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008. 아니, 암만 그래도 그렇지
* * *
빈 방을 찾았다.
한때는 전시실 따위로 사용됐던 모양이다. 선반 따위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용도는 침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로군.
정돈된 매트리스부터 시작해 테이블로 개조된 전시선반까지, 이래저래 생활감이 묻어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는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았더니 전기가 멀쩡하게 흘러 나왔다. 갖출 건 다 갖췄군. (나중에 폴트에게 듣기로는, 난민들끼리 뭔가 장치를 마련해놓았다고 한다.)
짐정리를 끝마쳤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이 멍하다고 해야 할까. 잠에서 막 깬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었다. 도대체 누가 내게 폴트가 여기 있다고 알려준 것일까.
그간 폴트와는 연락이 끊겼으니 직접 물어봐서 찾아온 건 아니다.
폴트도 나와 대화할 때 그런 뉘앙스를 풍겼다.
그렇다고 내가 제 발로 런던까지 찾아왔다가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랑에게 물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녀석도 당혹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도달하게 됐는지, 랑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짧은 토의를 나눴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총수와 영국지사 모두가 우리를 거부하고 있었고, 결국 향후 행방을 정하기 위해 그동안 머물 거처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서…… 런던으로 왔다? 폴트를 만났다?
연결되지 않는다.
중간지점이 끊어졌다.
“아니, 뭐 특별히 상황이 악화된 것도 없지만…….”
아무튼 문제 상황 자체는 해결됐다.
충분한 물과 식량이 있고, 안락하다고는 말하기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을 시설이 있다.
이제 계속해서 총수와 영국지사에 연락을 취하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찝찝함에 관한 이야기.
가만히 듣고 있던 랑이 입을 열었다.
“지정능력자, 아니면 파계종.”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아마 정신계통. 근데 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유가 대체 뭐냐고. 개연성이 없잖아. 왜 친절하게도 우리를 안전지대까지 데리고 와서 기억을 없애고 사라진 건데?”
“으음…….”
랑은 괴롭게 신음했다.
그러다가 꼬르륵, 영 익숙하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가끔씩 튀어나오던 잘 익은 홍시 모드로 돌아간 랑이 배를 가렸다.
그리고 그 손으로 다시 얼굴을 가렸고.
그러다가 다시 배를……. 얼굴을…….
손목을 탁 붙잡았다.
“같이 먹을 거라도 찾아볼래?”
끄덕끄덕.
단순한 건 좋다.
재벌가 차녀 캐릭터라도 이런 부분에서 간편하게 넘어가주거든.
여기저기를 한참 뒤지고 쑤시고 돌아다니며 음식을 찾아댔다.
의외로 냉장고가 감추어져 있어서 거기 전부 보관돼 있었다는 허무한 결말을 맞았지만.
결과적인 소득만 나열해보자.
폴트가 어딘가에서 공수해온 것으로 추정되는 빵 몇 봉지와 나름 싱싱한 샐러드(포장된 제품), 훈제된 고기(이것도 포장).
기타 먹다 남긴 인스턴트 식품 잔뜩. 맥주 수십 캔과 보드카 서너 병.
도대체 왜 여기다 뒀는지 이해할 수 없는 담배 다섯 보루.
아주 알콜과 니코틴에 쩔어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근데 이건 뭐지?”
결국 음식만 빼내서 냉장고 문을 닫으려다가 정체불명의 흑갈색 소스통 하나가 눈에 띄었다.
랑이 그 소스를 보자마자 기겁을 하더니 “브, 브라운 소스! 열지 마! 열면 안 돼!” 하고 소리쳤다.
브라운 소스라면 보통 뷔페 같은 데서 싸구려 스테이크 따위에 토핑하는──
“세상에마상에 이게 뭐야…….”
킁킁, 랑의 말을 무시하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뚜껑을 도로 닫아 소스통 자체를 집어던져버리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브라운 소스의 것이 아닌 엄청난 냄새가 코 안쪽을 쿡쿡 쑤셔댔다.
“이거 뭐지? 썩은 건가?”
“아, 아닌 것. 저 소스, 원래부터 저런 냄새가 나는 것. 폴트가 맨날맨날 먹어대서 내가 분명히 맛알못이나 묻힐 소스라고 경고했는데도……! 그래서 간신히 사용하지 못하게 했는데도……!
폴트, 다시 타락했어.”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하다.
다시는 영국요리를 얕보지 않도록 하자.
“그럼 됐네. 일단 육안으로 보기에 상한 건 없는 것 같고. 포장식품은 유통기한도 많이 남아있고.”
“우응. 우물우물.”
“생각보다 풍족한 분위기잖아, 여기. 정말로 사람들이 사는 곳이긴 한가 보네. 아까 지나치는 길에 전자렌지도 본 것 같은데 어쩌면 훈제육도 제대로 조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우물우물.”
“듣고는 있냐?”
“응응.”
눈동자는 흐트러지지 않고 이쪽을 응시하고 있지만, 입은 바쁘게 움직인다.
식빵을 먹고 있었다.어디서 났는지 멀쩡한 케찹도 발라서.
아무런 조리도 안 된 식빵을 케찹 하나만 갖고 저렇게 맛있게 먹는 것도 정말 재주는 재주인데.
“너 의외로 잘 견딘다?”
“같이 있으니까 안심하는 것.”
“내가 같이 있어서?”
랑은 잠깐 망설이다가.
“공익도 그렇지만 폴트도.”
“좀 재수 없는 스타일로 변했던데.”
“옷도 너무 야해.”
“옷은 뭐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으라고 하고…….”
솔직히 보기 좋고…….
나도 랑이 먹는 빵 하나를 집어 들어 케찹을 묻혀 보았다.
