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017. 우리 딸이 너무 강함 (4)
* * *
앞발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거기서 멈출 리가 없지. 부드드득.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앞발이 내 목을 조여왔다.
짓이겨 터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목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상처입지 않는다.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은 늑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클로로 눈을 찍어 내렸다.
“큭!”
나와 늑대가 같은 타이밍에 같은 잇소리를 냈다. 클로는 위압에 가로막혀 관통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상처는 남겼다. 울부짖는 늑대가 앞발을 허우적거리다가 나를 집어 던져버렸다.
그 순간만큼은 투포환이 된 기분이었다. 날아가면서 나무를 서너 개는 부러뜨렸거든.
그대로 지쳐 쓰러져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랑이 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내가 달려나가기 시작하자 늑대는 내 목표를 파악했다. 놈은 땅굴에 반쯤 파묻힌 랑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거리로 따지자면 놈이 더 가깝다. 그리고 달리는 나보다 더 빠르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질겁한 내가 랑에게 가해지는 피해를 내 쪽으로 돌게 만들었다.
그러나 늑대의 손길이 더 빠를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랑은 건틀릿으로 늑대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나, 민폐 아니야.”
위압도 없는데 미약하게나마 타격이 먹혀 들었다.
아마 위압이 없어서 완전히 무시하고 달려 들었기 때문에 본래라면 안 입었을 피해를 입었겠지.
그 사실에 어리둥절한 늑대를 앞에 두고 랑의 겨드랑이에 팔을 쑥.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뭐야, 이 촉감은. 뭔가가 죽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손끝에 감돌았다.
무시하고 랑을 다 뽑아낸 뒤에야 그 감각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랑의 치마가 다 찢어졌다.
거의 그냥, 뭐, 허리에 감는 부분만 빼고 전부.
허벅지는 물론이요 팬티까지 그냥 보일 정도.
근데 왜 프릴 붙은 검은색── 하고 생각하는 순간 랑이 내 볼을 꼬집었다. 불굴로 피해 경감을 동기화하면 동기화 대상 간에는 피해를 입히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볼이 엄청 아프다! 늑대한테 던져질 때보다! 그렇게 갑자기 적이 늘어난 가운데, 늑대가 우리를 돌아보았다.
뭐가 됐든 지금은 상황을 이해시켜야만 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쳐도 못 이긴다.”
“……눈이나 떼고 말해.”
“안 봤어!”
“보고 있어.”
“네가 보지 말라고 하니까 자꾸 거기로 눈길이 가잖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이 나는 것처럼.”
“공익, 혀가 길어.”
“저번에 수영복 시착할 때는 뭐라고 안 했잖아?”
“패, 팬티하고 수영복이 같아?!”
“달라?!”
“그냥 죽어! 죽어!”
그러면서 구둣발로 발길질을 시작하는 랑. 그럴 때마다 다리가 들어 올려지면서 더 많이 노출될 뿐이다.
보고 있기 민망해서 시선을 훽 돌리니 랑도 다시 정면의 늑대를 향한다.
뭐랄까. 그렇게까지 휑하니 하반신을 노출하고 있으니 무슨 특수 전투 복장 같구나.
뭐, 이제부터 전투 복장이 되긴 하겠지.
우리는 함께 늑대를 마주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위압.
굳이 따지자면 바롱과 비슷한 수준이다.마침 체구도 비슷하고.
그때는 유의 도움까지 곁들여서 극적으로 이길 수 있었지. 하지만 여기 있는 랑이 그 정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도망인데, 속도를 감안하면 역시 도망은 무리고.
“소영이 찾아야 돼.”
“……까무잡잡 꼬마는 몰라도 걔네 아빠한테 이 복장 보여주기는 싫어.”
그건 나도 좀 싫네. 근데 어쩌겠어.
“일단 최대한 소란 피우면서 싸운다.”
“어떻게?”
