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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30화 (30/112)

〈 30화 〉 행간 1. 훑고 넘어가는 이야기

* * *

지하철이 멈추었다.

잠시간의 혼란 뒤에 안내방송이 이어졌다.

‘승객 여러분.’

차장의 어조에 당혹감이 실려 있었으나 ‘인천 서부 지역에 파계지점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낯선 감각은 없었다.

태풍과 홍수, 가뭄의 소식을 전하는 기상캐스터처럼 차장은 침착한 어조로 안내했다.

‘관계 법령에 의거해 우리 열차는 동막역에서 정차하겠습니다.’

늦은 시각이었다. 서울에서 야근하고 퇴근 중이던 시민들이 대다수였고, 간혹 학생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인파를 흘끗 바라보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스크린도어 바깥으로 향하는 급급한 발걸음만큼은 ‘어쩔 수 없다.’ 라는 체념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 우두커니 남아 있는, 한 남자를 제외하면.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신장은 못해도 190Cm를 넘어서 있었다.

남자에게 멀대라든지 전봇대 같은 수치스러운 별명은 도저히 붙일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남자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아니 칭호는 거한이었다.

돋아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스마트폰을 야상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다시 정지.

그러나 언제까지고 좁은 지하철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기관실에서 승객이 모두 내렸다고 판단했는지 철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남자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닫히려던 철문을 한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열어젖혔다.

내렸다.

다시 한숨.

그리고 허망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인천광역시 연수구 관내 A+급 파계종 출현]

[‘새카만 칼날들’이 긴급 소집되었습니다.]

[증원 요청]

[역부족]

떠오르는 메시지 속의 문장.

계속해서 이어져 내리는 한숨이 끼이익 하는 이상한 소리 탓에 끊겼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연 철문이 기묘하게 휘어 있었다.

무뢰한은 이제야 당황한 눈빛으로 그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S급 지정능력자 ‘무뢰한’은 신속히 출동해 주십시오.]

무뢰한은.

백승도는 마지막으로 한숨을 토했다.

***

한월은 이를 악물었다.

쇄도대지는 이미 전개되었다.

그러나 하젠야크트의 위압은 한월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까닭에 쇄도대지를 통해 걸 수 있는 제약은 한정돼 있었다.

일반적인 파계종이라면 신체를 움직이는 것조차 어려웠을 테지만 하젠야크트는 ‘성가시다.’ 정도의 태도로, 한월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 외에 부수적인 세 가지의 문제가 공존했다.

첫 번째는 하젠야크트가 한월의 능력에 대해 숙지하고 있다는 점.

한월은 속도를 가감해 상대에게 빠르게 접근해 타격을 입히는 전술을 취하는 게 기본이었다. 하젠야크트는 그런 점에 미리 대비를 해뒀는지 최대한으로 거리를 벌리며 허공에서 거대한 가시를 투사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두 번째는 현재 재인에게 적절한 책이 없다는 것. 무슨 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재인이 쏟아내는 무기들은 조선시대에나 썼을 법한 대포 몇 문이 전부였다

대포가 약한 무기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활용할 여지가 없는 무기라는 점은 자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는.

“젠장, 유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새카만 칼날들이 셋뿐인 정규멤버로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은 각자의 역할이 정확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한월은 주된 공격을 맡고 유는 원거리 견제와 전투보조를 담당한다. 재인은 전체 싸움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변수를 창출한다─ 라는 게 모든 작전의 골자였다만.

그러나 유가 오지 않는다.

따라서 원거리 견제에 문제가 생겼고 한월이 접근할 틈이 나지 않는다.

재인이 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대포가 소환되는 족족 새카만 가시가 허공에서 돋아나 입구를 막아버리거나 대포 자체를 내부에서 터뜨려버리니까.

다른 파계종과 맞닥뜨린 것인가, 가정할 수도 있지만 개연성이 없다.

유가 어지간한 파계종에 당할 약체도 아닐뿐더러, 그녀는 염동력을 자신에게 적용해 빠르게 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유는 무조건 이곳으로 달려왔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에라도.

우선순위를 잘못 파악했다면?

“재인아! 유에게 연락해봐!”

“하, 하지만─”

재인이 얼버무렸다. 그 이유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기술과 전술을 모르는 야만인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 여섯 갈래 입 안의 목소리와, 허공에서 솟아나는 수십 개의 이빨.

그것들을 막아내는 것은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피해내는 능력이 거의 없는 재인에게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솟구치는 공격을 다 피할 틈도 없이, 한월은 재인에게 날아드는 날붙이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다가 결국 단도 크기의 이빨이 한월의 허벅지를 긁어냈다.

비명이 터졌으나 하젠야크트는 이종??에게 동정심을 보일 박애주의자가 아니었다.

우연히 한 차례의 공격이 성공하자 이윽고 수십 개의 이빨이 한월의 전신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마치, 이빨을 제외한 전신이 투명한 짐승들이 날아든 것처럼.