어렸을 때 간식으로 먹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딱히 눈물의 재회를 할 마음은 없지만 감사히 먹어야지.
“그런데 이거 좀 신기한데, 폴트는 이걸 어디서 구했을까?”
“무슨 상관?”
“아니, 그냥 궁금하잖아. 돈주고 샀을 것 같지는 않은데.”
***
“흉물이 나눠줬습니다.”
“흉물이?”
새하얀 허벅지를 아무렇지 않게 벅벅 긁어대며 폴트는 말했다. 여전히 대화 상대는 안중에 없고 TV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며 난민과 고아들을 돕고 있습니다.”
“파계종만 처치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게 주 업무이긴 합니다만, 사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건 식량을 비롯한 각종 기자재를 배포하는 겁니다. 사용하셨을 냉장고나 전자렌지를 자세히 보셨는지요?”
“어, 못 봤는데요.”
“관찰력이 없군요. 한심합니다.”
이렇게 대놓고 딜 박는 여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폴트까지 이렇게 날카로워지다니 세상은 얼마나 각박한 것인지…….
“브랜드가 없습니다.”
“예?”
“애당초 시중에 판매되는 제품도 아닙니다. 제 추측이 맞는다면 흉물이 어딘가에 직접 외주를 줘서 구호물자를 만든 뒤 런던 시내에 무상으로 배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요.”
“동감입니다. 그저 도와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싼 외주를 맡겨가며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 필요도 없고, 또 구호물자를 그렇게 뿌려댈 재력이 있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여러모로 정체불명입니다.”
“정체를 숨기려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얼굴은 가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괴상한 금속질인지 가죽질인지 모를 슈트를 입고 다녀서.”
“어, 그 얘기는 처음 듣는데?”
“사진으로 못 봤습니까?”
“저도 잠깐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아마 런던 내부에 촬영 장비를 가진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보죠.”
“흠, 그럴 만도 하군요. CCTV는 고장 난 지 오래이니까요.”
폴트는 맥주 한 캔을 더 까며 수긍했다.
“그만 좀 마시죠?”
“같이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한 캔 정도는 도리어 여유를 가져다주지요. 맥주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허어.
엄청 설득력 있는데.
“그, 그럼 한 모금 정도만?”
“얼마든지요.”
폴트는 상반신만 슬쩍 들어 올려서 방금 딴 캔을 건넸다.
받아서 공손하게 들이켰다. 캬아.
흐뭇하게 바라본 폴트는 말려 올라간 상의를 쑥 내리고 있었다.
그런다고 해봤자 크롭티라서, 배꼽과 그 주변의 살은 전부 다 드러났지만.
“폴트는 안 마셔요?”
“한 모금만 마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폴트가 내가 마시고 있는 캔 맥주를 흘기며 대꾸했다.
“제가 마신 걸 폴트가 마시는 건 좀 기분이 그런데요.”
“뭐, 제가 마시는 게 불쾌하다 이겁니까?”
“아뇨. 그보다는 그냥 문화적으로 좀. 간접키스라는 게 있어서.”
“그런 건 영국이 더 까다롭습니다.”
휙.
낚아채듯 폴트는 맥주 캔을 빼앗더니 입을 갖다 댔다.
그러고는 벌컥벌컥 잘도 마신다.
뭔가 묘한 기분이로군. 분위기에 경도됐다고 할까.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내 시선 따위 아랑곳 않고 폴트는 마실 만큼 마시더니 조금 잠잠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존대하실 겁니까?”
“예?”
“말투 말입니다. 거슬리는군요. 제가 두 살이나 어린데다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지 않습니까.”
“폴트는 제 선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찰싹. 폴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때렸다.
“누가 선배입니까, 누가.”
“메이드잖아요, 폴트는.”
“그래 보입니까?”
떡진 머리카락을 쓸어보이는 폴트.
“아뇨. 전혀요.”
“그럼 선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예전에는 랑의 메이드였으니까.”
“그럼 배울 가치가 없는 선배라고 해두겠습니다. 예전 업무 따위 다 잊어버린 퇴물 정도로.”
“아예 그만둘 거예요?”
폴트가 흠칫 떨었다.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또, 그쪽은 메이드도 아니지 않습니까. 뭐가 어찌됐든 선후배는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할까요.”
폴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질문까지 할 줄 아시는 성격이었습니까?”
“많이 늘었죠.”
영어적인 헛웃음.
“친구로 해두죠.”
“아까는 존댓말 하지 말라면서.”
“두 살 터울의 친구도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 나온 김에, 이제는 편하게 말 놓으십시오. 제가 불편합니다.”
“그쪽도 합쇼체 쓰니까 상당히 불편한데.”
“저는 한국어는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방어력 진짜 높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그럼, 친구니까 이렇게 말할게.”
그러거나 말거나, 먼저 요구한 것치고는 섭섭할 정도로 매몰차게 맥주만 마시는 폴트였다.
아닌가?
미묘하게 기쁜 듯한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다.
근데 정말 엄청 미묘해서, 다시 말하자면 눈매 끝이 살짝 풀어진 정도라서 정말로 만족한 건지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그 흉물이라는 괴인, 언제 볼 수 있어?”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아니, 그냥. 뭐 좀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
“확인?”
“어떤 의도로 런던을 지키고 있는지 뭐 그런 거. 이쪽도 비슷한 업무로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해야 되나.”
그러자 폴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오늘밤에도 나타날 겁니다.”
“오늘밤에도?”
“예. 그야, 밤은 위험하니까요. 그 사람은 위험한 걸 두고 보려고 하질 않습니다.”
나는 이끌리듯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어 보았다.
안개가 내려앉은 도시 너머, 아직 노을이 되지 못한 해가 서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