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005. 내가 가는 수밖에 없네 (4)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라고 다짜고짜 말하면 너무 대충 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덧붙여본다.
바롱이 쓰러졌다. 그때 정원에서 멀쩡한 것이라고는 나와 랑이 처음 앉아 있었던 벤치뿐이었다.
나는 너무 지치고, 뭐랄까 그냥 죽을 만큼 힘들어서 거기 풀썩 주저앉았다.
아직까지 하늘이 붉었지만 내게는 노랗게 보였다.
핑핑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조용히, 피곤해진 시선을 먼 곳으로 흘려보냈다.
잠시 말없이 쉬고 있으니 랑이 쪼르르 달려와서 내 옆에 앉았다.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뭔가 말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붙잡았다.
돌아보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혀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너희 둘.”
다만 이곳에 어른은 나 혼자라서.
“여기서 어설프게 헤어지지 말고 제대로 끝맺어.”
관계 정리를 지시했다.
랑과 유는, 자매는 서로를 가만히 쳐다봤다.
민망한 얼굴들이었다. 한쪽은 어린아이답게 실컷 투정을 부려 여기까지 왔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지. 다른 한쪽은 결국 그런 동생을 구하러 다른 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각자에게 하나씩 약점을 잡혀 뭐라고 하기 힘든, 참 애매한 상황.
나는 앉은 채로 랑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을 제 언니에게 툭 밀쳐버렸다.
어린 나이에 비해서도 또 어려보이는, 쉽게 말해 조그마한 체구의 랑은 쉽게 밀려나갔다.
랑은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제 언니에게 툭 부딪혔다.
“그, 그게…….”
“내가 미안.”
유가 스타트를 끊었다.
잘했다, 하고 몸만 성했더라면 호성으로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네 마음을 더 헤아렸어야 했어. 너는 그냥, 가족끼리 함께 있고 싶었던 거니까.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헤어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어. 갖고 있던 걸 다 내려놓아도 좋을 정도로 싫은 일이더라.”
고개를 숙이는 유.
그제야 둘의 키가 거의 비슷해졌다.
솔직히, 마음 속 웃음벨이 딸랑거린다. 나는 억지로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네 동생도 할 말이 있다더라.”
“할 말, 이요?”
랑이 나를 확 돌아봤다. 그 눈빛에 ‘야, 공익!’ 하는 의사가 담겨 있었으나 가뿐히 무시했다.
딴에는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천천히 이야기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어설프게 헤어져버리면 상처가 어디서 덧나고 만다.
기왕 나버린 상처라면 자극적인 소독제라도 발라서 시원하게 뜯어내는 것이 낫겠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두 사람의 소독제가 되어주겠다.
이쪽에게 따지려는 듯한 랑에게, 유는 할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랑은 나에 관해서는 싹 잊어버린다. 다만 제 언니가 보이는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그게…….”
하고 랑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이윽고.
“나, 나는! 언니를 모함할 거야!”
소독제를 잘못썼군.
유는 랑보다도 랑의 등 너머의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대략 ‘이게 무슨 소리죠?’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길게 풀어서 설명할 정신력은 내게 없었다.
따라서 ‘그냥 들어나 봐라…….’ 하는 시선으로 화답했다.
랑은 뒤늦게 이어나갔다.
“그게, 나는, 나는 머즐드독스의 총수가 될 거야. 그래서 언니가, 언젠가 언니가 돌아올 수 있도록…… 아니,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머즐드독스를 정의로운 기업으로 만들 거야.
그, 그렇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언니가 계승권에서 물러나야만 하고, 다시 그러기 위해서 언니가 자질이 없다는 이미지가 필요한, 필요한 것.”
유는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자질을 깎아내려서 나를 머즐드독스에서 배제시키겠다는 그런 거야?”
“이, 일단은…….”
랑은 우물쭈물 거렸다.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이지. 랑도 나도 유의 의중은 모른다.
지금의 머즐드독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가문에서 도망치기야 했지. 그러나 유 또한 스스로의 명예를 중시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해를 구한다고 해도 평판이 깎여 나가면 불편한 마음이 생길 터.
어쩌면 이 계획 자체가 유에게는 불쾌한 일일지 모른다.
랑은 조심스럽게, 사랑하는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땀에 젖어 달라붙은 앞머리 때문에 눈동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각도에서는 살짝 기른 옆머리 때문에 더더욱 알아볼 수 없다.
동생은 언니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응.”
천천히, 동생을 안아주었다.
“고마워.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만드는 새로운 머즐드독스.”
이것 참, 오늘은 나답지 않게 해피엔딩인걸.
당분간 담배는 필요 없겠다. 우울하고 꿀꿀한 일이 있을 때면 오늘을 회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뭐랄까, 상당히 졸려졌다. 피곤해.
몸이 지쳐서, 아까 쓰러지지 않으며 버틴 상처들이 욱신거린다.
옷도 피에 젖었고 그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 안으로 땀이 스며들어가 따끔따금 아프다.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견뎌낸 정신이…….
“공익?”
아직도 그 호칭이냐, 하고 따지지는 못하고.
그대로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전신 타박상이라고 한다.
지정자를 상대하는 의사답게, 군의관으로 오랜기간 복무한 잘생긴 중년이었다. 그는 나의 전신을 ‘보호 장구로 전신을 감싼 채 산탄총에 빗겨맞은 상태’에 비유했다.
