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018. 그 사람에 관해서 (4)
* * *
고아들을 받아준다는 이상한 영감님을 만났다.
우리 모두 각자의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수상한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지금은 우리야말로 수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리를 떠돌고, 우리보다 약한 무리를 발견하면 먹을 걸 털어내고. 그러다가 안 준다고 버티면 죽이고.
그렇게 벌레떼처럼 굴다가도 먹을 게 떨어지면.
움직일 기력이 없는 아이부터 버리고.
괴물에게 물려 죽어가는 환자부터 버리고.
형제자매조차 짐짝이 되면 버리는 것으로 그만이다.
……….
…………….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저 괴물들을 파계종이라고 한다는데.
어쩌면 우리가 그 파계종보다도 잔혹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우리를 받아준 영감님은 이해가 안 되더라.
우리에게 글을 읽는 게 중요하다면서 이상한 무협지를 읽게 하지 않나. 다짜고짜 일기를 쓰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지만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밥 주는 사람 말을 따라야지.
우리가 조금만 건강해지면 그 괴물들에게 맞서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데.
어쩌라고? 누가 배운대? 참 나.
***
제니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니라는 말에는 암탕나귀라는 뜻이 있습니다.누군가가 저를 제니라고 부를 때마다 저는 암탕나귀라는 낯뜨거운 호칭으로 불리는 셈입니다.
그렇지만 뭘 어쩌겠습니까? 제니퍼의 애칭은 젠 아니면 제니인데, 젠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호라 모 젠젠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명 그대로 제니퍼라고 하면 우리 사이의 관계가 너무 멀게 느껴지니 그냥 제니라고 하겠습니다.
제니입니다.
제가 한국 거주 짬밥도 상당하고 여기저기 쏘다니기도 많이 쏘다녔지만 지리산은 건드린 적도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앞날 창창한 20살 소녀가 바다에 놀러가면 놀러갔지 등산은 왜 간답니까.
솔직히 늙는다고 산행이 땡길 것 같지도 않으니 한반도 7할이 산이라는 것도 잊고 살았습니다만, 아, 예, 더럽게 험하네요.
헉헉거리며 오르고 있으니 저보다 가슴이 큰 태유영이 괜한 설명을 던져줍니다.
“외국인이시죠? 이 정도면 한국에선 완만한 산입니다.”
“제가…… 그쪽보다…… 한국지리 점수가 높을 겁니다…….”
수능…… 언어 영역도…….
왜 이 동네 인간들은 백인만 보면 뭘 가르쳐주려고 할까요?
뭐 처음 들르는 매장마다 한국어 못하는 척을 하며 점원을 골려먹는 제 인성으로 지껄일 말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이게 그나마 완만한 산인 줄은 압니다.
산세가 험하면 산 이름에 ‘악’ 자를 붙인다는 것도 알고요. 치악산, 설악산 등등. 그러니 문제가 되는 건 산세가 아니고 제 체력입니다.
나름 헬스장도 다니는데.
런닝머신 뛸 때마다 풍선근육들이 작업을 걸어올 정도로 탄탄한 체력의 소유자인데.
실전 등산은 좆같습니다.
그리고 백인인 걸 거르더라도 완만한 산이라고 굳이 자랑하는 건 뭡니까.
유럽에는 산 없습니까? 코리안 유저들, 유럽에 불만 있어요? 우리의 등산 몽블랑으로 대체되었다.
물론, 몽블랑은 프랑스 쪽 산이고 영국 열도에는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제대로 없습니다만 프랑스 돼지들은 저희 영국 하위 항목에 속하니 몽블랑도 어떻게 보면 영국의 산입니다.
아니면 말고.
몸이 힘드니까 횡설수설하게 되네요.
몽블랑 먹고 싶다.
그렇게 고통받길 서너 시간, 어찌 되었건 우리 일행은 지리산 중턱의 풍월검도 문중에 도착했습니다.
저와 큰 아가씨는 땀 범벅이 되었네요. 당장 씻고 싶습니다만 여기 딱 봐도 수세식 변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검정 고무신인가. 이러고 어떻게 사나 싶어서 태유영을 돌아보는데 저쪽은 말끔합니다.
우리 눈치는 조금도 살피지 않고 태유영은 대문을 엽니다.바깥에서 보기에도 그랬듯 내부는 한옥 구조입니다.
전래동화를 보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짝짓기 중인 두 마리의 고래등 정도 될까요.
꾸며지기는 잘 꾸며졌고, 넓기도 정말 넓으며 내부 구조도 복잡합니다. 수세식 변기는 없겠습니다만.
“다들 목적은 안 까먹었죠?”
