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004. 아니, 뭐, 정 아무도 없다면 (5)
* * *
나는
***
모든 일은 세 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라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기억이 있다. 그 규격으로 상황을 정리해본다.
1. 랑을 설득하러 그녀 소유의 빌딩 옥상으로 왔다.
2. 설득에 성공했다.
3. 바롱이 나타났다.
감정이 배제된 서술의 나쁜 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세 줄이었다.
게다가 넷째 줄이 필요하기도 하다.
4. 도움을 요청할 수단은 없다.
다시는 이 공식을 차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우선은 세 줄 혹은 네 줄 이후에 이어진 상황을 말해본다.
나는 랑을 등 뒤로 감추었다. 바롱은 예의 웃음으로 고정된 가면 안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뭘 그렇게 놀라?”
바롱은 우리가 앉아있던 벤치에 철퍼덕 엉덩이(라고 대응할 수 있는 신체기관)를 내던졌다.
그렇게 되니 바롱의 체구가 실감이 났다.두 사람이 앉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던 벤치는 바롱 하나의 덩치에 짓눌려 만석 상태였다.
두둥실, 떠오른 몇몇 책들이 바롱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초현실적인 그 광경에 경도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상태에서 나는 몇 걸음을 주춤주춤 물러났다.
등 뒤에 있는 랑도 함께.
물론 소용 없었다.
“거기까지.”
바롱은 털로 뒤덮인 손을 우리에게 겨냥했다.
“더 물러서지 마. 재수 좋게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솔직히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다. 예를 좀 들어줄까?”
우리를 향해 뻗어 나와 있던 손을 바롱은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등 뒤로부터 무엇인가가 떠미는 듯한, 실로 경악스러운 척력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무엇인가가 정말로 나와 랑을 바롱에게 끌어당겼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랑은 아예 몸을 가누지 못했다.
내가 가까스로 녀석을 버티고 서자 바롱은 다시 키득거렸다.
“나로서는 상당히 젠틀하게 대하고 있다는 거 알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유를 예로 들어볼까. 그 녀석조차도 내 몸을 수십 미터로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리는 염력 정도는 간단히 펼칠 수 있다.
B등급에 해당하는 염동력을 사용하는유가 그러한데,하물며 A의 파계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힘으로 버틸 여지를 남겨준다는 것 자체가 바롱에게는 ‘젠틀함’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는 입구까지는 대략 10미터 정도.
뛰어서 몇 초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 그러나 바롱 입장에서는 그 몇 초 안에 우리를 원래 자리에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은 이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린다는 것이다.
이 루트를 타고 가면 난간까지 달려야 하므로 거리는 5미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작전보다야 성공률이 높겠네. 그렇지만 뛰어내려서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바롱처럼 염동력을 구사할 수 있는 유가 있다면 모를까, 내 왜곡능력으로 50층이 넘는 빌딩에서 떨어져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은 간단하다. 도망칠 방도는 없다.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맞서 싸운다는 방안도 남아 있다.
나는 슬쩍 랑의 손을 잡아 당겼다. 건틀릿이 있냐는 물음 정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랑은 내 손을 잡아당겨 자기 드레스 안쪽에 집어넣었다.
큐브 모양의 무엇인가가 만져졌다. 건틀릿이었다.
하지만 이딴 게 있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내 지정능력은 좋게 쳐줘도 C등급. 랑이 또한 건틀릿을 사용했을 때 C등급.
위압의 차이를 감안하면 우리 둘 다 바롱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사용한다면.
나는 큐브를 쑥 꺼내들었다.
랑이 화들짝 놀랐고, 바롱은 여전히 가면으로만 웃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큐브 중앙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입방체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모양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완전한 건틀릿의 형태를 갖추었다.
나는 폴트에게 들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폴트의 계측에 따르면 건틀릿을 사용했을 때 나의 수준은 C+등급.
이렇게 되면 타격 자체는 입힐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물론, 바롱을 상대로 어떤 우위를 점하게 만들어준다는 뜻이 아니다. 승산이 0%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죽을 확률을 미세하게 낮추어줄 뿐이다.
그렇지만 수단이 이것뿐이라면.
“싸우려고?”
바롱이 비웃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그렇게 멍청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 이건 정말…… 무의미한 저항이지?”
