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018. 그 사람에 관해서 (3)
* * *
클로를 잡고 테스트해 보았다. 아까와 같은 자세, 같은 마음가짐으로.
놀랍게도 됐다. 진짜로 풍월검도의 첫 지정능력을 익힌 것이다.
화란과 사이좋게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당장 가능할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던 랑은 지금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반면 화란은 팔짱까지 끼고 승리자의 위풍당당 스탠딩을 시전하고 있다.
오늘밤만큼은 저러고 있게 두자.
“근데 질문.”
번쩍 손을 드는 랑.
“저 지정능력, 공익 원래 능력보다도 한참 약한 것 같은데.”
화란의 가슴 한 가운데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일침. 덕분에 위풍당당 스탠딩이 풀렸다.
그저 깎아내리는 평가는 아니다. 지금 선보인 비룡승천은 이름만 거창하지 실상은 별 것 아닌, 그야말로 길게 도약하는 기술에 불과했으니까.
유명무실이라는 표현에 딱 걸맞은 지정능력이었다. 그 사실을 화란도 잘 알고 있었는지 멋쩍게 볼을 긁적거리고.
“오, 오늘 배운 건 첫 초식이라 그래요! 월룡비칠식의 세 번째 초식까지만 가도 C등급 지정능력에 비견되고요! 마지막 초식을 익히면 A등급 지정능력자도 우스울 지경이라구요!”
“뭐, 젖소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러면서 랑은 반달눈으로 화란을 올려다 보았다.
젖소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 턱이 없었던 화란이 부들거렸지만, 우리 팀에서 의전 서열 1순위에 놓인 게 랑이라는 사실을 이미 파악한 화란이었다.
부들거릴뿐이지 실상 받아치지는 못한다. 가슴이 지나치게 큰 것도 사실이고.
……나까지 왜 이러지.
쓸데없는 생각은 모조리 지워버리고 TV를 켰다. 때마침 세형이 기자회견을 벌이기로 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채널을 틀어야 세형의 이야기가 나올까 싶었는데, 막상 채널을 하나둘 돌려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뉴스 프로그램이 하나라도 편성된 채널은 일말의 예외도 없이 세형의 기자회견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거든.
중요한 발표 직전 뉴스 채널들이 으레 그렇듯이 패널들이 나와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동남의 수호자들의 대표가 ‘중대 선언’을 제창하겠다고 예고했는데 그 선언이란 무엇인가, 발표의 시기가 지금 이 순간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타 등등.
와중에 어떤 패널은 갑작스러운 발표를 최근 이어진 관리국 상임이사들의 살해 사건과 연결지으며 겁을 먹은 세형이 화친파 선언을 내놓으리라는 도발적인 멘트를 던졌다.
그러자 다른 패널들도 공격 모드로 태세를 바꾸었다. 세형을 실드치는 인간들부터 시작해서 왜 화친파가 겁쟁이로 취급받아야 하냐며 언성을 높이는 시민논객, 겁쟁이가 맞지 않냐며 반쯤 비아냥거리는 다른 시민논객.
그렇게 좌중이 시끄러운 동안, 화면 한 구석에는 세형이 설 기자회견장 연단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패널들의 개싸움 탓에 정작 오늘의 주석인 연단은 관심을 못 받고 있었다.
진행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간 것은 소영이 연단에 나타났을 때였다.
마이크를 조정하던 소영이 뒷발꿈치를 쫑긋 들어 올려서 ‘아아, 지금부터 대표님이 중대발표를 하신대요.’ 라고 중얼거리는 소영.
진행자들이 빵 터진다.
아, 시청자분들께서는 방금 지나간 아이를 모르는 분들도 계시겠군요. 놀랍게도 저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A등급 지정능력자, 그것도 이세형 대표의 호위를 전담하고 있는 경호대장입니다.
이세형 대표의 따님인 것으로도 유명하죠?
네, 귀여운 외모로도 유명하고요.
