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2)
* * *
“잠깐 나갔다 올까.”
“밤 산책은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흉물을 만나보고 싶어.”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TV화면이 화이트노이즈를 흘리기 시작했다. 폴트는 신경질적으로 TV를 꺼버렸다.
마지막으로 마신 맥주 캔이 동나 있었다. 방 안 이곳저곳에 술 냄새가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듯했다.
폴트는 미묘하게 꼬부라진 혀로 투덜투덜 말을 이었다.
“용무가 있어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신 것 아닙니까아. 그쪽 일이나 신경 쓰시지요.”
“당장 안 되더라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여전히 소파에서 벗어나지 않는 채 고개만 이쪽으로 돌린 폴트가 흐응, 하고 코웃음 같은 소리를 냈다.
바깥 환경 이상으로 위험하고 불길한 징조인데, 이거…….
“[이래저래 꼬인 모양입니다?]”
“영어 쓰지 마라.”
“[싫습니다. 그쪽이나 한국어 쓰지 마십쇼. 여긴 영국 아닙니까.]”
“[굉장히 논리적이군. 그러나 부탁하는데, 제발 쓰지 말아 달라.]”
“[그러기엔 한나진 씨의 영어투가 지나치게 유쾌하지 않습니까.]”
“[TooTo 용법이라.]”
“[뭡니까, 그게?]”
“[영국인은 모르는 영어…….]”
아악. 또 수능에 관해 떠올랐어.
거부반응이 일어나자 더는 영어로 말을 이을 수가 없게 되었다.
화제도 돌릴 겸,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우리에 관해서는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다니, 뭐가 말씀이신지요.]”
“그냥, 뭐라고 해야 되나…… 뜬금없잖아. 갑자기 찾아와서 다짜고짜 방 좀 빌려달라고 하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제가 여기 처박혀 있는 건 개연성이 풍부합니까?”
다시 한국어로 돌아와 줬군.
“그런 건 아니지만.”
“따질 필요가 없는 일은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네…….”
“아니면 들려주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보다는 도움이라도 좀 줬으면 해서.”
“면목이 없군요.”
“염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거다, 그 상황…….”
무슨 차이입니까?
되묻는 폴트는 진심으로 이해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 미묘한 뉘앙스 차이는 나중에 설명해주기로 하고.
“아무튼 염치없이 굴어서 미안하지만, 혹시라도 머즐드독스에 연락을 넣을 방법이 없을까?”
“머즐드독스 총수의 차녀와 그 수행인이 그런 부탁을 하니 심히 당황스럽습니다.”
“일이 어떻게 꼬여서 연락이 안 닿거든. 원래는 출장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느낌으로 일단 영국지사에 오기로 했어.
그런데 영국지사에서도 우리 연락을 무시하고 있고 총수는 총수 나름대로 뭔가 술수를 써서 우리를 거부하고 있어서.”
“그분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는 건 딱히 유난 떨 일도 아닙니다만, 영국지사에서도?”
이후의 이야기는 업무상 기밀 같은 것이라서, 잠깐 망설였다.
결국 마일드하게 편집해서 전달하는 수밖에.
“그쪽이랑 본사랑 관계가 좀 틀어졌어. 총수와는 별개로 우리한테 무슨 압박을 넣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돈줄도 끊긴 모양이고.”
“그건 아마도 총수가…….”
“그래서 일단은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됐지.”
“한심하군요.”
비겁하게 팩트로 승부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어디서부터 지적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총수님께서는 일단 내린 조치나 명령을 어지간하면 거둬들이지 않으십니다. 기다린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나도 대강 느끼고 있어서, 그쪽에게 연락하는 건 포기했어. 문제는 영국지사에 연락을 취하는 건데 통화는 계속 거부되고 있고, 직접 가자니 찝찝하단 말이지.”
“저한테 커넥션이라도 요구하시는 것 같군요.”
“어떻게 안 될까?”
폴트는 이마를 짚더니 한숨만 푹푹 쉬었다.
“제가 들어드릴 이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맨입으로 그러십니까?”
의외로 협상가 타입이었나.
“뭐, 뭘 원하는데.”
“그런 건 그쪽에서 준비해야지요. 부탁받는 입장에서 대놓고 요구하자니, 예의범절에 어긋난 거 아닙니까?”
“하지만 한국식 예의범절에서는.”
“재차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영국입니다.”
크흑.
그런데 영국에서는 원래 부탁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보아야만 하는 건가? 그런 문화가 있는 거야?
뭔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반박을 하고 해도 나는 영알못에 저쪽은 영국토박이라 먹힐 리가 없고.
“술이라도 더 갖다 줄까?”
“흉물이 알아서 보급해줍니다.”
“그러면 뭐, 잡일이라도.”
“청소라면 사양입니다. 그런 건 제 손으로든 남의 손을 빌려서든 안 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요.”
“아니, 최소한 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해줄 수 있잖아. 봐. 저기 TV화면도 삐뚫어져 있고. 리모컨도 아까 집어던진 이후로 쓰레기더미 틈새로 빠져버렸고.”
“그 당연한 작업조차 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나 놀리는 거지? 그런 거지?
마음속에서 외치는 그 물음에 ‘그렇다’라고 대답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폴트는 눈웃음을 지었다.
하긴. 애초부터 어리석은 부탁이었어.
이 녀석은 메이드로서 생활은 다 집어치우겠다고 선언한 녀석이다. 메이드 시절에나 있었을 인맥이 왜 남아 있겠냐고.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마사지.”
폴트가 이죽거렸다.
“마사지 어떻습니까.”
“예?”
“마사지 모릅니까, 마사지? 아니면 이상하게 발음했습니까? 매썻취?”
