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1st Episode Epilogue. 목소리의 사라짐
* * *
자주 봐서 잘 아는 천장이었다.
눈을 반만 뜬 채로 10분 정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다쳤더라.
바롱인지 메롱인지 간신히 이겨먹고 다쳤지.
그런데 이긴 놈이 왜 여기에 있지? 쓰러졌던가?
아, 쓰러졌지. 둘이 화해시키고 아무래도 거기서 체력이 다해서, 곧바로 풀썩.
그래도 여기까지 일단 도착한 것을 보면 모든 게 제대로 해결된 모양이다.
근데 뭐랄까.
몸이 무겁다?
단순히 다쳤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선을 슬쩍 내려 쳐다보니, 뭔가가 다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어떻게 해야 몸을 일으켜 그 ‘뭔가’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다시 10분 정도를 고민했다.
그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별다른 노력도 방법론도 필요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부스스, 천천히 상반신을 들어 올리자 여기저기가 따끔거렸다.
무시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이윽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넌 도대체 뭐냐…….”
올라타 있던 것은 랑이었다.
누구더러 업어가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깨우자니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남의 다리를 베고 낮잠 자는 중학생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또 병원비가 불어나면 곤란하거든. 얼른 이 녀석 떼어내고 원무과에서 입원일을 알아봐야 되겠어.
의식 불명의 중환자를 베개 삼는 쪽이 나쁘다고 치고.
쿡, 랑의 볼을 찔렀다.
“우음…….”
깰 기미가 없었다. 다시 쿡쿡 찌르자 이번에도 앓는 듯한 소리만 냈다.
어쩔 수 없이 등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잠든 채로 랑이 짜증을 부렸다.
어느쪽이 환자인지 누가 와서 설명을 해주면 좋겠는데, 하고 한탄하는 찰나.
깜빡깜빡하고.
랑은 이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
순식간에, 15살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감정이 오갔다.
부끄러움에서 시작해서 반가움으로, 그러다가 기쁨으로, 마지막에는 도로 부끄러움으로 돌아왔다.
내 다리를 베고 편안히 누워 있던 랑은 벌떡 일어나서, 입술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이건, 이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닌 것! 그런 게 아닌 것!”
“뭐가 아닌데. 낮잠이 아니냐?”
“우으으…….”
랑은 풀이 죽어서 신음했다.
“깨어나는 거,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으, 너무 졸려서……. 하, 하지만 병원에 온 이후로 계속 같이 있었어!”
“됐어. 충분히 감동적이었어.”
랑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지난번에 떠올린 참신한 비유처럼 익은 곶감 같았다.
이 비유의 우월함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랑의 볼도 잘 익은 곶감처럼 말랑말랑하다는 것이지.
나는 랑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엿가락처럼 죽 늘어지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부드럽다.
한참 당기고 놀아대자 랑은 볼을 확 부풀렸다.
손가락이 떨어졌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세게 만져댄 탓인지 더 빨갛게 변한 볼을 어루만지며, 랑은 투덜거렸다.
“걱정했어.”
“고마워 죽겠다.”
“진지하게.”
“진지해. 병문안이라는 거 어지간히 친해도 가기 귀찮거든. 그만큼 걱정했으니까 왔겠지.”
“아, 알면 됐고.”
랑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이쪽을 바라보고.
“저기, 있지, 공익.”
“그래, 공익 여기 있는데 왜.”
그 호칭은 아마 평생 못 고칠 것 같구나, 싶어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공익이 맞으니까.
그래서 그냥 다시 랑의 볼이나 꼬집어서 공익근무요원 특유의 불필요한 분노 표출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랑의 표정이 또렷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쓸쓸함이, 외로움이 소리없이 내게 전해졌다.
랑은 이번에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며 내 바로 옆에 앉았다. 녀석은 그대로,나의 손을 붙잡고 살며시 끌어안아 온기를 확인했다.
랑 특유의 체취가 확 끼쳐왔다. 포도를 기조로 한, 그러나 술에 오래 절여 그냥 먹기에는 독한. 그럼에도 부드러운.