랑이 그렇게 물은 순간 늑대가 특유의 아우 하는 하울링을 시작했다. 귀가 찢어지겠다 싶을 정도로 큰 소리.소란은 알아서 피워질 것 같네.
근데 그건 그렇고, 늑대가 하울링을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동물농장에 너무 자주 나와서 누구나 알고 있단 말이지.
우다다다, 무엇인가가 달려오는 소리. 기다리던 소영의 발소리만큼 큰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파계종들이었다.
못해도 십수 마리, 넉넉잡자면 수십 마리. 이렇게 되면 소란 같은 거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끝장난다.
물러서자고 해도 퇴로는 이미 가로 막혔다.
그때 곁에서 뭔가를 막지고 있던 랑이 내게 물건 하나를 던져줬다.
휴대폰이었다. 수신자는 [까무잡잡네 아빠]. 신호가 가고 있었다.
근데 아까까지만 해도 안 됐는데? 하면서 자세히 보니 카카오톡 통화였다. 데이터 통신은 터졌던 거냐.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게 어디야. 나는 반색하며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그런데 통화 대기음이 끝나고 전화를 받은 것은 휴대폰 주인 세형이 아닌 소영이었다.
무슨 상황인가 듣자 하니 저쪽은 세형과 떨어졌는데, 그 휴대폰을 유튜브 보던 소영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지금은 세형이 없어서 변신이 더 안 된다고. 아버지가 없으면 멘탈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소영의 지원 가능성조차 사라져 희망을 잃은 우리. 그런데 돌연 발 밑의 땅이 덜덜 떨리더니 그 밑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나왔다.
두더지인가, 아니면 신종 파계종인가. 나는 후자일 경우를 대비해 땅을 향해 클로를 흙더미 속으로 겨누었다.
날을 이용해 안쪽을 갈라놓기 직전에야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쏙, 하고 머리만 내밀어서. 그리고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두더지도 파계종도 아니라 세형이었거든.
그쪽이 왜 거기서 나오세요.
“아, 적당히 숨어 있다가 끝났다 싶으면 나갈 생각이었어요.”
그러시구나.
따지지 말자. 어쨌거나 세형이 왔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고. 나는 수화기 너머로 소리쳤다.
“소영아, 들려? 아빠 여기 계셔!”
그런데 대답은 없고 전화가 툭 끊겼다. 뭐지. 세형의 존재유무는 사실 핑계였나, 싶을 무렵이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뒤덮은 것은.
괜히 손을 이마에 얹고 거룡을 올려다 보는 세형. 그는 어느새 흙더미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는 무슨 맹금류 관찰하는 조류 전문가 같은 눈빛을 하고 자기 딸(드래곤)을 주시했다.
그러더니 소영의 입 주변을 가르키며 말했다.
“다들 머리 위를 조심하세요. 쏘영이가 브레스 쏩니다!”
그걸 왜 이제.
***
한 차례 불난리 끝에 파계종들이 모두 도망쳤다. 브레스를 퍼붓던 소영은 비틀비틀 착륙하더니 곧 평소의 꼬마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냥 돌아온 게 아니고 대 자로 드러누워서. 갑자기 웬 드르렁인가 싶었는데, 남은 지정력 다 써서 브레스를 갈겼던지라 체력이 동났다고 한다.
주춤주춤 따라온 세형은 여기저기 많이 다친 데다가 워낙 저질 체력이어서 소영을 들쳐맬 여유가 없었다.
결국 소영의 운반은 내 몫이었고.
파계종 던지기를 당한 기억 탓에 기분이 상했는지 소영은 괜히 투덜거리긴 했다.
하지만 뭐 어쩌겠어. 자기 팔다리 하나 가눌 기운도 없다는데. 그렇게 소영이를 픽업.
랑하고는 달리 제대로 등에 업어줬다. 업힌 소영은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문득 하반신 탈의의 랑을 발견하고는.
“야산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미친 변태들아…….”
