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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46화 (46/112)

〈 46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4)

* * *

흉물이 취한 동작은 간단했다.

우선, 작렬하는 핵병기처럼 지상에 발을 내리꽂아 대형 파계종의 신체를 짓눌러버렸다.

그러자 대형 파계종의 몸 한 가운데로 통로가 만들어졌다.

과장도 비유도 아니었다. 등을 밟아 가슴으로 나온 흉물이 지면에 섰다.

몇 초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발생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이터들이 정지했다.

그러나 흉물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소녀에게 말했을 때, 이터들은 흉물의 말을 부정할 필요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병 걸린 늑대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몸의 절반을 구성하는 입을 벌리고 그대로.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정말로 없었다.

길게, 팔이.

붉은색이었다.

앞으로 내뺀 붉은 왼팔이 이리저리 뒤틀리더니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검.

족히 2미터는 되는 대검이다.

빛을 받지 못하는데도 번뜩거렸다.

그리고 그 빛은 이터들에게 더 강한 자극을 가했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는 이터들.

소리와 함께 이터들은 무엇도 찢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일섬.

흉물의 검완??이 세 마리의 이터를 두 동강냈다.

그러나 고작 세 마리에서 그치지는 않는다.

그의 몇 배나 되는 수의 이터들이 당장 이곳에 있다. 검 하나로는 온전히 그것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흉물은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이번에는 샛노란 오른팔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곧, 커다란 짐승의 팔로 변하였다.

양쪽에서 달려드는 수많은 파계종의 절반은 몸이 두 동강 났다. 나머지 절반은 짓눌러 터졌다.

충격적일 정도의 학살극.

나는 A등급 지정능력자인 한월이 종횡무진 상당수의 저급 파계종을 쓰러뜨리는 것은 보았다. 그럼에도 한월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 흉물은 마치, 성가신 벌레를 쫓는 듯이.

물론, 한월에게도 불가능한 묘기는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네 배 이상 가속해서 움직일 수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날벌레 쫓듯이 스컬터들을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한월이 파계종을 쓰러뜨려야할 ‘적’으로까지 상정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

그건 반대로 흉물에게도 적용되는 논리였다. 흉물이 저렇게 무심하게 파계종을 쓸어낼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파계종을 버러지 따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괜찮은가.]”

문득, 흉물이 나를 돌아봤다.

그 너머에 파계종은 없었다. 짧은 생각이 이어졌던 2분 내외의 시간 동안 흉물은 십수 마리의 파계종을 쓸어버렸다.

그리고 태연하게 내게 묻고 있었다.

괜찮냐고.

“[괜찮다.]”

“[지정능력자인가?]”

“[보다시피 그렇다.]”

“[그러면 나도 보이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휘두르는 지정능력과 파계종이 휘두르는 파계능력은 근본이 같다.

하지만 방향성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걸 지각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가지각색. 나를 예로 들자면 내게는 인간과 파계종의 능력이 같은 곳에서 시작해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같은 위치로 도달하는 원 도형같이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흉물의 능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파계종의 힘.

“[파계종의 신체를 몸에 붙였나?]”

“[고위 지정자는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많이 아는군.]”

“[주워들은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너를 인간으로 봐도 되겠나?]”

“[슈트 안의 모습을 보지 못했지 않은가.]”

확실히…… 보지 못했다.

체형으로 봐서는 아마 젋은 남성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슈트 자체가 조형적으로 무너져 있어서 알기 어렵다.

영화 속 아이언맨이나 블랙팬서 같은 깔끔하고 인간적인 외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의미로 흉물스럽다.

목소리조차 변조하고 있어서 이게 과연 사람이 맞는지, 사실은 바롱처럼 인간의 모습을 한 파계종인지 어떤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므로.

“[안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나를 구한 셈이다.]”

“[그렇게 볼 건 아니다. 나는 저 아이를 구하려 왔는데, 네가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아시아 사람들은 이곳에서 처음 본다. 보통은 다 유럽 혹은 아라비아 계통이다.]”

“[우리는 이곳의 난민이 아니다.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머무르기로 했다.]”