그냥 피부에 잔상처가 잔뜩 돋아나 있다고 표현하면 좋을 걸 뭘 그렇게까지 멋있게…….
쓰러지고 난 뒤 만 하루가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다.
깨어난 그 순간에 내 침상에는 랑이 같이 누워 있었다.
쿨쿨 자고 있었다.
나중에 깨워 물어보니 치료를 끝마친 직후 계속 곁에 있었다고. 반쯤 자랑처럼 반쯤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처럼 랑은 밝혔다.
여기서 매우 감동받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진심이다. 랑이 최고야.
이윽고 연락을 받은 유가 찾아왔고, 다 돌아간 뒤에 폴트도 찾아왔다.
그들의 병문안 하나하나에 상당한 스토리가 있으므로 다 듣는 게 좋을 것이다.
다만 주어진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나는 맨 마지막으로 찾아온 한월과의 대화를 가장 먼저 기록하고 싶다.
삼일 정도 지나, 어차피 뼈는 부러지지 않았으니 퇴원을 준비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짐을 꾸릴 무렵이었다.
그때 병실 문을 누군가가 똑똑 두드렸다. 열어보니 한월이었다.
한월은 평소와는 다르게 민망한 얼굴도 또 반갑다는 얼굴도 아니었다.
한월은 다리 하나가 부러진 채, 깁스를 하고 내 병실로 들어왔다.
폴트에게 듣기로는, 재인과 한월 둘만으로는 하젠야크트를 제압할 수 없었다.
결국 패퇴한 뒤 다른 새카만 칼날들의 일원(유 말고, 비정규 멤버라고 불리는 다른 두 사람 중 하나)이 나타난 뒤에야 파괴극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월은 언제보다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남이 시켰기에 와야만 했다는 딱딱한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인사에도 기운이 없었고, 다른 안부를 묻지도 않았다.
한월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문서’를 따라 읽었다.
한월은 말하기에 앞서 “부부장님을 대신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편의상 원문 그대로 읽을게요.”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붉은 길앞잡이 팀장 한나진 씨가 A등급 파계종 바롱을 제압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카만 칼날들의 제갈유 양과, 같은 팀의 제갈랑 양의 증언으로 인해 귀하가 ‘자기지정’을 각성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라면 ‘영역지정’의 수준에 이른 뒤에야 도달하는 자기지정이 가능했다는 점에 대해 인천지부는 다소간의 의문을 품고 있으나, 두 증인의 공신력을 고려해 귀하가 바롱을 처치한 공로를 인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한월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우선 귀하에게 B등급의 지정능력 등급을 부여할 예정입니다.
이에 따라 귀하는 오늘부터 공식적인 고위 지정능력자가 되어, 관련법에 근거해 특수공무원으로 채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이상의 지침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박한월 군에게 대리하여 전달하니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전달자에게 묻고, 만일 그래도 의문이 해소되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아.”
말했다.
전달하던 한월의 표정이 아까보다도 더 굳어졌다.
그는 내게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아니지.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녀석이 납득할 수 있게, 더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공무원이 될 마음은 없고 그냥, 뭐라고 해야 되나, 보상 같은 게 있다면 따로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한데, 바롱에게 부여된 포상금 말고 이걸 원하거든.”
“어떤 거요?”
“지금 당장 소집해제 시켜줘.”
한월이 읽었던 문서를 몇 페이지 넘겼다.
이번에는 손글씨로 작성된 단순한 편지였다. 부부장이 내게 전달하는 내용이었다.
관련법에 관한 어려운 내용들이 윗부분을 이루었고 맨 마지막에 요약적으로 적힌 부분이 있었다.
“고위 지정능력자가 이전에 지정능력 대체복무를 한 경력이 있을 경우, 이를 감안해 급수 혹은 호봉을 더한다. 이때, 고위 지정능력자로 등록되는 것과 동시에 해당자는 즉시 소집 해제된다.”
다 읽었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깨뜨리는 것은 언제나 한월이다. 무엇이 됐든.
“정말로 그만두시게요?”
“이러고 사는 것도 이젠 지쳤다.”
“하지만 형, 혜택을 생각해보시면…… 아니, 혜택 같은 건 제쳐두더라도 이건 세상을 구하는 일이잖아요. 축하하려고 일부러 온 건데.”
“재인이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
한월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세상은 너희들끼리 구해라.”
툭툭, 어깨를 두드려줬다.
한월이 들고 온 남은 문서를 모조리 받아 입은 코트 주머니 안에 고이 접어, 아니 쑤셔 넣었다.
피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그러니 이 종이뭉치는 담뱃불의 불쏘시개로 써먹어 주겠다.
아무튼, 여기까지는 굉장히 우울한 얘기라고 할 수 있겠네.
누군가가 내 이야기기를 소설로 읽어 알게 되었다면‘미친 거 아냐?’ 하고 의문을 던질지 모른다.
아니, 분명 ‘이제부터 승승장구하는 거 아니었어?!’하고 의문을 품을 테지.
그런 의문 좋다. 기쁘게 접수하겠다.
그 의문을 접수하려고 내가 시간을 조금 틀어서, 병실에서 깨어난 직후 만난 랑과의 대화 내용을 나중에 알려주겠다고 미뤄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여기서부터는 제법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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