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004. 아니, 뭐, 정 아무도 없다면 (4)
* * *
어쩔 수 없는 일도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영역지정까지 발동된 상태에서 B등급의 지정자는 결코 한월에게 대항할 수 없다. 몇 수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시녀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별다른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월은 땅바닥에 대검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검의 선단으로 위압이 몰려들며 검강을 형성했다. 본래는 더 강력한 타격을 주기 위해 두르는 것이었으나, 이번에는 방패처럼 작용했다.
건틀릿 안의 손을 쥐락펴락한 폴트는 계산했다. 답은 금세 떨어진다.
저 방패를 지나치기 위해서는 못해도 열 차례의 타격을 입혀야 한다.
그러나 한 차례도 제대로 유효타를 형성하지 못한다. 폴트는 그대로 간단히 제압당할 것이다.
아픔에 지쳤는지 감정에 상했는지 유는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기 시작했다.
한월은 그 모습에 당황해 소리쳤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월은 매우 전형적인 대사를 날리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았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찾아왔더니만…….”
그러나 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계속해서 흐느끼는 채로, 한월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간신히 ‘오빠아…….’ 하고 부르는 소리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폴트는 건틀릿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곧 자동적으로 분해, 조립되며 작은 큐브 모양으로 돌아왔다.
폴트는 그것을 앞치마 속에 넣고 조용히 말했다.
“가문에 관련된 일입니다.”
한월에게 말했다.
“알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박한월 군.”
“예에, 뭐, 알고 있어요.”
한월은 조심스레 유를 떼어놓고 폴트에게 돌아섰다.
“제갈 가문 일이라니까 제가 끼어들을 사안은 아닌 것 같지만, 이건 제 친구 일이기도 해요.”
“큰 아가씨를 내어주지 않으시겠다는 뜻인지요?”
“내어주는, 그런 거창한 표현은 아니고요. 그냥 유가 가고 싶지 않다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게 좋다니까 계속 데리고 있으려고요.”
폴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은 하늘을 타고 올라가 새하얀 안무로 피어났다.
그러나 한월의 묵빛 위압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묽은 농도의 숨결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산산이 조각나는 결정을 보며 폴트는 한국의 겨울은 제법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끝은 아닙니다.”
폴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여기서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지 못하면, 그것은 폴트라는 사람의 실패이지 제갈 가문의 실패가 아닙니다. 제갈 가문은 그렇게 쉽게 실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시 더 많은 사람을 보내겠지요. 저보다도 훨씬 나은 사람들일 테고, 또 뛰어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때는 박한월 군이 나서서 방패가 돼 준다고 해도 막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협박이에요?”
“제 협박은 아닙니다. 제갈 가문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도 제갈 가문 사람이잖아요.”
“실패했으니, 더는 남아있지 못합니다. 그런 식입니다.”
폴트는 딱히 자책을 하려는 것도, 이 시점에서 유를 회수하고야 말겠다고 벼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은 알았다.
그러나 이뤄지지 않을 것과 이뤄질 것도 명확히 분간할 수 있었다.
유가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젠가 이뤄질 일이었다.
“……글쎄요.”
한월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확실히, 언제까지고 데리고 있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네요. 뭐, 승도 아저씨가 끼어들면 또 그건 어떻게 감당하실 거냐 묻고 싶기는 한데. 유의 어머니께서는 돈이면 해결이 된다, 라는 마인드이신 것 같으니까.”
“실제로도 해결이 되는 편이지요.”
한월은 쓰게 웃었다.
그러더니 한월은 다시 유에게로 돌아갔다.
유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구르며 옷에는 흙이 달라붙어 있었고, 피부는 여기저기 까져 있었다.
그 와중에 눈물까지 흘렸으니 객관적으로 말해 눈뜨고 봐주기 어려웠다.
한월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저 손을 뻗어줬다.
훌쩍이던 유가 코앞까지 내려온 손끝을 보고 움찔 떨었다.
시선을 위로 하니 그곳에는 소년이 있다. 환하게 웃으면서, 아니 그보다는 멋쩍게 웃으면서.
유의 얼굴이 일순간에 붉어졌다.
“일어나야지.”
“아, 아뇨, 그게…….”
지금 손을 맞잡자니 부끄럽다고 하면, 그건 더 부끄러운 행동일까.
그런 생각에 망설이는 찰나 한월이 대신 손을 낚아챘다. 끌어당기듯 억지로 일으켜서 유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폴트에게 물었다.
“보셨죠?”
한월은 말했다.
“얘가 그런 것처럼 이 녀석 집은 당신들 가문이 아니고 저희예요. 그게 유가 선택했어요. 저희는 받아들였고요. 그러니 다시 찾아오시겠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막아 세울 거예요. 알아듣겠어요?”
“이해했습니다.”
폴트는 입 꼬리를 올렸다.
사람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소년은 대단하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각하지 못하고 저런 말을 술술 내뱉는 무신경함이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건 지금의 유는 정말로 구원받은 것처럼 기뻐 보인다. 그것만큼은 다행이다.
다행이지만.
그러나 세상은 계속해서 돌아간다. 이곳에서 멈춰 있을 수 없다.