북한산 하나에 발랑 까진 꼬맹이만 둘이네. 오해야 어찌됐건 창피해 하고 있는 랑을 위해 코트를 벗어줬다.
좀 춥지만 등에 짐짝 하나 매달고 산을 내려갈 걸 생각하면 큰 문제 없겠지.
그러니 그건 그렇다 치고.
“누가 이긴 거예요?”
아까는 랑이 다쳤기 때문에 우리가 탈락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땅을 파고 나왔을 때의 세형도 다쳐 있었다.
둘 다 걷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의 경미한 부상이었지만 상처의 정도 자체는 세형이 조금 더 심하다.
따라서 부상의 강도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세형의 탈락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일한 시점에 부상을 입었다고 쳤을 때의 경우이고.
문제는 정작 중요한 부상 발생의 시간대는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오리무중이 되었다는 건데.
“저는 솔직히 괜찮다고 생각해요.”
세형이 먼저 말문을 텄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실력은 충분하다고 보고요. 둘 다 상처를 입었다는 건 결국 쏘영이와 한나진 씨의 실력이 비슷하다는 방증이니까요.
그러니 쏘영이가 제 호위를 맡아주는 판국에 한나진 씨를 거절할 이유는 없죠. 물론, 쏘영이도 찬성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요.”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세형. 자연스럽게 볼은 소영에게로 굴러갔다.
그러자 소영은 내 등에 업히면서 두르고 있던 팔을 더욱 꽈악 조이면서,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파계종 던지기 왜 했어, 여중생 치마 벗기는 놈아.”
콧바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동작을 최소화한 속삭임이어서 나 말고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이 조그마한 드래곤이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형성된 긴장감은, 소영이 내 귀를 잘근 씹으면서 녹아내렸다.
“오빠가 진짜로 바롱 잡았어요?”
“너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
“아빠한테는 반말하는데 오빠한테만 존댓말 하면 아빠가 삐지잖아요.”
그건 그렇지.
“바롱 얘기는 아빠가 해줬어?”
“누가 잡았는지는 말 안 해줬어요. 근데 어젯밤에 안 자고 있었으니까.”
나는 흘깃 세형을 돌아보았다.그는 걷는 것도 벅차서 소영과 내가 떠드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감이 좋은 랑은 이미 내 등 위의 꼬맹이를 노려보기 시작했고. 뭘 경쟁자 대하듯이 적의를 드러내는 거냐고.기운 없다니까 잠깐 업어주는 것뿐인데.
게다가 네가 서너 살은 언니겠다.
뭐, 그런 건 나중에 얘기해두기로 하고.
“어머니는 안타깝게 됐다.”
“……괜찮아요. 아빠가 있으니까.”
“그래.”
“그리고 오빠도 있는 줄 알았는데…… 파계종부터 던지질 않나.”
“야, 그건 승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오빠야, 추하다.”
“이기려면 추해져야만 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이 어떻게 바롱을 잡았나 몰라요.”
그러면서 다시 내 귀를 합, 하고 물어버린다. 이번엔 혀까지 닿아서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질렀는데, 과연 눈치 없는 세형도 이번에는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돌아본 그곳에는 자기 딸(10대 초반 추정)이 외간 남자 등에 업혀 귀를 빨아대는 잔혹극이 펼쳐져 있었고.
돌처럼 굳은 나.
그와 반대로 유연하게 폴짝 뛰어서 밑으로 내려오는 소영.
“나도 찬성. 앞으로는 내 말 잘 듣는다고 하니까.”
뭔가 이상한 조건이 붙은 데다가 나를 대하는 세형의 시선에 정체불명의 경계심이 더해졌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
세형은 소영의 허가가 떨어지자 강경파 노선에 올라타기로 결의했다.
때마침 산길도 완만해져서 세형은 소영을 억지로 들쳐 업으려고 했다가, 결국 체력 부족으로 떨어뜨리며 유쾌하게 소리쳤다.
국밥 먹으러 갑시다! 그러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소영은 방방 뛰며 세형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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