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2화 (22/112)

〈 22화 〉 004. 아니, 뭐, 정 아무도 없다면 (3)

* * *

시녀는 먼 도시를 관조했다.

이곳은 제법 아름답다.

하기야, 역사를 쌓으며 난개발된 서울보다야 설계도를 갖추고 꾸민 신도시가 나을 수밖에 없겠지.

밤을 밝히는 몇몇 조명 사이로 시녀는 납득했다.

나진이 떠난 뒤 10분 정도가 흘렀다.

그 동안 시녀와 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합의하고 벌여 놓은 일은 아니었다.

그저 암묵적으로, 말로 구체화되지 않더라도 서로가 아는 어떤 느낌에 의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시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유가 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랑이 언니에 대해 완전히 포기하면 포기할수록, 다시 말해 절망하면 절망할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유다.

그러니 눈물 흘리며 도망친 어린아이를 쫓을 필요는 없다. 그 눈물을 닦아봤자 무의미한 것이다.

지독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들이다.

“아가씨께서는.”

시녀는 넌지시 말문을 텄다.

유가 돌아보지도 않고 다만 가만히 서 있었다.

시녀는 그것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아가씨께서는 자유로우십니다. 자유롭게 컸지요. 작은 아가씨와는 다르게, 평범한 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친구들을 두루 사귀셨지요. 저는 아마도 그것이 두분의 차이를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총수에게 저는 실패작이겠군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폴트가 쓰게 웃었다.

먼저 태어난 아이에게 기회를 줬다.

가서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친구들을 만나도 좋다. 세상을 좋아해도 좋다. 실컷 울고 웃어도 좋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목줄이 달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와야 한다. 너는 제갈 가문의 장녀니까.

줄을 길게 늘여놔 마치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다. 결국 몸은 묶여 있다.

그 전제는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싫어서.

목줄에 매여 있으면 그것의 반대쪽 끝을 붙잡고 있는 사람과 같은 편이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도망쳤다. 여린 이빨로 물어뜯어 줄을 끊어내고 여기까지 왔다.

유는 그런 성격이었다.

아니, 그런 성격으로 자라났다.

조금이라도 풀어놓고 기른 덕택에.

“덕분에 총수님께서는, 작은 아가씨를 학교에 보내지도 사람들과 만나게 하지도 않으셨지요.”

“그런 방법까지 사용하는 사람은 역겨워요.”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동의합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었다.

“하지만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시녀입니다. 메이드이지요. 제게 의견은 있을지언정 결정권은 없습니다. 그것이 제 가문이 주인에게 봉사하는 방식이고, 제가 제 주인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현대적이지 못하네요.”

툴툴거리는 목소리에 시녀가 싱긋 웃었다.

유는 그게 더 싫다는 것처럼 몸서리를 쳤다.

그래서일까, 유는 별다른 이득이 되지도 않을 질문을 던졌다.

“저는 몰라도 당신은 그 아이를 찾아봐야죠.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예요?”

“글쎄요, 생각 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랑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주인을 섬기는 게 당신 일이잖아요. 아니면 나한테 동조하는 거예요, 금발? 설마 여기서 당신 편을 들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시녀는 낮은 목소리를 냈다.

“다만 혼란스럽습니다.”

“혼란?”

“제가 누구일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시녀가 천천히 걸어 유의 앞으로 다가왔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육이란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생활하게 되느냐를 결정짓습니다. 그 굴레는 저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됩니다.

제게는 태어난 직후부터 주인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었고, 그분을 섬겨 왔습니다. 영구적으로. 아니면 영속적이라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예, 영속적으로 저는 명령을 받고 이행해 왔습니다.

그게 제가 받은 유일한 교육입니다.”

영어나 한국어, 사교계의 교양 따위는 교육이라고 하기도 뭣하지요. 시녀는 즐겁게 덧붙였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내뱉을 때에도 시녀는 별다른 괴로움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저도 가끔은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저는 평생 시녀로 살았지만 또 평생을 인간으로 살았으니까요. 즉,메이드들이 겪는 공통적인 문제를 무난하게 답습한 겁니다.

주인의 명령이 나의 양심에 어긋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률에서, 일반도덕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간단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간단하다.