정말 귀엽네요.
밑으로 흘러가는 실시간 문자 참여에 ‘소영이 커여워’, ‘갈색 피부 커여워’라는 문장이 도배된다.
그렇게 소영이로 위아더월드가 형성될 무렵 연단에 서 있던 소영이를 관계자로 보이는 여자가 끌고 간다.난처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뭐라고 받아치면서도 질질 잡아당겨지는 소영. 마침내 화면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랑이 넌지시 물었다.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지?”
“어, 거의 백 퍼센트.”
소영은 저런 장난을 쳐댈 철부지가 아니다.
그러니 방금 장면은 세형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장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귀여운 소영의 이미지를 이용해 반대 세력의 기세를 꺾고 대외 이미지 상승을 고조하겠다 이거지.
저거 의외로 효과가 있다. 랑이 런던 사건 마무리짓고 기자회견 벌일 때 연단 오르면서 엎어지고 진짜 다 망했다 싶었는데, 팬클럽이 생기더라고.
우리가 저 모략꾼 부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주고받는 동안, 드디어 이번 발표의 주인공 세형이 연단 위에 올랐다.
그는 특유의 느끼한 눈매만 빼면 더없이 진중하고 강단 있는 위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정치인이나 유명인사들도 다 저런 건가. 언론은 전부 거짓인가.
[안녕하십니까, 동남의 수호자들 대표 이세형입니다.]
“시작한다.”
“드디어.”
그렇게 개시한 담화문 발표.
하지만 선언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초반부 전개는 지지부진하다.
자신의 처지가 어떤 상황에 있으며, 무슨 사건들이 있어서 이제 곧 입에 담을 결론을 도출해야만 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느낌.
덕분에 준비 작업을 갖출 여유가 넘쳤다.
일단 나부터 코트 좀 입고.
“어, 어디 가세요?!”
함께 연설 장면을 보고 있던 화란이 당황해서 일어났다.
“다시 서울 가는데요.”
“저도 데려가라니까요! 혼자 집에 있으면 답답하다고요…… 네? 네?”
“젖소, 응석이 심해.”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랑. 그렇게 우리 둘 다 외출 준비는 끝마쳤지만 연설의 끝자락은 보고 가기로 했다.
유튜브 지연 생중계로 보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고, 서울이 그렇게까지 먼 것도 아니니.
때마침 화면 속 세형이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이곳에서 선언하겠습니다. 저희 동남의 수호자들은! 현 시간부로! 지구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는 파계종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각오하기로!]
뉴스 화면 밑으로 ‘동남의 수호자들, 강경파 선언.’이라는 대문짝만한 슬로건이 지나간다.
그에 발맞추어 뉴스데스크의 논객들이 환호하거나 표정을 구긴다.중립을 표방하는 뉴스 진행자들도 말만 없다뿐이지 적잖게 놀란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지. 주로 동남권에서 활동하는 동남의 수호자들은 파계종에 덜 강경한 편이었으니까.
어떻게 이런 선언이 튀어 나왔는지 밝혀내기 위해 데스크 전체가 바빠지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편집자들은 뉴스 화면을 다시 분할, 연단 쪽을 작게 배분하는 것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집중시켰고.
그것이 다음 순간 찾아온 폭발음을 그 어떤 굉음보다 야만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텔레비전이 허용치 이상의 음성을 출력하며 버벅거렸다.
뉴스 진행자들의 안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뒤늦게 이변을 알아차린 편집자들이 기자회견장의 카메라를 확대했다.
그러나 화이트노이즈가 화면 대부분을 뒤덮어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진행자들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무슨 사건이 벌어진 것만 같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생방송이라는 것도 잊고 몇몇은 데스크 바깥의 인물을 찾기 시작했다.
“현장 카메라 3번 어딨어요!”
“3번 살았대요! 3번 빨리!”
그러자 논객 하나가, 마이크 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우리 모두에게 들렸다.
