나진 씨는 정보를 제약하는 재주가 없는 귀염둥이이니까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큰 아가씨께서는 제게 이 영상 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곁에 있던 태유영이 아니라, 제게.
이 영상 편지가 풍월검도의 사람들에게 알려져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니까요.
왜냐하면 앞으로 이세형이 행하려는 일은, 그의 의도는.
“진범을 파악하는 것이니까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저도 안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 막 네이버를 켰습니다만.”
제 휴대폰 화면을 비춘 다중 화면을 보여줍니다.
이세형 대표가 오늘 밤 ‘중대 발표’를 내놓을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5분 전에 시작된 보도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턱이 없었던 큰 아가씨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오늘 밤, 이세형 씨는 사냥을 나섭니다. 그의 사냥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죽이는 자. 물론 살인마는 현장에서 정체를 숨길 테죠.
하지만 우리는 풍월검도의 문중에 있습니다. 입 다물고 있다가, 살인이 발생했을 때 부재한 수련생을 찾아내면 됩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우리의 범인 찾기를 돕는다고요?”
“도저히 그럴 인격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우리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기왕 노는 거 추리극이라도 하나 찍으면서 노는 게 재밌지 않겠습니까?
큰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해서 태유영 씨에게 영상 편지를 감추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자 큰 아가씨는 패색이 짙은 한숨을 푹 토합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었어요. 믿고 싶지 않은 가능성. 왜냐하면 그 가능성에 따르면 우리는 이세형 대표를 미끼로 삼는 거니까요.”
“‘자발적인’을 빼먹지 마십시오.”
“그거나 그거나.”
피해자의 자발성은 방관자들의 책임을 덜어줍니다.
이런 사실을 말했다간 큰 아가씨께서는 오기를 부려서라도 이세형 대표를 구하려 하기 시작하겠지요.
다행스럽게도, 큰 아가씨께서는 자극받지만 않는다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이세형 대표의 경고를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한나진 씨에게 연락을 취해 이세형의 소재를 밝혀내고, 다가올지 모르는 살인극을 막아낸다는 정의로운 계획은 우리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현실주의적인 때의 큰 아가씨께서는 그런 발상을 못 하시니까요.
그런 큰 아가씨를 위해 언제나 그런 발상을 대신 던져주던 박한월 군은, 지금 이곳에 없는 것입니다.
“발표 시간은 저녁 8시 30분. 그때까지 이제부터 부재자를 확인해두죠. 티내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알았어요. 근데 오늘 밤에는 손님맞이 겸해서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합식을 한다고 했거든요?”
“반드시 이세형 대표를 죽여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억지를 써서라도 빠지겠지요. 혼동의 여지가 있는 그냥 부재자 수를 줄일 수 있어서 차라리 그것이 낫습니다.”
“그래요.”
저는 돌아섭니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제법 여유가 남아 있는 데다가 저녁 시간에는 결국 다 모이기로 했기 때문에 특별히 바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튜브 켜서 씹덕채널이나 좀 돌아다니다가 저녁 알람 시작되면 그때부터 팔팔하게 돌아다니지 않을까요?
아니면 말고.
그런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는데, 큰 아가씨가 제 어깨를 툭툭 칩니다.
“뭡니까?”
“폴트, 아니 제니. 랑하고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는 없어요?”
“부탁의 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말 그대로예요.”
그렇다면 요지가 없는 것보다도 못한 바보 같은 부탁입니다. 제가 어째서 작은 아가씨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지를 묻자, 큰 아가씨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뭅니다.
“그냥, 당신이 점점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요. 랑하고 친해지기 전의 당신이요.”
“그때의 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온화하게 웃지 못하고, 따뜻하게 생각하고 말하지 못했죠.”
……….
…………….
그랬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랬다고 한다면 작은 아가씨 곁에 있는 동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것은 추스르고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제가 한때 고용된 신세로 머즐드독스 총수님의 지시에 따라 큰 아가씨를 다치게 만든 것은, 또 런던에서 한나진 씨와 작은 아가씨를 속인 것은 이미 굳어져 불변하는 역사입니다.
그럭저럭 좋은 관계로 지낸다고 해도 그것은 겉보기에 지나지 않고.
저에게는 죄스러움이, 그분들에게는 원망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 해도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고요.
“근데 금발 당신 나진 오빠 좋아하잖아요.”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아, 시발.
한나진 씨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는 전제를 깔고 말한 것처럼 진행됐습니다.
사실이긴 합니다만.
?
아닙니다. 안 좋아합니다. 그냥 좀 괜찮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무튼 안 좋아함.
“뭐, 좀 제멋대로의 생각이긴 한데 저는 나진 오빠가 여자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래야 한다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요. 오빠는 계속 예전 여자친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잖아요? 역시 사랑을 잊게 해주는 건 또 다른 사랑인데, 그런 의미에서 그냥 금발하고 오빠하고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거죠. 마침 한쪽의 호감은 완성됐고.”
머릿속이 꽃밭이군요.
“………큰 아가씨는 호감 없습니까?”
있는 거 티납니다.
그리고 머릿속이 꽃밭인 인간인만큼 아마 뇌내 망상 속에서는 한나진 씨와 결혼해서 손자까지 보고 계시겠죠.
“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남자는 원래 서너살 어린 걸 더 좋아합니다.”
“그 오빠는 22살이고요, 저는 17살이고요.”
“그럼 더 좋죠. 아니지. 이왕 어리고 새콤달콤한 걸 기준으로 밀어줄 거면 차라리 작은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농담을 던졌는데 큰 아가씨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받아칩니다.
“저는 한 5년 정도 지나면 괜찮다고 봐요.”
“한나진 씨는 27살이고 작은 아가씨는 파릇파릇한 20살입니다.”
“그 정도는 허용범위 아닌가요?”
“시계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보죠. 이제 한나진 씨는 17살이고 작은 아가씨는 푸르딩딩한 10살입니다.”
“………됐어요. 왜 제가 금발하고 나진 오빠 연애사를 공모해야 하죠?”
“아가씨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아니, 제가 시작한 건 말이죠.”
다시 아랫입술을 깨무는 큰 아가씨.
계속 보다 보니 좀 유혹적이군요. 나중에 써먹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큰 아가씨가 이 이상한 대화를 개시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면.
“요즘 당신은 뭐랄까, 무뚝뚝해지고 있어요. 이대로 두면 나진 오빠하고 싸울 것 같아서요.”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겁니다.”
“이제 둘 다 애들이 아니니까.”
정말이지 농담을 못 받아주는 인격체로군요.
하지만 무슨 말씀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이번 일이 그럭저럭 잘 풀리고 나면, 그때는 아마존에서 직구한 구멍 란제리를 입고 한나진 씨에게 육탄돌격하도록 하죠.
농담입니다.
절반 정도.
이렇게 억지로라도 웃어두지 않으면 우리 둘 모두 오늘 밤에 벌어질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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