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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45화 (45/112)

〈 45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3)

* * *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의분에 가득차서 그것을 망각해버리면 안 된다.

형편 좋게 굴러가는 일이라고는 없으므로 무슨 일이든 세 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삼사일언(三?一?)이라는 좋은 말도 있지 않은가. 오늘은 언(?)대신 행(行)이 됐을 뿐이다.

“여기서 들어서는 거리를 알 수가 없군요.”

폴트는 창문을 닫으며 판가름했다.

그러나 폴트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을 닫기 직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어린아이가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영어였다. 헬프 미, 헬프 미, 영화 속에서 종종 등장하던 그 외침이 현실이 되어 귓가를 때렸다.

누군가를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굳이 큰소리로 부르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아무리 소리친다고 해도 결국은.

“정신 차려.”

랑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여기까지 한 번 생각(一?)했다.

“폴트, 방금 뭐라고 했어?”

“여기서 거리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중화면으로 상황을 비출 수가 없다는 겁니다.”

“좌표를 알아야만 해?”

“그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주변 지형지물이나 등장인물에 관한 단서 같은 게 있어야 합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어떤 정경을 연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젠장, 저 지금 꽐라입니다. 한국어도 불편할 지경이군요.”

“그럼 일단 소리 나는 방향으로 가까운 지역이라도 보여줘. 그건 가능하지?”

폴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떠오르는 것은 예의 트라팔가 광장 분수대의 인근지역.

이터라고 소개된 다리 없이 살덩어리에 팔만 달린 괴기한 파계종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릿수는 대략 열 마리가 조금 넘는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서 광장 너머로 향하는 망가진 대로에는 훨씬 더 많은 이터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숫자로 세는 것의 의미가 없어질 지경으로 불어난 이터들이 쓰러진 가로등이나 기자재를 천천히 뜯어먹고 있었다.

도로의 상황을 종합해 보자.

광장 건너 어딘가에 있을 어린아이가 살아남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이 떨어졌을 무렵, 나는 다시 창문을 열어 젖히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들린다. 헬프 미, 라고.

하지만 저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저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나는 알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아.

랑은 분명 그렇게 해서 목숨을 건졌지만 그건 내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 내가 결심했기 때문에.

내가 아무 생각도 밑도 끝도 없이 덤벼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기서 우선순위를 계산하고 있다.

이래서야……마치.

여기까지 두 번 생각(二?)했다.

“흉물은?”

물었다.

“그 괴상한 녀석, 런던에서 위험에 처한 사람이 생기면 찾아온다며.”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언제나 적재적소에 영웅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밤도 그런 거야?”

“장담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미쳐버리겠군.

다시 물었다.

“저쪽 화면은 찾고 있어?”

“노력 중입니…… 아, 찾았습니다.”

허공에 슬라이드쇼처럼 흘러가는 화면들을 무수히 띄워놓은 폴트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폴트는 손을 쓱 휘두름으로써 모든 화면을 일순간에 지워버렸다.

내가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폴트를 바라보자 그녀는 작아진 목소리로 해명했다.

“안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장난 쳐?”

“장난으로 보입니까.”

폴트가 안면에서 감정을 싹 거두었다.

이쪽은 마른세수.

너무 흥분했나.

아니.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하지.

바깥에서 계속 소리가 들리고 있다. 도와달라고. 그게 게임 배경음처럼 기본으로 깔려서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알았어. 미안해. 지금 좀 당황해서. 그래도 화면은 보여줘.”

“보여주지 마.”

랑이 끼어들었다. 내가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답지않게 기죽지 않고 랑은 또렷이 고개를 저었다.

“폴트가 생각이 있어서 보여주지 않는 것.”

“어떤 생각.”

“너, 지금 상황을 눈으로 보면 뛰쳐나갈 거야.”

달라진 인칭대명사. 단어에 의도를 끼얹을 줄 알게 됐구나.

성장을 칭찬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자. 지금은 칭찬보다 더 알려주는 게 급한 단계이니까.

“난 여기에 남아서 너를 지킬 거야. 그게 내 일이니까. 그래서 아직 여기에 남아있는 거고.”