“틀면 안 되는 화면일 텐데.”
3번 카메라로 지칭됐을 화면이 나타났다.
파괴된 연단.
핏물.
다시 화면이 점멸했다.
자동으로 뉴스데스크 쪽 화면이 비추어진다. 3명이던 진행자 중 하나는 이미 데스크 바깥으로 뛰쳐나갔고 나머지 둘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누군가는 말해야 하는데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멘트를, 나이 많은 남자 앵커가 쉰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현장에 사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 밑으로, 자동 송출되는 슬로건이 지나갔다.
‘세종시 보람동에서 소규모 파계지점 발생.’
본래 소규모 파계지점은 보도의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세형의 기자회견이 세종시 보람동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내 휴대폰이 고장난 것은 아니다.뒤늦게 뉴스를 접한 유에게서 온 연락은 제대로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문제가 생겼다면 세형의 휴대전화이거나, 아니면 내 것과 그의 것 사이를 가로막은 파계지점의 왜곡 현상 때문인데,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문제였는지 파악했을 즈음 그런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채널에, 모든 뉴스에, 단 하나의 자막이 떠올랐다.
지정능력자 이소영 중태.
동남의 수호자들 이세형 대표 사망.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랬고 랑이 그랬고 화란이 그랬고 뉴스가 그랬다. 극히 작은 규모의 파계지점이 발생했는데 현장 인력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크게 다쳤다.
대부분은 관리국 상주 기자단원이었으나 몇몇은 소영처럼 지정능력자였다. 그들이 어떻게 순식간에 제압될 수 있는지,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자료가 모조리 훼손되었다.
나중에, 상흔을 확인하고 나서야 선화란의 소행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파계지점의 발생에 대해서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다.
우리도 경황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선 소영부터 만나기로 했다.
녀석은 충남쪽 권역외상센터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가 나중에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지정능력자인만큼 회복이 빨라 이틀만에 의식을 되찾았지만, 사건 상황에 대해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치의를 비롯한 실무자들이 세형의 사망 사실을 소영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소영을 만났을 때, 소영은 세형이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확신하고 있어서 다른 어떤 물음도 던지지 않고, 또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이렇게 물어댔다.
“아빠는 어떻게 됐어요.”
말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꼭 죽은 사람의 방백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주치의가 시킨 대로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나는 거기에 대해 몇 마디를 더 잇고 싶었다.
괜찮을 게 분명하며, 아마 보안 문제로 숨어 계실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내 개인적인 바람에 불과했다.
나는 욕심을 강요해도 좋을 정도로 이 사안에서 무관하지 않았다.
병실에서 랑을 내보내고, 소영에게 사과했다.
너희 부녀를 우리의 일에 말려들게 만든 것을. 그래서 너를 다치게 만든 것을.
다쳐서 괴로운 네가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게 만든 것을. 그것들 전부를 소영에게 사죄했다.
소영은 그 말들을 듣고도 무표정했다.
다만 분개하지도 폭발하지도 않는 손길이 내 손끝을 부여잡았다.
소영은 나의 손을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기고.
물어야만 하는 것을 물었다.
“아빠, 죽었죠?”
나는 대답해야만 했다.
“어.”
그 목소리에 소영은 고개를 미세하게 기울였다.
그것말고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조금의 일그러짐도, 흐트러짐도 없이 소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을 처음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턱끝까지 곧게 내려가 맺혔다가 소리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영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빠야는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요.”
“있잖아, 나는.”
“다음에 올 때는 맛있는 거 사와요. 알았죠?”
그 말투에 아버지가 남긴 사투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병실을 나서고,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랑을 일으켜 세웠다.
랑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각오를 끝마친 것처럼 힘주어 말했다.
“제니가 연락했어. 두 가지에 대해서. 하나는 풍월검도 본산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그래. 안 그래도 그쪽으로 가려고 했어.”
“남은 하나도 들어.”
랑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댔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