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018. 그 사람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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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귀가.
이거 예상보다 너무 일찍 온 감이 없잖아 있는데. 관리국과 연합회 그리 동남의 수호자들까지 3개 단체와 면담을 진행하러 떠났는데 이틀이 안 걸렸다.
이대로 랑과 서울 유람이라도 벌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한데, 집에 돌봐야 할 사람이 하나 남아 있단 말이지.
현관문을 열자 신발장 바로 앞까지 쪼르르 달려나와 있는 여자. 입고 있는 도복은 그대로였지만 어째서인지 꾀죄죄해진 화란이었다.
자기만 놓고 간 것에 화가 나서 곧장 싫은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화란은 의외로 깊게 따져대지 않았다.
대신 씻겠다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행색을 보아하니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씻지 않은 모양이었다.
땀도 많이 흘렸던데 안 찝찝한가, 싶어서 샤워를 끝마치고 거실로 총총 걸어오는 화란에게 씻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화란은 어제보다 훨씬 기가 꺾인 목소리로 우물우물 대답했다.
“샤워실이 좁아서 문 닫고 샤워하기가 무섭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화란은 내 옆자리에 착석.
“별 게 다 무섭네요. 정 그러면 문 열고 씻든가.”
“도중에 당신이 돌아오면 어떡해요?”
그것도 그렇네. 그럼 제가 안 돌아오면 언제까지 버티려고 했어요, 하고 받아칠 수도 있었지만 소심해진 화란을 괴롭힐 마음은 없었다.
그럼 우선 랑 저녁 준비나 할까. 지금 저녁을 준비하면 딱 밥상 내려놓을 쯤에 세형의 기자회견이 시작될 것이다.
그거 먹고 제니퍼와 정보 교환을 벌인 뒤 서울의 동남의 수호자들 연구소로 가서 세형 부녀와 합류를……….
방대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화란이 내 옷깃을 꽉 잡아당겼다.
“저어, 있죠.”
슬그머니 화란을 돌아보니 얼굴이 새빨갛다.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 별 건 아니고요……. 그, 뭐야, 또 나가요?”
“예?”
“계속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또 나가냐고요.”
“그러겠죠?”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세형 부녀와 접촉하면서 계속 관리국과 연락을 취하거나 아예 수장을 잃은 변경의 늑대들 본부를 방문할 것이다. 강원도까지 향하는 기나긴 여정이 되겠지.
일이 조금 틀어지더라도 지리산에 있다는 풍월검도에 방문할지 모르고. 어쨌거나 여기서 계속 얼타고 있지 않으리라는 예감만큼은 분명하다.
“………안 가면 안 돼요?”
“무슨 뜻이에요?”
“벼, 벼벼별뜻은 없어요. 싫음 말아요.”
그러면서 손을 휘젓고 자기 말을 철회하는 화란. 하지만 안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지우지 못한다. 떨리는 손끝도.
그 모습들을 보며 나는 제니퍼의 경고를 떠올렸다. 화란이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니 잘 돌보라고. 암만 그래도 하루 정도는 알아서 버티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던 걸까.
도움을 주고 싶은데 정확히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 판국에 진짜 여기서 화란의 멘탈치료에 집중할 수도 없고.
일단 심심한 것 정도는 달래주자. 뭘 해주면 좋을까.
“일거리라도 좀 드릴까요?”
“……어떤?”
귀를 쫑긋 세우는 화란.
기쁨을 얻는 허들이 낮다. 낮아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낮은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당사자 기분이 풀려 보이니 그걸로 됐지.
그러면서 나는 화란에게 맡길 임무를 조정하기로 했다.
원래는 세형의 충고를 따라 제니퍼가 보내준 정보들을 조합하는 데 써먹으려 했지만, 그것보다도 앞서서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다.
“풍월검도, 지금 가르쳐 주세요.”
“좋죠!”
그러면서 폴짝 뛰었다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정좌하는 화란.
자기가 못해도 22살이라는 걸 뒤늦게 자각한 모양이었다.
이어서 22세(최소)의 화란은 괜히 튕기기 시작했다.
“매, 맨입으로요?”
“스승님께 뭔가 바치고 그래야 돼요?”
“공자는 육포 한 묶음을 바쳐야 제자를 받아줬대요.”
“그거, 육포가 춘추시대 예물 중에 제일 값싼 거였는데 그것도 받아줬다는 고사거든요.”
철학과가 이렇게 유식하다.
아무튼.
“치킨 사 달라는 말이죠?”
“아, 아니거든요!”
“싱크대 텅 비어 있는 거 이미 봤어요. 세 번이나 묻지는 않습니다. 치킨 시켜요?”
“……순살로 부탁드려요.”
***
내 손을 이끌고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순회한 화란은 전에 없을 만큼 들떠 보였다.
여기 풍경이 예쁘긴 하지. 길게 늘어진 수로하며, 그 중앙에 누각처럼 두둥실 떠 있는 티하우스. 길게 이어진 얕은 조명들.
가로수가 밤바람을 맞으며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화란은 특히 이곳의 색조가 적은 조명들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간 지명수배자로 몰린 탓에 정체를 숨기기에 급급했는데 여기서는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그렇게 한참 떠들고 다니다가 공원 수풀에 드러눕기까지.
뭐, 저녁 늦게 미인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면 좋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단 말이지.
풍월검도를 배운다는 원대한 목적 말이야.
참지 못하고 얘기를 꺼내자 화란이 아까부터 쥐고 다니던 장우산 하나를 건넸다.
“저하고 승부해요. 지정능력 쓰지 말고.”