“거짓말. 그런 이유 아니야. 무턱대고 나가면 바깥에 있는 사람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여기 남았어. 틀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

“그야 나는 공익을 잘 아니까.”

미치겠군.

“그럼 그냥 아는 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어?”

랑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길지 않았다.

“나한테만 그렇게 행동해. 나를 위해서만. 내가 아는 네 모습은 그런 것.”

나도 입을 다물었다. 매우 길었다.

그러나 바깥의 목소리는 끊어질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짧았다.

따라서 시간은 압축적으로 흘러서 마치 단숨에 대답한 것 같다는 착각을 줬다.

받아치는 나의 목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렸다.

“그건 틀린 말이야.”

“어디가 틀렸는데?”

“천천히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화면이나 켜줘. 부탁해. 폴트.”

“안 돼. 폴트. 켜지 마.”

폴트는 난처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저한테 어쩌라고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즉각 반박했다.

“저 녀석은 더 이상 네 주인이 아니잖아. 그런데 나는 네 친구고.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앗.”

“뭐,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게 그나마 합리적이겠군요.”

화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어린아이의 얼굴이. 확대된 채로 시작해서 원경까지 비추도록 축소됐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덟살 정도 될까한 어린아이가 하단부가 망가진 계단에 위에 올라탄 채로, 그 밑에서 몇 번이고 뛰어오르는 이터들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광경.

어린아이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

그 아래에서 이터들의 입이 쩍 갈라지며 무엇인가를 먹어버리려 하고 있고.

나를 잡아 잡숴라, 아주.

여기까지 세 번 생각(三?)했다.

캐리어를 열었다. 늘 갖고 다니던 클로를 움켜잡았다.

[무구지정: 뒤틀림날]

“폴트. 가방 좀 지켜줘.”

“얼마든지요.”

바롱의 눈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간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불길한 복선까지 제거해두고.

벗어뒀던 코트를 걸치자, 꼬리처럼 달라붙는 무언가.

“나가지 마.”

“A­등급한테도 안 죽었어.”

“다쳤잖아.”

랑은 울상을 지었다.

“죽지 않았지만 다쳤어. 그런데 네가 지금 다치면? 그러면 나는 혼자 남아.”

“널 혼자 둘 정도로 다치겠다 싶으면 그냥 돌아올게.”

“아예 다치지 않을 수는 없어?”

고개를 저었다.

랑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자기 언니 같은 톤으로 쏘아붙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행동해?”

잠깐이나마 말을 잃었다.

하지만 대답해줄 것은 아까 준비해뒀다.

“이렇게 해야 네가 아는 내 모습이 튀어나오지.”

“어떤 모습인 줄은 알아?”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을 도와주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는 대학생.”

어쩌면 이제는 직장인일지도 모르고.

코트의 끝을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달라붙지 않았다.

***

바깥을 나서자마자 두 마리를 조우했다.크기는 스컬터와 유사하거나 조금 작다.

그러나 달려드는 폼에서 큰 차이를 느꼈다. 스컬터가 들개와 유사하게 팔을 위로 솟구쳤다면 이터는 낮은 키를 감추지 않고 직선상으로 돌진했다.

스컬터 탓에 파계종만 마주하면 내 허리라인 위를 스치듯 베는 버릇이 있었던 나는, 솔직히 초장부터 당황했지만.

[행동지정: 주변왜곡]

끌어당기듯 그대로 몸을 내빼 이쪽으로 더 가까이 들어오게 만들었다.왜곡력이 생기며 일대의 공기가 강하게 일그러졌다가 터지듯 흩어진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이터 하나가 그대로 갈려나갔다.

옆에서 한 박자 늦게 끼어들었던 녀석은 휘청대다가, 지익, 클로 날에 두 동강.

이어서 물풍선처럼 터진 이터의 몸뚱이 사이로 그간 먹어치웠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소형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습성까지 겹치는 건 불행이고.

두 놈이 비명횡사하자 멀리 떨어져 있던 몇 마리가 이쪽으로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탐색하려는 듯 멀뚱멀뚱 서 있었던 녀석들이다. 지금은 아무튼 먹을 수 있으니 됐다는 식으로 꾸물꾸물 기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줘야 할까.