폴트는 그 사실마저 소년이 납득하고 있을까 묻기 두려웠다. 그렇다면 폴트는 이번에도 주인을 잃을 것 같아서.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폴트는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암전으로 가득 찬,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그러나 폴트는 그 화면의 주인이었기에 아직 시각화되지 않은 장면들도 남들보다 먼저 볼 수 있었다.
폴트는 느릿하게 한월의 곁으로 걸어왔다.
“느끼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한월은 침묵을 지키는 채로 먼 빌딩을 바라봤다. 폴트는 계속했다.
“아무리 타이밍이 좋아도 필요한 곳마다 계속 있을 수는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오늘 같은 경우만 해도…… 사실은 여기에 파계지점이 나타날 조짐이 보여서요. 그래서 왔는데.”
“파계지점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한월이 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발언권을 넘겨받지는 않았다. 폴트가 덧붙였다.
“아주 먼 거리는 아닙니다. 달려서 10분 정도일까요. 가까운 거리에서, 위압이.”
“예, 느껴지네요.”
화면이 작동했다.
떠오른 것은 괴기스러운 신사의 모습정장을 입은 토끼라고 해야 할까.
깔끔한 연미복을 입었으면서도 얼굴만큼은 토끼의 형상인 그것은 명백히 파계종처럼 보였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 파계종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하젠야크트.
또한 놈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빌딩 몇 개를 지나치면 바로 나타나는 시가지에.
이윽고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젠야크트에 홀로 맞서고 있는 지정능력자.
“재인 언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유가 소리쳤다.
그러나 화면은 화면일 뿐이라서, 목소리는 실제로 닿을 수가 없었다.
직접 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생각한 한월은 대검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유에게 말했다.
“당장 가야 해.”
하젠야크트는 파괴와 살상에 특화된 A+등급 파계종.
재인 혼자서는 당연히 벅차고 거기에 한월이 낀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새카만 칼날들의 정규 멤버 세 명이 전부 필요하다.
유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
“어, 얼른 가요!”
터덜터덜 일어서는 유. 한월은 벌써부터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폴트는 유의 손목을 낚아챘다. 유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폴트는 유를 붙잡으려는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한월이 있으니 그런 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을 테고.
유가 멈춰 서자, 폴트는 다른 화면을 하나 더 띄웠다.
“방금 형성된 하젠야크트의 위압 탓에 깨달았습니다.”
한월이 저 멀리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폴트는 침묵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말장난이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없다.
어쩌면 있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폴트에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야 알았다.
폴트는, 늦게라도 진실을 알게 된 기분이었다.
화면에 떠오르는 것은 붉은 가면의 바롱.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제갈 가문의 차녀 랑.
폴트는 멍한 유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꽈아악. 움켜잡았다.
“작은 아가씨의 위압은 건틀릿을 사용해도 C등급이라서 제 위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다중화면에 간섭한 것은, 그래서 작은 아가씨를 탐지할 수 없게 만든 것은 다른 무엇인가의 위압입니다. 가령, 현재 이 도시를 감싸고 있는 두 파계종의 위압처럼.”
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파계종이 연합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인가? 무슨 목적으로?
아니, 깊게 파고들 것도 없다. 바롱은 이미 그녀의 동생을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는 덜컥 겁이 났지만,이럴 때가 아니지.
유는 폴트에게 당당하게 소리쳤다.
“위, 위압이 간섭하고 있다면서요! 위치는 어떻게 찾았어요?”
“이거, 작은 아가씨가 아니라 한나진 씨를 역추적한 겁니다.”
그 말마따나 화면에 나진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유의 다리 힘이 풀렸다.
이윽고 심하게 휘청거렸다. 폴트가 어깨를 붙잡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대로 주저앉을 정도였다.
유는 비명처럼 말했다.
“이게 무슨……. 하, 한월 오빠한테 알려야 해요!”
그러나 폴트는 어깨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뇨,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된다뇨! 장난칠 시간 없어요!”
“불러도 의미가 없습니다. 박한월 군은 이 도시의, 이재인 양의 영웅 아닙니까?”
필요한 설명 몇 단계를 건너뛴 말. 그러나 잠시 후 유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폴트는 뒤늦게 말을 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아가씨. 어떤 사람에게든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울 위에 두 사람이 올라왔으니 선택은 강요될 것이고, 저희는 도출될 답안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월 군에게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그그그그렇지만! 그렇지만 A+등급은 저 둘이라고 해도 무리예요! 갈 거면 저까지 가야 한다구요! 만일, 만일에라도 그렇게 되면……!”
그 얘기가 바로 폴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누구도 만능일 수 없다.
하물며 예전에도 그랬다.
“그러니 답안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씨.”
방황하는 눈동자.
“뭐라구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폴트가 물었다.
대답은 금세 떨어지지 않았다.
정적.
그리고 더 긴 정적.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누구도 만능일 수는 없다. 유는 지금 여기에 하나의 몸으로서 있다. 선택권을 부여받은 채였다.
자신의 새로운 집이 되어준다는 친구들에게 가느냐. 아니면 이제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자매에게 가느냐.
또한 다시 말하지만, 하물며 예전에도 그랬다.
“저는 물론 작은 아가씨께 갑니다. 그러나 박한월 군과 이재인 양 둘만이 하젠야크트를 상대하는 데 역부족이듯, 저와 작은 아가씨만으로는 바롱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물음만이 남아 몇 차례 울렸다.
이내 공중에서 흩어졌다.
***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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