“……그럼 제가 지겠죠. 그쪽은 검만 배운 사람인데.”
“남자가 그렇게 내빼면 멋 없어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벌떡 일어나는 화란. 웨이브가 잔뜩 들어간 머리카락에 풀잎이 달라붙어 있었다. 찝찝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지리산의 풍월검도 문중에서 자란 인간이지. 이런 사람들이 생활하는 환경에 내몰린 제니퍼와 유에게 짧은 위로의 말씀을 건넵니다.
그러면서 나는 장우산을 거머쥐었다. 마찬가지로 화란도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지푸라기 한 자락.
“뭐하시는 거죠.”
“일단 한번 붙어서 제대로 깨지고 시작해야 이해가 빨라요.”
“아니, 그게 아니고…….”
눈을 씻고 쳐다봐도 화란이 무기로 삼은 것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조그마한, 검지손가락 하나 길이의 지푸라기. 원재료는 풀잎 같은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공수해온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머리카락에 흩뿌려져 있던 것을 아무렇게나 하나 집어들었을 뿐이다.
아, 이건 좀…….
“안 봐주고 해도 돼요?”
“참 나, 해보세요.”
“진짜죠? 한대 들어오자마자 뼈 맞았다느니 그런 소리 없기에요?”
“그래요.”
“지금 그거 집어놓고 갑자기 지정능력 쓰고 그러면 안 됩니다.”
“못쓴다니까요. 그리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얼른 하라니까.”
계속해서 도발을 이어가는 화란. 물론, 지정능력을 쓰지 못하는 나는 장우산을 쥔 초보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장우산의 초보자에게 대적하는 수단은 아무것도 아닌 한 가닥의 지푸라기.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저걸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아니지. 정신 차려라. 이건 내가 방심해서 빈틈을 찔리고 화란의 강함이 부각되는 뻔한 상황이다.
여기서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가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어.
신중하게. 이성적으로 일격을…….
휙.
지푸라기가 시선을 갈랐다.
그것까지는 좋다. 무게도 다르고 쌓은 숙련도가 있으니 휘두르는 속도는 당연히 화란이 나보다 더 빠를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연약한 지푸라기의 강도를 무시한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가 목검만 휘두르면 그만이다.
그렇게 편안한 진로가 있는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다.
볼이 찢어졌다.
아주 얕은 상처.
너무 얕아서 깊이를 따질 필요도 없다. 그저 베여 나갔을 뿐인, 가장 긴 단면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상처.
이렇다 할 출혈도 없어서 핏방울 하나가 간신히 흘러나와 볼을 타고 턱 끝에 닿을 뿐이다.
그러나 이 상처는 명백히, 저 지푸라기가 만들어낸 것이다.
핏물에 손조차 대지 못하는 나를 직시하며 짓궂게 웃는 화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따진다.
“지정능력 못 쓴다면서요.”
“지정능력 아닌데요?”
“그럼 이게 뭐죠?”
“지푸라기.”
그러면서 내 핏방울이 묻은 지푸라기를 흔들어 보인다.
조금만 더 깊게 파고 들었다면 뺨의 살결을 통째로 저며 냈으리라.
“어떻게, 어떻게 가능한 거예요? 무슨 기라도 두른 거 아녜요?”
“지정능력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기를 둘렀다면 당신 턱이 모조리 잘려나갔겠죠”
“그러면 어떻게…….”
“뜻이 있었거든요, 라고 하면 못 알아듣겠죠.”
빈정거리듯 부연하는 화란.
“지푸라기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아요. 스스로의 유약한 강도를 유지할 뿐이죠. 그러니 휘두르는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야 해요. 가장 효율적으로 베고, 가장 날카롭게 가르는 방법을 익히면 지푸라기는 아무렇지 않게 바위를 잘라낼 수 있어요.
즉, 뜻은 사물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거죠. 그 뜻을 이용해 베는 거고.”
그렇게 가르치는 화란은 꼭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리가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러니까 우주에 대고 간절히 빌면 뜻이 이루어진다, 그런?”
“제 말을 듣긴 했어요?”
“비슷한 것 같은데요.”
“아, 진짜. 제가 살면서 처음 받은 제자인데 왜 이 꼬락서니에요? 잘 좀 해봐요.”
이쪽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화란과 내가 사물을 대하는 관점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이라는 건 너무나 거대해서, 말 몇 마디로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화란의 말은 거의 전부 허공을 부유하는 관념 몇 개를 느슨하게 쥐고 흔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고찰한 끝에 어쩌면 지푸라기의 변화가 검술의 차이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발상이 떠올랐다. 화란이 말하는 뜻이라는 건 어쩌면 단순한 기술이 아닐까?
그런 질문을 던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화란이 다시 정수리를 내리친다.
이번엔 아프다.
비명까지 지르는데 화란은 호통으로 답례했다.
“어리석은 놈! 어찌 자신의 뜻을 남에게 물어 구하려고 하느냐!”
“무슨 말투예요, 그거.”
“스승님 흉내요. 이렇게 하면 금방 이해하던데 다들.”
진심인가.
“뭐, 당장 깨우치지 못해도 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돼요. 걱정 말아요. 당신보다 더 머리 나쁘고 고집 센 아이들도 맞으면서 배우면 일주일 안에 기본 정도는 따라하게 되니까.”
그러면서 가학적으로 입맛을 다시며 내 장우산을 잡아주는 화란.
스승을 잘못 모시게 된 건 아닐까 걱정이 치밀어 오르는데, 나중에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푸라기에 뺨을 베인 그날 밤에 곧바로…… 풍월검도의 지정능력을 익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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