일단 바깥으로 나오니 어디서 도와달라고 외치는지는 알겠다. 광장 너머 낡아빠진 백색 구조물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음방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직까지 계단 위에 계신 모양이고.

직선로로 쭉 달린다면 일단 눈에 보이는 이터만 열 마리 정도 조우한다.

문제는 그 너머에 갇힌 어린애까지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까 영상에서도 그랬지만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 영웅을 불러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파계종 어그로만 끌고 끝나지.

무엇보다도 한월이는 인천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활동범위도 기껏해야 국내.

프랑스에 접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여기는 런던이다.

같은 유럽이라고 해도 어떻게 우연찮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올 수는 없는 것이다.

암만 편의주의적인 존재라고 해도 어디에든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내 휴대폰은 고장 난 데다가, 한월이 번호까지 이미 지웠잖아.

그런 도움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여기에 있는 내가 “큭!”

생각이 절단됐다.

“무슨……!”

빠르게 스치는 발톱.

시야가 달빛과 뒤섞여서 번뜩였다.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이터들이 코앞까지 기어온 것이었다.

다시 클로를 들어 어떻게든 하나를 베어가르지만 그 이후로는 역부족.

발톱질에 돋아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자 환부 아래로의 감각이 아득해졌다.

큰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도중에는 사소한 부상도 뼈아프다.

클로를 바닥에 내리꽂듯 수직을 갈라버렸다.

[행동지정: 인근와해]

모여든 이터들이 1­2 미터를 밀려나간다.

인근와해에 의한 실질적인 데미지는 제로에 가깝다. 말 그대로 이 주변을 와해시켜 도망칠 틈을 벌 뿐이니까.

지금은 그럴 여유조차 거의 없다. 스컬터 서너 마리가 몰려들었을 때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지. 지금처럼 탁 트인 장소에서 수십 마리의 모르는 적들을 상대로 어떻게.

“젠장, 어떻게 해야…….”

터득했던 자기지정을 사용하면 당장의 위기는 벗어나겠지. 하지만 지정력이 순식간에 소진될 것이다.

바롱에 맞서 싸웠던 날도 그랬다. 싸움이 끝난 직후에 지정력이 바닥 나면서 기절했다.

그날 이후로 내 지정력에 대단한 격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도 그때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기절해버리면 쉽지 않지.

전방을 박차고 달렸다.

[행동지정: 인근와해]

다시, 없는 힘을 줘서라도 질주해서.

그래도 몰려들면.

[행동지정: 인근와해]

갑자기 심장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지금까지 경험을 비추어 보았을 때 단기간에 연속해서 펼칠 수 있는 인근와해의 횟수는 대략 다섯 번 정도.

아까 주변왜곡까지 사용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제 앞으로는 한 번의 기회가 남았다.

평생 가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트라팔가 광장을 횡단하며, 어떻게든.

[행동지정: 인근와해]

목소리가 코앞까지 닿았다.

목소리의 근원지로 추정했던 새하얀 유럽식 건조물.

물론 원래의 설계자는 이따위 건물 오래전에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그걸 대신해서 고아들이라도 써먹고 있었던 거겠지.

앞을 가로막는 나무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도와주세요…….]”

멍하게.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어떻게 여기 있을 수가 있느냐고, 정작 그렇게 불러댔던 주제에.

낡은 천을 옷이랍시고 둘러 입은 아랍 계통의 여자아이였다.

커피색 피부에 땀이 번들번들 묻어나는 채로 계속해서 이쪽을 무슨 귀신 보듯이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방긋, 아니 그보다는 훨씬 더 환하게.

환하게 웃었다가.

소리쳤다.

“[피해요!]”

지하 아래로부터, 무엇인가가.

아니. 거창한 수식어 같은 건 집어 치우자. 내 스타일 아냐.

무엇보다 괜히 겁이 나니까 담담하게 말하자.

대형 파계종이 나타났다.

***

당연하게도, 대형이 소형 혹은 중형보다 강하다.