“시끄러워.”
지난번에 만난 바롱은 내 생각을 읽었다.
그러니 지금도 계속 읽고 있을 것이고, 말을 가려서 하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떠오르는 대로 쏟아내는 편이 기분 상으로도 나을 것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아니, 노력한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우리 얘기 좀 할까?”
“원하는 게 뭐야.”
“아, 응, 좋아. 그 얘기를 하려던 거니까 안심하고 들어. 흥분하지 말고. 지금은 생각 안 읽을게. 너 너무 달아올랐어, 지금. 그러다가 훅 타버리는 수가 있다?”
바롱이 벤치에 등을 기대어 더욱 편안하게 몸을 뉘였다.
늘어지게 기지개까지 펴고, 바롱은 손을 휙 휘둘렀다.
부유 중이던 책 한 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랑이 움찔 떠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고개를 돌려 랑을 바라봤다. 겁에 질려 있었다.
나도 별반 다를 게 없으리라. 다만 건틀릿을 차지 않은 손으로 랑의 손을 계속해서 맞잡았다.
“거기까지. 감정은 거기까지 퍼붓자.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한나진, 우리는 제갈랑을 죽어야 해.”
“무슨 개소리를──”
“들어.”
압박감.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벌어지지 않아서, 목 안에서 소리를 울리게 만들 수는 있지만 바깥으로 거의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 광경을 즐겁게 감상하는 바롱과 이어서 다가온 책.
제목은 육안으로 읽을 수 있었다. 성경.
배경에 어울리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을 텐데, 성경이라니.
그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웃어버릴 뻔했다. 입만 열려 있었더라면.
물론 열려 있었더라도 바롱은 끊어냈을 테지.
이렇게.
“처음에 이 세계에 소환되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가면 안 바롱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눈앞에 전쟁터가 펼쳐져 있었지. 너희와 너희는 서로 싸우고 있었고. 처음에는 너희가 서로 다른 종이라고 생각해 버렸을 만큼, 너희는 잔혹했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너희의 모습. 너는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군.”
대답할 수 없었다.
할 수 없도록,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했다. 지성이란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알량한 마음이 내게도 있었다는 거지.
너희가 살육을 일삼는 데에는 분명 위대한 명분이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더 많은 영광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 말라고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바롱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 소녀를 만났다. 그 아이는 8살이었고, 양친은 죽었다. 전쟁으로 인해. 그리고 그 아이는 내게 말해줬다. 이 전쟁이 재벌들을 위한 것이라고.
그 전쟁은 이라크에서 있었는데, 석유회사와 군수회사의 이익이 충돌해 그런 전쟁이 벌어졌다고. 대대로 그 땅을 지키고 살았던 정당한 이라크의 주민들은 그렇게 죽었다.”
그 목소리가 처연하게 울렸다.
“나는 소녀에게, 복수하고 싶으냐고 물었다.너와 내게는 그럴 힘과 권리가 있다고, 부탁한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라! 나는 파계종이야. 너희의 도덕에도 법에도 구속받지 않는 유일한 존재! 너희의 억압에 묶이지 않는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나 아닌가?
나는, 나는 그 아이를 내가 구원해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들을 찢어죽일 권한을 지니듯, 그 아이에게는 돈과 권력으로 얽힌 압제자들을 물리칠 정당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
아주 길게.
“그러나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바롱은 스스로의 가면을 어루만졌다.
“그 아이는 내게 말했다. ‘더는 누구도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너의 그 판단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그것은 네가 바라는 것이냐. 네가 원하는 것이냐. 억울하지 않으냐. 감당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괜찮겠느냐. 너는 정말, 그들을 살려두고 싶으냐.’
그러자 아이는 말했다. 수천 년 간 그 땅에서 배우고 써온 언어로, 내게, 그들의 관습과 문화로 이렇게 말했다.
‘자비로운 알라께서는 그들을 죽이지 않으실 거예요.’”
부드득. 바롱은 가면을 움켜잡았다.
“그때 깨달았다! 인류란 도대체 얼마나 찬란한 것이고, 도대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유산을 파괴하고, 지금까지 흘러온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간악한 자들도 있다고 말이지.
나는 그 아이의 부탁을 들어, 이라크의 땅을 파괴한 전쟁범죄자들을 응징하지 않았으나, 더는 그 아이와 같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결심했단 말이다!”