큰 아가씨가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태유영과 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죠. 지금 제 목적은 샤워를 하는 것으로 고정되긴 했습니다만, 한나진 씨로부터 선입금을 받았으니 공적인 목적도 염두에 둬야겠죠.
우리의 목적은 선화란의 추적을 돕고 풍월검도를 배우는 척하면서,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극의 진범을 밝혀낼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엄청 복잡하네요.
그냥 은근슬쩍 정보를 빼낸다고 해두죠.
저야 남 등처먹으며 살아온 경력이 상당한지라 걱정은 없습니다.
오히려 말을 꺼낸 큰 아가씨나 태유영이 걱정됩니다. 둘 다 남을 속이는 데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으로 보이니까.
어설프게 움직이다가 뽀록나면 미소녀 셋이 무슨 능욕을 당할지 상상이 안 가네요.
농담이고.
듣자하니 풍월검도 내부 분위기는 상당히 어수선하다고 합니다.
파계종 때문에 양산된 고아들을 하나하나 데려와 기른 문주 청풍명월을 제일의 제자 선화란이 죽였다고 하니, 오죽 혼란스럽겠습니까?
당장 수장이 죽고,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살인마가 되었으니 내부 서열 체계도 잡히지 못했다는 것이 지금의 풍월검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임시로 풍월검도 수장 자리를 맡고 있다는 사람이.
“허허, 반갑소.”
이제 서른쯤 됐을까 싶은, 수염 기른 아재입니다.
그냥 아재는 아니고 이곳에 기거하는 다른 모든 수련자들과 마찬가지로 풍월검도를 익힌 지정능력자, 그중에서도 C등급입니다.
결코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이 남자가 어째서 수장 자리를 떠맡았는가 하면, 그건 풍월검도 내부의 복잡한 기류가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풍월검도 수련자들은 선후배끼리 밀고 당겨주는 문화가 강해서, 즉 좀 꼰대들이라서 실력과 실적에 무관하게 아랫기수가 등급 갱신을 늦추는 경우가 잦았다고 합니다.
그러지 않고 바로바로 등급을 올리면 선배들에게 도전하는 꼴이니까요.
자기 등급 따는 게 뭐가 도전인가 싶기도 하고, 실제로 스승이었던 청풍명월은 그런 분위기를 없애려고 나름의 노력을 벌였지만, 반쯤 공인된 후계자 선화란의 등급을 넘볼 패기의 후배는 없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풍월검도에는 A등급 이상의 지정능력자가 없습니다. 고만고만한 B등급과 C등급들이 눈치게임을 벌이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가장 연장자에, 맨 처음 풍월검도에 합류한 이 남자가 수장을 맡았다는 거고요.
“류장건이라고 하오.”
“……장건 아저씨, 갑자기 왜 그런 요상한 말투를 구사하시는지.”
태유영이 딴죽을 걸자 류장건이 히죽히죽 웃습니다.
“그냥 권위 좀 살리려는 것이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보기 흉합니다.”
“내 생각에도 그렇소.”
“저희 아저씨가 이렇게 철이 없어 죄송합니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태유영.
그럼에도 류장건은 허허 웃어 넘길 뿐입니다.
보다시피 이곳 풍월검도는 개인간의 친분으로 엮인 가족 같은 관계입니다.
이렇게 대규모의 지정능력자 단체인데도 업무와 직급이 관계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죠.
전부 죽은 사부 청풍명월의 영향입니다.
그 청풍명월이 죽었으니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관계입니다만은.
어쨌거나 류장건에게 실권은 많지 않습니다. 이대로 새로운 수장이 선출되지 않더라도 관리국 상임이사라는 위치에 걸맞은 권력은 행사하지 못하겠죠.
그래서 저 아재에게는 관심도 없고, 그보다는 다른 B등급 지정능력자들이 궁금합니다. 태유영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물론 다짜고짜 B등급 지정능력자 명단을 달라고 하면 이상하겠죠. 게다가 그걸 꼭 류장건에게 요구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으로서는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걸 위한 풍월검도 수련입니다만.
“이거 뭡니까?”
“차입니다.”
누가 모릅니까. 그쪽이야말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차는 우리가 더 많이 마십니다.
“풍월검도는 마음의 수양입니다. 그리고 다도는 마음 수양의 근본이지요.”
“아, 예.”
동양의 신비를 어필하겠다 이겁니까.
그거야 아무래도 좋지만 저는 체형적으로 무릎 꿇은 자세가 어렵단 말입니다. 골반이 다르다고요, 골반이.