“총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그렇게 해서 도출된 결론에 따라 행동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결론은 가끔씩, 아니 대부분의 경우 올바른 것에서 빗나가지요.

아가씨가 계속 지적하신 것처럼 총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코끼리의 상아를 뽑아 그것을 염료로 사용하실 수도, 사막에서 말라죽어가는 자의 물을 빼앗아 수채화의 재료로 삼으실 수도 있지요.

그런 분이십니다, 총수님께서는.”

“당신─”

“모든 것이.”

반짝이는 푸른빛 눈동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습니다.”

위압이 솟구쳤다.

시각적으로 파악해 금빛. 등급은 고작 C+ 정도에 불과하지만 범위에 있어서 뛰어나다. 넓게 감지하고 파악하는 특이지정을 사용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어쨌든 유는 당황하지 않았다. 위압을 내뿜는다고 해도 폴트가 그녀에게 뭔가 해코지를 할 수단은 없다. 폴트의 지정능력은 그저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화면을 띄우는 것이 전부니까.

그러니 유의 입장에서 지금의 폴트는 위압을 폭발시켜 어떻게든 랑의 위치를 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부정되듯이.

뿌드득, 무엇인가가 강하게 파열되는 소리가 유의 귓가를 휘감았다.

소리의 근원지가 유 자신의 복부라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에나 깨달을 수 있었다.

붕 공중으로 치솟았던 몸이 도로 떨어지고, 거짓말 같은 격통이 찾아들었다.

멍하게.

전신이 퍼지듯, 유의 몸이 늘어졌다.

“어, 째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소리가 여러 갈래로 찢어졌다. 이윽고 하나로 여민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위를 바라본다. 시선이 가는 곳에 메이드복을 입은 금발의 푸른눈, 그 스테레오타이피컬한 조합의 여자가.

그리고 여자가 내려친 주먹이.

주먹에 장착한 건틀릿이.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쓸모없고 졸렬한, 무가치한 인간입니다.”

메이드가 유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그러나 저는 유용한 메이드입니다, 아가씨. 다시는 주인의 명령을 어기지 말자고, 잘못은 여기에서 끝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폴트(Fault)가 된 이유입니다.”

그런가. 명료한 정의다.

유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나마 움직일 수 있던 손이 주머니 안에서 헛돌았다.

만져지는 것은 두 개의 물건.

하나는 휴대폰이다. 다른 하나는 무구지정에 사용하는 지휘봉.

지금에 있어서 진정 절실한 도구가 무엇일까.

영웅을 부를 수 있는 목소리인가. 아니면 스스로 맞설 수 있는 무기인가.

부른다고 찾아올 수 있을까, 맞선다고 반격할 수 있을까.

생각이 무뎌지며, 시야 또한 마찬가지로 천천히 어두워졌다.

***

“명령이었습니다.”

의식이 날카로워졌다.

맨손이 옷소매를 붙잡고 늘어졌다. 반대쪽 손의 건틀릿은 대조적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조금이라도 저항한다면 언제든지 내리칠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기계 팔이 유가 바라볼 수 있는 모든 영역을 가리고 있었다.

“큰 아가씨와 작은 아가씨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그때에는 수지타산에 맞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그렇게 명령받았습니다.”

“당신, 랑을 구하지 않겠다는…….”

“바라시던 바 아닌지요?”

시녀가 주인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아니. 주인은 아닌가.

그렇다면 알기 쉽게 소녀라고 지칭하자. 저항하지 못한 소녀가 한 바퀴를 빙 굴렀다가 그저 쓰러졌다.

소녀라고 해서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제갈유 또한 유능한 지정능력자, B등급에 해당하는 염동력과 음파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복부를 강타당한 정신이란 정신은 전부 흩어졌다. 때문에 위압을 펼칠 수도, 지정능력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우연히 반격에 성공한다고 해도 폴트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유 또한 건틀릿의 성능을 잘 알고 있었다.

C+등급의 위압만 사용하던 폴트가 건틀릿을 장착했으니 예상되는 강함은 B­등급. 일방적인 우위는 점하지 못하더라도 호각을 겨룰 수 있는 수준이다.