랑이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도 고마운 거야.”
조용하게, 속삭인다.
“용기를 줘서 고마워.”
울지 않으려 눈가를 꾹 짓누른 채로.
“날 혼자 두지 않아 줘서 고마워.”
잠시 말을 잃었다.
슬며시, 어깨를 내려다보자 랑의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고정하자 곧 눈을 마주했다. 랑은 다시 얼굴을 확 붉혔다.
나는 잠시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인가, 하고 상상력을 쥐어짜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가볍게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아마 휙 도망치거나 뭐라고 한 소리를 늘어놓을 줄 알았건만 랑은 가만히 있었다.
숫자 따위로 헤아리지 못할 시간이 느릿하게 흘렀다.
한참 손길을 받아들이던 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말없이 일어섰다.
랑은 그대로 나가려는가 싶더니, 탁상 위에 올려두었던 무엇인가를 갖고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다.
툭, 양반다리를 한 내 하반신 위에 그것이 올라왔다. 건틀릿.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 어?”
당연한 얘기지만 건틀릿은 망가져 있었다.
그날 바롱의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기재의 절반 정도가 뜯겨져 나간 것이다.
“이거, 제작비만 해도 8억 원. 엄마한테 뭐라고 설명해?”
“자, 잠깐만. 이건 내가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망가뜨린 그 순간에는 네가 장착하고 있었고! 게다가 8억은!”
8억은 인마 내가 평생 일해도 못 벌어! 철학과는 원래 그래!
그렇게 따지려고 입술을 뗐지만 말이 쏟아지지 않았다.
8억이라는 비현실적인 단위가 귀에 꽂힌 순간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고 해도 좋다.
그러다가 울컥했다. 내가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손해배상까지 따로 해줘야 하는 것인가.
원망 가득한 의문이 샘솟는 찰나.
“일해서 갚아.”
“예?”
“연봉 3천.”
잠시 정적.
“연봉 4천.”
다시 정적. 랑은 우물쭈물하다가 공격적으로 중얼거렸다.
“연봉 5천.”
“아니, 그게, 잠시만, 이게 무슨?”
“연봉 6천.”
무엇이라솔파미레도?
랑의 눈을 쳐다봤다.
진심이었다. 그 눈동자에는 거짓 따위 일절 담겨있지 않다.
뭐라고 해야 되나, ‘널 반드시 구매해주고 말겠다.’하는 놀라운 의지로 충만했다.
“연봉 8천.”
랑은 최후통첩을 던지듯 비장하게 말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다소 비굴했다.
“이, 이 이상은 안 돼. 용돈이랑 작년 재작년 세뱃돈까지 다 털어서 8천이야. 나라고 돈이 무한정 나오는 게 아닌 것.”
그렇겠죠.
“지금 진지하게 하는 얘기야?”
“진지해.”
“아니, 미쳤어? 무슨 명분으로 날 고용해?”
“도, 돈 갚아야 할 거 아냐!”
랑은 짜증을 내듯 소리쳤다.
잠시 우물쭈물 거리다가 아까보다는 소심하게 말했다.
“그리고 뭐냐, 수행인이 필요해. 폴트가 해고된 것.”
“폴트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허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니, 암만 그래도 연봉이 좀…….”
“더, 더 높게 줄 수도 있긴 한데! 당장은 어려워! 곧 설날이니까 그 이후에 줄게!”
“너무 많다는 거잖아, 이 녀석아!”
그보다 폴트는 지금까지 8천만 원이나 받은 거였어?
같이 식당투어나 다닌 주제에?
자본주의의 무서움과 눈앞의 소녀의 거대함을 동시에 느낀다.
새삼 몸서리 치는 나를, 랑은 병원복 소매를 질질 잡아 당겨가며 재촉했다.
“빨리 결정해. 일해서 갚을 거야, 말 거야?”
“그렇게 협박하는 거 불법 같은데. 암만 생각해도.”
“진짜? 그럼 어떡해. 언니랑 불법은 안 하기로 약속한 것.”
“너는 상법 공부 좀 해야겠다.”
“하, 하고 있어!”