근데 생각해 보니 몸매 굴곡은 태유영이 더 심한 것 같군요. 어떻게 저 사이즈로 무릎을 꿇는 거지. 남자를 유혹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원래 이렇게 폐쇄되고 경건한 척하는 단체일수록 남녀관계가 문란하기 마련이지요.
저는 이 나이먹도록 남자친구 한번 못 사귀었는데 태유영 선화란 이 인간들은 어땠을까요.
……….
망상은 자제합시다.
선입견은 나쁘니까요.
그나저나 태유영 이 인간은 우리 목적을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다도나 익히려고 온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리라 믿고 큰 아가씨를 흘깃 쳐다봤는데, 다도를 즐기고 계십니다.
환장하겠네요. 이거 나 혼자 일해야 하는 각인데.
그렇게 찾아온 명상의 시간. 진짜 이러다가 날이 저무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하는 눈빛을 태유영에게 쏘아보내기 직전, 어느새 그 여자가 제 등 뒤로 파고들었습니다.
명상한다면서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말입니다.
뭔가 싶어서 움찔 떨었는데, 태유영이 귓가에 대고 속닥거립니다.
“다들 산행 갔을 시간입니다. 조사하려면 지금이에요.”
그러면서 손으로 그린 풍월검도 본산 내부 약도를 건네주는 태유영. 다행히 가슴이 지능을 빨아들이진 않은 모양입니다
아, 자꾸 가슴가슴하니까 제가 저 사이즈를 질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저도 제법 큽니다. C컵은 됩니다.
저쪽은 F부터 시작하겠습니다만 아무튼.
태유영의 약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복도를 거닙니다.
근데 워낙 악필이라, 또 그림 실력도 개판 직전이라서 뭐가 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전체 구조가 거대한 탓일지도 모르고요.
일단 제가 있었던 다도실의 복도 맞은편에는 남녀 숙소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당연히 목욕탕이 있고요.
?
목욕탕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그 방향으로 접근해 보니 정말 목욕탕이 있습니다.
한옥에 근본없이 달라붙은 일본풍 공용 목욕탕입니다.
련생들은 여기서 함께 씻는 걸까요?
하지만 지금은 산행 갔을 시간이라고 했으니 잠깐 씻는 정도는 괜찮겠죠? 괜찮습니다.
조심스럽게 여탕으로 진입합니다.
옷을 벗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몰아서 숨긴 뒤 온탕에 입수.
“흐어어…….”
몸이 녹아 내립니다.
분위기도 좋고, 꼭 온천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네요.
이대로 딱 5분만 몸을 녹이고 땀을 흘려보낸 뒤 빠르게 수색을 이어나가는 겁니다.
이거 태업 아닌가 좀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괜찮습니다.제가 여기서 제일 적극적으로 일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선입금의 절반만 받았으니 절반의 정성으로 일하는 게 당연합니다.
1분 경과.
아, 나가기 싫다.
4분이나 남았지. 아흐헤헷.
2분 경과.
아, 나가기 싫다.
3분 남았지. 히힛.
이하 반복.
마침내 약속의 5분이 흐르고.
여전히 나가기 싫습니다.
하…….
그렇지만 열심히 해야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나진 씨 부탁이니까요.
…….
……….
아 씨, 뭔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이게 좀, 그런 거잖아요? 알몸인 상태로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면 기분이 묘합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저는 한나진 씨 안 좋아합니다. 그냥 그럭저럭 괜찮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하룻밤 상대로 적합할 뿐입니다.
저쪽이 저를 하룻밤 상대로 생각하면 눈앞에서 섬광탄을 터뜨리겠습니다만 아무튼.
물론 저도 하룻밤 상대만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기왕 저지르는 거면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하는 편이…….
뭐래.
어우 창피해.
망상이 폭주했습니다.
아니, 폭주하고 있습니다.
열기가 너무 심해서 그렇습니다.
얼른 나가죠.
몸을 추스르려는 순간, 온탕 한 가운데에 조그마한 분홍색 티끌이 떠오릅니다.
뭐죠, 저거?
동시에 거품이 보그르르르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분홍색 티끌은 점차 물의 표면으로 다가오며 형태를 드러냅니다.
How do ‘YOU DO’.
어린 소녀입니다.
잠수하고 있었던.
언제부터?
“푸하!”
뜬금없이 물 바깥으로 튀어나온 소녀가 저를 발견하고는, 눈을 껌뻑거립니다.
껌뻑껌뻑.
서로 사고가 정지합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여는 쪽은, 소녀입니다.
“앗! 여기에 백인이 있다앗!”
저도 한 마디 받아쳐주고 싶네요.
아앗, 여기에 빈유도 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