새카만 칼날들의 다른 팀원 백승도가 선빵 운운하던 것이 떠올라 유는 헛웃음을 흘렸다.흙에 한쪽 뺨을 처박은 채로, 아하하 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웃음은 울음으로 바뀌었다.

마음 한 구석이 찡 아려왔다. 여기서 이러고 하늘을 보고 있으니 서럽다. 서러워.

아니, 서럽다기보다는, 그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보다는 뭐랄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구지정: 서곡Overture]

기이이이잉──!

기묘한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물리력이 찾아들었다. 폭풍처럼 일대를 휩쓰는 압박감을 건틀릿이 간신히 막아냈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발적인 소음. 시녀가 건틀릿을 휘둘렀다.

지휘봉이 막아서며 다시 굉음을 내뿜으려 한다. 그러나 느렸다.

시녀의 강철주먹이 소녀의 어깨를 강타했다.

“부디, 부디 힘을 쓰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시끄러워요, 금발. 처음부터 당신은 마음에 안 들었어.”

“아가씨께서는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십니다. 지정능력이 심리의 영향을 받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고호맙네요, 제가 동요하는 것까지 염려해 주시고. 그런데 그거 꼭 당신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죠.”

“명령이 있었다면, 불가피한 일이므로.”

“그렇게 핑계를 대고 모르는 척하는 게 제갈 가문 특징이었죠. 어떻게 보면 당신이 나보다 우리 집안 핏줄을 더 많이 물려받았어.”

유가 일어서며 침을 퉤 뱉었다.

“지휘봉이 부러졌습니다.”

“예에, 그 말 그대로네요.”

방금 전의 격돌은, 그러니까 폴트가 어깨를 내려친 것은 그저 유를 쓰러뜨리기 위한 동작만은 아니었다.더 효율적인 타격을 원했다면 그냥 거듭해서 복부를 내려쳤겠지.

그러므로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했다.

가령, 지금 부러진 지휘봉처럼.

언젠가 한월이 격파한 A등급 파계종의 유해 일부로 만든 그 지휘봉이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B­등급의 일격에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얄궂은 일이었다. 그렇게 높은 등급이라면 조금 더 버텨줬어도 좋았을 텐데. 폴트는 적이 된 와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할 셈이에요. 죽일 건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수님께서 그런 일을 원하실 리 없지 않습니까.”

“아하, 둘째는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이죠?”

“한나진 씨께서 가셨습니다. 찾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유가 인상을 구겼다.

“그만 변명하랬죠. 역겨워서 귀가 다 아파. 구역질이 나려고 그래.”

“송구합니다.”

폴트는 잠시 말을 섬겼다. 뭐라고 말할지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가씨를 본가로 모실 생각입니다. 그렇게 지시를 받았습니다. 작은 아가씨보다 우선순위에 두라고, 또한 그렇게 지시받았습니다. 그러니, 작은 아가씨를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닙니다.”

“말하는 입장에서 헛소리 같지 않아요?”

“판단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판단을 실행에 옮기는 게 당신 영역이 아닌 거겠죠. 아까도 그런 식으로 말했잖아.”

폴트가 신음했다.

“어쨌거나 저는, 저는 아가씨를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해쳐야만 한다고 해도 최소한으로. 지금처럼 상황을 인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아가씨. 제가 작은 아가씨의 안위를 살필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은 지금 사과를 했어야 했어. 그리고 일단은 랑을 찾겠다고 말했어야지.”

“하아.”

영어적인 어조로 폴트가 탄식했다.

“순응하지 않으시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아가씨. 아무쪼록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넘어갈 생각이 없는데요.”

“무기도 없지 않습니까.”

“누가 그래요.”

유가 주저앉은 그대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손에 잡히는 것은, 겨울이라서 여기저기 많이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하나.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잡나무의 잔가지는 삽입되는 위압을 견디지 못한다. 한 번 휘두르면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이 정도로 쓰러지면…….”

[무구지정: 서곡Overture]

“쪽팔리잖아요!”

[행동지정: 날아가듯Volante]

잔가지의 끝에서 풍압이 치솟았다.