덩치가 큰 만큼 피해를 입히는 범위가 넓다. 이제 막 B등급을 어거지로 달성한 나로서는 상대해본 경험도 없다.

그런 것들으 처리할 수 있는 이들은 따로 정해져 있다.

가령 여기에 새카만 칼날들 팀이 있었더라면.

아니지. 그건 상황이 너무 재미없어지니까 조금 축소해서 유가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저기 계단 위에서 영어로 조잘거리는 꼬마아이는 벌써 목숨을 건졌겠지.

하지만 여기에 있는 건 모든 능력치가 균형 잡히게 B등급인 준수한 지정능력자가 아니다.

별로 세지는 않은데 일정 이상의 피해를 입지도 않는 성가시고 황당한 지정능력자일 뿐이고.

“씹어 먹겠네!”

연상되는 동물은 곰. 다리가 여섯 개인데 두 개로 직립했다가 다시 주저앉았다가 하는 점이 그렇다.

다만 곰보다 상황이 나쁜 점은, 이미 설명한 대로 다리가 여섯 개라는 것.

두 개를 서 있는 데 사용한다고 해도 상대해야 할 다리가 아직 네 개나 남아있다.

그나마 이 괴물한테서 희망을 찾아보자면 대형종으로 분류하기엔 좀 애매하게 크다는 건데.

그대로 튕기듯 뒤로 빠졌다.

하지만 뭐랄까, 어디가 부족했는지 제대로 피하지는 못했다.

곰을 닮았지만 분명 곰 따위는 가볍게 이겨먹을 것 같은 주먹이 내 얼굴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커피색 꼬마아이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니. 아직 비명 지를 것까진 없는데.

“그래……. 그냥 오늘 졸도하고 끝내자…….”

버티고 섰다.

받아낸 물리적 충격과 무관하게 나는 의외로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본 커피색 꼬마아이는 일순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다음에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대단한 호응이네.

실상은 이것도 자기지정을 익히면서 따라붙은 패시브 같은 거란 말이지.

‘지정’을 가하지 않으면서 간단한 염동력을 휘두르는 유처럼, 뜬금없는 기습에 한 차례 정도는 견딜 수 있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다.

하긴. 행동지정 몇 개를 익히는 데에 꼬박 1년이 걸렸으니 연비도 나쁜 기술을 단기간에 완벽하게 익힐 리가.

그래도 어쨌든 버텼다. 의외로 멀쩡하게 버텼어.

문제는 여기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건데.

“하이고.”

푹, 한숨을 쉬었다.

돌연, 수많은 것들이 땅 아래에서부터 기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 아까 영상에도 보였던 이터들 다 어디 갔나 싶었다. 영국 파계종들은 이제 땅도 파고 다니는군.

하긴 대동여지도 작성이랑 런던 지하철 개통이랑 몇 년 차이 안 난다며…….

커피색 여자아이는 내가 뭔가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했는지 ‘본때를 보여줫!’ 하는 얼굴을 하고 있고.

그런데 말이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

시야가 흔들렸다가, 곧 일그러졌다.

커피색 여자아이의 얼굴도.

그리고.

그 다음에는.

***

멀리, 빅벤으로부터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장소는 트라팔가 광장 인근의 무너진 교회. 청교도들이 사라진 교회에 남은 이들은 없다. 밤을 지키던 동물들은 도망쳤다.

들쥐조차 이곳을 서식지라고 여길지언정 터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이곳에 뿌리를 박아,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하나만으로 살아남길 기도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청교도가 아닐지라도. 어쩌면 사람조차 아닐지라도.

그래도 살아남고자 하기에.

묵빛이 야광처럼 캄캄한 어둠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그대로 교회의 천장을 짓밟고, 그 밑에서 위협적인 거구를 휘두르던 대형 파계종조차 분쇄하며 나타나는 것은─── 파계종의 팔을 가진 괴인.

뒤틀린 양쪽 팔을 움찔거리던 괴인은 파계종을 보았을 때보다도 겁에 질린 소녀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마치 속삭이듯 온화하게.

“[흉물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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