“이보세요. 나를 놀리려면.”
폴트가 슬쩍, 이쪽으로 다가왔다.
더 자세하게 설명할까.
나는 아까부터 소파 끝 쪽에 걸터앉아 있었다. 폴트는 나를 향해서 발을 둔 채 조금 떨어져 누워 있었고.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 정말 짧은 시간동안 폴트가 몸을 뒤척이자 폴트의 다리는 어느새 내 다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솔직히 말하자면 안 씻어서 묘한 냄새가 나는.
아니. 냄새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렇다. 체취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다 큰 여자 몸에서 원래 나는 냄새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또 폴트만의 냄새가 있다.
담뱃갑과 맥주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 사이사이에 라벤더 꽃송이를 꽂아놓은 듯한.
폴트는 천천히 뒤를 돌아서, 엉덩이를 천장 쪽으로 향하게 한 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제대로 주무르면 도와줄지.”
“이것도 영국문화냐?”
“이래 뵈도 신사의 나라입니다.”
폴트가 안 어울리게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다시 다리를 비비 꼬았다가 풀어버린다.
또 체취가 진동한다. 좀 씻었다면 덜했을 텐데.
며칠 안 씻은 것 같은 몸으로 비비적거리니 코에 새겨질 정도로 진하고 어떻게 보면 향긋하고, 또 불쾌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따분한 감상이 우선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얍.”
“읏.”
등을 움켜잡았다.
훑듯이 등 라인을 타고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어깨 날개 뼈가 끝나는 지점까지 닿았다가, 다시 엉덩이골이 시작하는 부분으로 하강한다.
도발한 주제에 놀랐는지 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폴트는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또 표정도 보여주지 않는 채로 10초 정도 정지.
직후에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더니 소파 반대쪽 끝까지 도망쳤다.
이어서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 안는다. 웅크리듯이.
“하란다고 진짜 합니까.”
“그만큼 극한의 상황이야.”
폴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볼로 끌고 왔다.
나는 다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제 도와줘야지?”
“뭐, 약속은 약속이지요…….”
폴트는 취기가 도는지 부정확한 억양으로 그렇게 말했다.
“분명 머즐드독스와의 연락은 다 끊겼습니다만, 영국지사의 지사장을 모시는 친구를 사적으로 압니다. 그 녀석의 전화번호를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됩니까?”
“여기 네가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야…….”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고.
“저기, 미안하지만 도와주는 김에 휴대폰도 좀 빌려줘. 나랑 랑 거는 통화가 안 되서.”
“그것까지? 지금 제게는 휴대폰이 없습니다만.”
하이고.
머릿속에서 울리는 탄식을 폴트는 실제로 내뱉었다.
그녀가 이어 나갔다.
“여기서 멀지 않은 난민촌 중심지에 휴대폰을 대여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통조림 두 캔 정도면 어떻게 협상이 될 겁니다.”
“그것도 네가 어떻게 좀 해줄 수 없을까?”
“도대체 혼자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아니, 그냥, 영어로 협상하는 데에 자신이 없어서…….”
“이 빚은 기억해두겠습니다.”
마사지의 충격이 여간 컸는지 폴트는 이를 부득 갈면서도 도움을 약속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성은 참 좋은 녀석이야…….
“미안하니까 나도 동행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당장은 가기 힘들 것 같군요.”
“응?”
폴트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짚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꽉 채우듯 화면이 나타났다. 간만에 보는 다중화면이었다.
떠오른 수십 개의 화면은 폴트가 말한 그대로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 외부의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수십수백 개의 CCTV가 조금의 빈자리도 없이 외부를 감시하고 있는 덕택에 폴트는 파계종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파계종이군요.”
폴트가 몇몇 화면을 확대했다.
내셔널 갤러리로부터 제법 거리가 있는, 우리가 지나친 트라팔가 광장의 분수대 인근에 몇 마리의 파계종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종이었다.
“이터(Eater)라고 불리는 C급 파계종입니다. 그다지 강하지는 않습니다만, 유무기물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습성이 있어서 골치 아프지요.”
“대피라도 해야 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까지 찾아오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들어온다고 해도 오늘은 한나진 씨가 있지 않습니까.”
“나를 너무 믿는 건 좀…….”
“몇 마리만 들어온다는 전제를 깔아놨으니까요.”
그래. 내 약함을 고려해줘서 고맙네요.
“아무튼 오늘밤은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밤새 감시나 하게 되겠지요.”
“흉물을 만나려면 오늘이 적격이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뛰쳐나갈 생각은 없다.
물론, 자기지정을 익힌 지금의 상태에서는 스컬터 따위 수십 마리는 몰라도 십수 마리까지는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대처법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스컬터의 이야기.
달려들고 공격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는 처음 보는 파계종과 격돌한다는 것은 맞서 싸우는 감각 자체가 다르다.
게임처럼 스탯 겨루기로 압도하거나 밀리지 않는 게 현실이니까.
그리고 창피한 얘기 좀 할까. 나는 버팅기는 것만 B등급이지 공격을 꽂아 넣는 건 C등급 그대로다.
유효한 타격이긴 하겠지만 한방 한방에 다 썰고 다닐 수가 없다.
그냥 많이 얻어터지고 그만큼 많이 돌려줄 뿐.
따라서 몸을 사리고 기다린다.
“알았어. 그럼 좀 수고해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워도 돼.”
오늘밤이야 이대로 흘러가고.
우리에게는 항상 내일이 있으니까.
“저기.”
그때,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랑. 나와 폴트를 다급하게 둘러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그리고 그것이, 잊고 있던 것을 깨닫게 해줬다.
중요한 사실.
분명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어쩌면.
“멀리서 어린애 목소리가 들렸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