폴트의 예상대로 자기가 내뿜는 충격파조차 견디지 못한 나뭇가지는 바사삭 터져버렸다.

그러나 이미 형상을 갖춘 압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고, 나아간다.

삭풍이 스치듯 염동력이 폴트의 전신을 짓눌렀다.

이윽고 날아드는 낙엽과 모래먼지에 시야가 흐려졌다. 건틀릿으로 전면을 막아서던 폴트가 이를 갈았다.

유가 다른 나뭇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는 하나 상대는 엄연한 고위 지정능력자.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폴트는 확신했다.

확신했으므로.

[특이지정: 다중화면]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시야가 유의 앞을 막아섰다.

그것들 모두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간판처럼 번쩍거렸다.

새된 비명. 난데없는 광공해에 유가 눈을 가로막고 주춤거리는 순간, 폴트가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둔탁한.

강렬하고 매서운 주먹이 이번에는 인정사정없이 복부에 찾아들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폴트가 말했다.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주먹으로 말했다.

“제가 저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제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남은 생애를 누군가의 시종으로서 보내기로 결정한 것처럼…….

아뇨? 결정‘된’것처럼 아가씨께서는 종속된 것입니다. 가문에, 혹은 총수님께. 이것이 아가씨께 주어진 틀인 것입니다!”

바드득. 두 사람이 이를 깨무는 소리가 어우러졌다.

“나는, 싫어요.”

“싫더라도 하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런 게 있는 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결정할 일이야!”

[무구지정: 서곡Overture][행동지정: 매우 강하게Fortissimo]

귓가를 찌르는 음색.

매우 강하다는 그 직관적인 표현에 걸맞게 공격적인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멀리까지, 아주 멀리까지 닿아 인근 빌딩의 창문을 와장창 깨부술 정도로.

인적이 드문 이 신도시에서, 그 안에서도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공원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을 당당히 선포하는 듯했다.

이곳에서 이겨주겠다고. 호기어린 외침이 세상 끝까지 닿을 기세로 터져나갔다.

하지만 그 기백이 닿지 않는 범위는 분명히 존재했다.

건틀릿이 박살 난 보의 구멍을 틀어막듯 염동력의 일부분을 쥐어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비틀었다.

몇 바퀴를 빙그르르 돈 힘의 파동에 균열이 가며 아슬아슬하게 안전한 지대를 형성했다.

그 광경에 넋이 나간 유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뭐라고 해도! 혹은 당신 위의 누군가가 뭐라고 해도! 그렇더라도 내가 결정할 일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나는 당신들과 같은 위선자들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아!

이제 새카만 칼날들이 내 집이야! 내가 있을 곳이란 말이야! 알아듣기는 해?!”

“알아듣습니다.”

철컥, 철컥, 강철주먹이 대답했다.

“하지만 알아듣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다르지요.”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폴트.

유는 필사적으로 나뭇가지를, 아니 그런 제대로 된 게 아니라도 좋으니까 뭔가 휘두를 만한 것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손에 뻗는 영역에 정말로 아무것도.

텅 빈 느낌만이 감돌았다. 이윽고 시선을 가로막는 것은 어김없이 건틀릿의 반사광.

질끈, 눈을 감는다.

죽이지 않는다. 알고 있다. 죽일 리가 없지. 총수는 언제까지고 딸을 써먹을 것이다.

그녀보다 유용한 도구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쩌면 그런 것을 출산하기 전까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과 대체될 수 없는 자식 사이를 오가며 유는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디가 돌아갈 집인지 모르는 채로.

이곳에 간신히 정착했다.

무뚝뚝하고 책만 좋아하지만 본성은 착하다고 믿을 만한 언니를 만났다.

귀찮음이 심하고 매사에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선한 자질을 가진 오빠를 만났다.

거칠고 제멋대로지만 등을 돌린 모습이 든든한 아저씨를 만났다.

한국어도 이상하게 따라하고 고집이 세지만 드라마에서는 취향이 겹치는 프랑스 꼬맹이를 만났다.

겨우.

겨우 이제야 이곳이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집은───”

“맞아.”

[영역지정: 쇄도대지]

“우리가 네 집이지.”

다시금.

영웅이 나타났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