“[운신할 처지가 되겠나?]”

“[아까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숨어서 지내려고 했는데, 나도 여기 어린아이가 있어서 올 수밖에 없었다.]”

“[멋있군.]”

너는 사람 민망하게 하는군.

영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자기감정 표현이 너무 강하단 말이지.

사람 앞에 ‘오오, 가엾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수식어나 붙이는 식으로.

내가 민망하게 뺨을 긁적거리고 있자 흉물은 천천히 커피색 어린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처음에 그 아이는 흉물의 양팔을 보고는 다소 당황해서 선뜻 아래로 내려오지 못했다.

흉물은 낮은 목소리로 웃더니 양팔을 뒤로 감추었다.

등 뒤에서 그것들은 색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사람의 팔과 유사한 형태로 돌아왔다.

그러자 커피색 여자아이도 안심하고 흉물의 품에 안겼다.

흉물은 다시는 이런 곳에 돌아다니지 말라느니 하는 말을 몇 마디 던졌다.

아이는 명랑하게 그러겠다고 약속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내 앞에 달려오기 전까지는.

“[(해석불가)……어요! 그리고 (해석불가)! (해석불가)가주세요!]”

어…….

예?

아이가 명백히 나를 향해서 입을 열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답게 혀가 짧은 데다가 자세히 들어보니 영국 특유의 딱딱한 억양이 아니라 해괴한 억양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까는 헬프 미, 라든지, 런! 같은 소리만 해서 괜찮았는데.

내가 당황하고 있자 어린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흉물이 입을 열었다.

“[자기 가족들에게 데려달라는군.]”

“[가족?]”

이어서 흉물이 통역을 하는 느낌으로 어린아이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모두 자기만큼 어려서 걱정된다고 한다. 확인을 하고 싶다는데.]”

“[흉물, 당신이 해주면 안 되겠나?]”

“[그것은 곤란하다.]”

흉물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방금 대형 파계종과 함께 파계지점이 사라진 듯하지만, 그래도 아직 소수의 파계종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쓸어버리고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날더러 가란 말인가?]”

“[저급 파계종 몇 마리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곤란하다. 내게도 일정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일정이 있는가?]”

“[기업과 관련된 것이다. 매우 중요한 일정인데, 문제가 생겨서 여기 체류하게 됐다.]”

“[기업?]”

흉물은 슈트 안에서 잠깐 고개를 기울이더니,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찝찝하게 ‘으으’하고 신음했다.

그리고 이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대화를 알아듣기에 긴장하고 있던 그 아이는 다소 신중하고 주눅이든 어조로 대화에 임했다.

흉물은 정중하게 물어왔다.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한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 아이를 도와줄 수 없겠나?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중에 꼭 보상하겠다.]”

“[나는 영국에 다시 올 예정이 없다.]”

“[하지만 당분간은 영국에 있겠지. 이것은 유용한 일이다.]”

흉물은 고개까지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쪽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나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다.

이해득실만 따진다면 솔직히 여기서 이 아이를 구해준 걸로 끝내는 게 맞지.

아이의처지도 처지거니와 흉물이 부탁한다면 거절할 도리가 없다.

저 괴인은 커피색 여자아이의 목숨만 건져낸 것이 아니라 나까지 같이 살린 셈이니까. 빚이 있는 것이다.

하릴없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흉물은 고맙다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줬다.

상황을 납득한 커피색 꼬마아이도 흐뭇하게 웃으며 내 허리 아래를 꽉 껴안았다.

그건 부담스러워서 좀 싫고…….

나는 꼬마아이에게 말했다.

“[나는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다. 발음을 똑바로 하라.]”

“[알았어요!]”

일단 대답은 참 밝은데…….

어쨌든 바로 이 앞이 폴트와 랑이 있는 안전지대니까 데려가서 폴트에게 통역을 맡기는 게 좋으려나.

아니, 그보다도 폴트는 이 상황 자체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그러거나 말거나 흉물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짐승의 것으로 변하는 오른팔이 착지를 도왔다.