수십이었던 난타가 수백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재인이 달려들어 한월 대신 이빨을 맞았다.

그래봤자 하젠야크트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젠야크트는 시를 읊듯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는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선언.

공중에서, 하젠야크트는 관조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범벅이 된 소년과, 그 소년을 밀치고 함께 상처범벅이 된 소녀.

괴물은 여전히 삼라만상을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것 같으면서도, 다음에 벌어지는 일에 한해서는 웃음을 보였다. 갈라진 입 안의 혀를 낼름거리는 식으로.

소년이 다시 소녀를 밀쳐냈던 것이다.

“놀랍구나.”

“뭐가…… 놀랍지?”

“상처입지 못한 자가 상처 입은 자를 대신해 ‘다쳐주겠다’고 바라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상처 입은 자가 다시 상처를 자처하는 것은 흥미롭지.”

“너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하젠야크트가 정중하게, 손을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허공에 검처럼 기다랗고 날이 벼린 가시가 떠올랐다.

하젠야크트는 그것을 붙잡고 계단을 밟듯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왔다.

“너희가 위조한 그 힘들은 본연 우리의 것. 그러나 우리는 상처입지 않는다. 왜인지 아는가?”

“글쎄.”

“간단하다.”

하젠야크트가 기사를 서훈하기 위한 예물을 하사하듯 엄숙하게 가시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마지막.

내리꽂는 손길에 이어, 아무것도 없을 예정이었다.

“흐음.”

물론, 예정대로 되는 일이 없기에 그렇기 때문에 소년은 ‘변수’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하젠야크트는 다시 물러났다. 가시는 정확하게 소년을 관통했다.

그러나 그 관통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으리라.

소년의 몸에 닿은 지점부터 가시는 없어졌다.

없어지고 나서 소년의 몸을 통과할 지점에 다다르자, 가시는 소년의 몸을 기점으로 생겨났다.

그것은 관통이긴 했으나.

삽입과 병합된 관통은 아니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나.”

“쓸 일이 없었던 거야.”

하젠야크트는 그 대답에 반문하지 않았다.

노련하고, 침착하게.하젠야크트는 그런 파계종인 듯했다.

바롱으로부터 전달받은 정보를 최대한 이용해 한월과 재인의 발을 묶어놓는다.

덕분에 원거리 공격으로 일관했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아니, 쟁취할 뻔했다. 이제야 알게 된 정보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쟁취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바롱이 하젠야크트를 속인 것일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발을 묶는 수준에서 역할을 다한 뒤에는 죽어 없어지라는 의도일까.

그것은 바롱도 ‘숨겨놓은 힘’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추론만큼이나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하지만 하젠야크트는 고개를 저었다.

동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치에 어긋난 일이기에.

하젠야크트는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여섯 개의 입이 쩍 갈라졌다.

점잖은 토끼 신사의 본모습은 결국 침과 이빨과 혀였다.

기괴하게 움직이던 여섯 장의 입술이 꽃잎과 같이 뻗었고 혀는 안에서 멈추었다.

이빨과 이빨 사이를 돌아다니는 타액만 움직이던 도중, 돌연 토끼가 공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아니, 흡입이라고 하기에는.

“재인아!”

흡사 구멍 난 항아리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세상이라는 항아리에 하젠야크트의 입이라는 구멍이 돋아났고 따라서 세상에 담긴 것들이 빨려 들어간다.

한월은 스스로의 속도를 왜곡해 흡입력을 버텨냈으나, 재인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재인은 그저 긴 밧줄을 만들어낸 뒤 한월에게 던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던져진 밧줄은 결국 ‘담긴 물건’에 불과했다. 밧줄은 한월에게 닿기 전에 반대 방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월은 결국 결단을 내려야 했다.

상처투성이가 된 전신을 이끌고, 그래도 싸우기 위해서.

소년은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소녀가 부과해준 의무인 것이다.

소녀가 소년을 지탱해줬기 때문에 소년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소년은 뭐든지 해낼 수 있다, 라고────

폭음.

폭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고했다.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거짓도 없었기 때문에.

복잡한 구조와 기재 같은 것은 없었다. 주먹이 있었다. 그것으로 강타했다

그것만으로도 터져나갔다. 이어지는 수차례의 폭음.

신사의 정장이 찢겨나가고.

버티느니 어쩌느니 논할 가치도 없이 직립한 토끼의 신체가 터져나간다.

“미안하게 됐군.”

그것이 무뢰한의 방식.

그것이 한국에 오직 다섯만이 존재한다는 S급 지정능력자의 방식.

“막차가 끊겨서 말이다.”

***

작은 패배는 큰 승리를 위한 일보후퇴.

소멸은 사라짐이 아니라 되살아남이니, 소멸은 필경 불멸.그것이 우리가 강한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강한 이유일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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