그런 놈이 사람을 8억으로 협박한단 말이지.
잠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연봉 8천만 원이라. 이번에도 단위가 평소 사용하던 것과 달라서 가치관에 혼란이 오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아직 법적으로 계약서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할 이 어린애와 근로계약서를 (그것도 저 녀석이 고용주가 내가 고용인인) 작성해도 괜찮을까.
따지고 보면 이것도 불법 같은데.
고뇌에 잠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랑이 다시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또 무슨 무서운 협박을 할까 싶어 깜짝 놀랐는데, 의외로 랑은 소심하게 물었다.
“저기, 돈은 안 갚아도 되니까 그냥 내 밑에서 일해, 응?”
“그렇게 절실한 일이야?”
“조, 조금…….”
랑은 손가락을 비비 꼬며 웅얼거렸다. 내 손가락은 관자놀이에 가 있었고.
“암만 그래도 액수가 너무 많고, 이건 내가 널 속여먹는 것 같잖아.”
“내가 내 돈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어허, 내가 너의 경제활동에 손쉽게 무릎을 꿇는 그런 소인배라고 생각했던 거냐.
그렇게 묻기에는 솔직히 너무 큰 액수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 절반만 받을게.”
“엥, 진짜?”
“절반도 많이 받는 것 같으니까, 너희 부모님이든 누구든 나중에 얘기를 좀 하기로 하고……. 아무튼 내가 필요하다는 거잖아, 그렇지?”
“으, 응!”
랑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가 얼굴을 다시 확 붉혔다.
“아, 아주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평범하게 필요해!”
8천만 원 만큼 필요하다면 그 절실함이 달리 비견할 데가 없다만, 아무튼.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한국 상거래사에 유래가 없을 기묘한 고용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4천만 원이 진짜 내 수중으로 떨어질지 어떨지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알아보기로 하고.
그보다는 먼저.
“그래서, 이걸로 만족하냐?”
랑이 그 물음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머리 위에 ‘?’ 하고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느낌의 마크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언니랑 관계도 정리됐고, 다시 본가로 돌아갈 거잖아. 이제 만족하는가 싶어서.”
“그게.”
랑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꼬르륵,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랑이 이번에는 과다하게 익어서 물러터진 곶감으로 변했다. 소리의 출처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황당해서 한참을 비웃어줬다.
랑이 뭐라고 항의하기 시작했지만 접수하지 않았다.
아직 월급이 입금되지 않았거든. 난 아직까지는 자유인이다.
“됐다.”
그나저나 입금되면 얘를 존댓말로 대해야 하는 건가, 하는 물음을 제쳐두고.
일단은, 아무래도 배가 고픈 모양이니까.
“나도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 여기 근처에 괜찮은 식당 아는 거 있어?”
“아, 알아.”
따지기를 멈추고 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다. 솔직히, 당장 랑에게 이런저런 대답을 듣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첫술에 배부르기는 어려운 법이다.
당장 랑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만, 다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만족했기 때문에.
앞장서는 랑. 링거의 튜브를 정리하는 나.
뒤늦게 랑을 쫓아 링거대를 몰고 달려갔다.
그러다가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환청처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수아. 나의 죽은 연인.
뭐라고 말했을까. 아직까지도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입에 담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는.
그 여자는 내 과거였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아꼈다.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어서 더없이 고마웠고, 그런 사람을 내가 지키지 못해 더없이 미안했다.
그런 상대에게 속죄할 길은 보이지 않아서 앞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다시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을 수 없을 거라고 믿어 필사적인 도움을 몇 번이고 거절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너무 아름다워서.
“벌써 밤이야.”
중얼거리는 소녀. 그 아이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래, 분명 이거 하나를 붙잡지 못할 거라고 믿어버려서.
계속 그 안에 갇혀 있어서.
시선을 위로 올렸다.
휘영청 드러난 달이 밝게 빛났다.
문득, 어딘가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별빛이 가득해서 아마 그것의 탓인지도 모른다고.
분명 소녀의 덕분인 것을, 그렇게나마 애써 스스로에게 거짓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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