토끼가 자기 신체의 몇 배를 뛰어오르는 식으로,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높은 배율로 뛰어오른 흉물은 순식간에 밤하늘에 올라탔다.

멀리로 사라져가는 검은 괴인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저놈하고의 대화는 수상한 복선들로 가득했어, 라고 생각하며.

***

“그 결과가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한심합니다.”

“너 오늘 한심하다는 말 되게 많이 한다?”

“한심.”

“너까지?!”

“사실 한심이 아니라 극혐. 얘는 도대체 몇 살.”

“물어보니까 아홉이라는데.”

“장난? 장난? 진짜로 장난?”

랑은 발길질을 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커피색 꼬마아이는 사람이 많은 밝은 분위기가 마냥 마음에 드는 것인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둘러볼 뿐이다.

공리주의에 근거해서 나머지 셋이 그 아이만큼의 고통을 나눠 받고 있는 거지.

나는 랑의 발목을 낚아챘다.

“가족이 있는 데까지 데려다주고만 올 거야.”

“생각이 없으시군요. 갔는데 없으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본인은 있다는데. [그렇지?]”

무슨 맥락에서 묻는 건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꼬마아이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폴트는 격하게 내 볼을 꼬집었고.

“[영어로 말하면 제가 못 알아듣습니까? 뭘 바랍니까?]”

“농담이었어, 농담!”

“[팔자 피더니 아주 여유가 몸에 스며들었습니다. 아주 기뻐 보이십니다?]”

“기쁘다기보다는 씁쓸하지.”

나는 꼬마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폴트는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볼을 꼬집던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말했다.

“그냥 달려 나가는 걸로 충분한 줄 알았다면 늘 달려 나갔을 텐데. 너무 늦게 알았네.”

“주제에서 많이 엇나갔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달려 나가는 게 바보같은 선택입니다.”

“자책하지 말라는 거야?”

“모시는 사람이 신경 쓸 만한 부분은 입에 담지 말라는 겁니다.”

폴트는 랑을 슬쩍 가리켰다.

랑은 내가 씁쓸하다는 소회를 밝힌 이후로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랑도 나에 관한 보고서를 읽었었지. 때문에나를 다소 부담스럽게 대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랑도 언급하지 않아서 그냥 잊은 듯이 서로를 대했다.

말하자면, 쪽팔린 경험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떠올린 셈이다.

나는 손뼉을 짝 쳤다.

“그럼 다시 본제로 돌아와서, 나는 얘 데려다주고 올게.”

“그럴 거면 여기는 왜 들릅니까?”

“그냥. 폴트가 관찰할 수 있는 건 영상뿐이라서 설명이 필요할 거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것도 허락을 맡아야 해서…….”

나는 랑에게 다가갔다.

“데려다주고 와도 돼?”

어느새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랑은 자기 발만 내려다볼 뿐이다. 걷어차겠지.

대비하고 있었는데 툭, 랑은 내 무릎 위에 부드럽게 발을 얹었다.

그리고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랑이 쏘아 붙였다.

“본가로 돌아가면 나랑 이야기 좀 하는 것.”

“어, 어떤 얘기요?”

“아무거라도…….”

랑은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가, 일순간에 빼며.

“왜 그런 성격이야. 네 죽은 여자친구 못됐어.”

내 허벅지를 발끝으로 슬슬 문지르다가 고개를 떨구고.

“미안, 방금 말은 너무 화나서.”

“아니, 괜찮아.”

“괜찮지 않아야 해.”

랑은 배까지 발을 올렸다.

“왜 화를 내지 않아. 따지거나 힘들다고 푸념하지 않아. 나도 하는데, 너한테.”

“랑, 나는.”

“그러니까 얘기가 필요해. 둘이서.”

잠시 말을 잃었다가.

“알았어. 꼭 얘기하자. 돌아가면.”

“응.”

랑은 발을 내리고.

“가 봐.”

“감사합니다. 주인님.”

다시 익은 홍시 모드.

“무, 무슨 주인님. 얼른 가!”

“네에.”

뒤를 돌았다.

커피색 꼬마아이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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