심장을 불에 데우듯, 끓어오르는 목소리.
“머즐드독스! 전쟁무기를 만드는 군수업체이자 사람들을 탄압하고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인류의 악 그 자체.
그들은 찬란했던 인류 문명을 끔찍한 전쟁사와 연관 짓게 만드는 기만자요, 무대 뒤편의 조장자야.
기업의 탈을 뒤집어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아, 응? 그걸 감안해서, 으응, 아주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이거야. 나는 미래의 머즐드독스 총수를 죽여 버리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잇따르는 결론.
“그러니 걔를 좀 죽이자.”
아무렇지 않게, 죽여 버리겠다고.
잠시간 할 말을 잃었다.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가시지 않고 남았다. 나는 다물지 못한 입을 그대로 놀렸다.
“왜 그런 결론을 내린 건데.”
“응?”
“아니, 아니, 이상하잖아. 기업이 잘못됐다고 생각해도 왜 얘를 죽이냐고.”
이 질문조차도 잘못됐다는 걸 안다.
기업이 잘못됐으면 잘못된 것이지. 총수 혹은 그 딸을 죽이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결론이다. 비약이다.
인간들에게도 인간 나름의 정의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공청회와 재판을 열어 범법자와 부정의를 심판한다.
그러니 제삼자가 나서서 즉살하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이고 규율과 도덕론에 기반한 물음이 아니라 나는, 솔직히 말해서 억울함을 원인으로 두고 이렇게 물어버렸다.
“그걸 왜 이 어린애한테 따져.”
“무슨 말이지, 그건? 너는 이 나라의 기업이 대에 대를 이어 상속된다는 걸 모르는 건가?”
“하지만 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잖아.”
아니. 하려고 했다.
변화하려고 했다. 지금 약속을 했다. 졸졸 따라다닌 것이라면 알 것 아닌가.
정의로운 기업을 만들겠다고, 오직 좋아하는 언니와 가족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다.
그런데 너는 그 순수를, 갸륵함을 뭐라고 말하고 싶다는 것인가.
“글쎄? 이것도 저번에 말한 거 아닌가? 인간은 태생이 악하며…….”
인지성악 기선자위야. 人之?? ??者?.
“순자 얘기는 하지 말고.”
“으흠, 배우고 배워서 써먹을 줄 알아야지. 너도 인류의 지성을, 순자의 말을 납득한다면.”
“예전에 죽은 사람 말고 산 사람 얘기를 해라, 미친 새끼야.”
건틀릿을 거머쥐었다. 바롱은 이번에는 킬킬거렸다.
“산 사람이라.”
바롱은 푸념하듯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절차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건 알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너는 이걸 알아야 한다! 나는 너희 원리원칙에 지배되지 않는, 통솔되지 않는 존재라는 것 말이야.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으로서 도덕적으로 제한당하지 않는 무적의 상태란 말이지. 그래서 너희 절차와 정의를 따를 필요도 없어. 악이 있으니, 처단한다. 처단하기까지 걸리는 귀찮고 고되고 로비에 무너지는 절차 같은 걸 따르지 않고, 즉시. 즉시 정의를 실현한다.
이거 너희한테 엄청 이득이 되는 얘기 아닌가?”
“그런 소리를 하지 말고 얘가 죽어야 할 이유를 대라고.”
“그건 계속 댔는데.”
“너 진짜 열 받는다.”
“열 받아? 열 받아서 어떻게 할 건데?”
칠 건가? 칠 건가? 바롱이 깐죽거렸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조롱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내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냐 어떠냐는 이제 고려할 사항에서 빠져나갔다. 애초에 도망칠 방도가 없지 않은가.
도망치지 못하니까 나온 대안이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쥐구멍 안으로 파고든 고양이를 목도한 쥐가 어쩔 수 없이 고양이의 코라도 물어뜯어 보는 것처럼.
도망치지 못하면 싸우는 수밖에. 그 원리로 지금껏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것이다.
다짐했을 텐데.
“응? 난 너는 관심 없는데?”
바롱은 폭소했다.
“아니, 뭐, 내가 언제 너 죽인대?”
키드드드드득. 풀벌레가 우는 것처럼.
“의미가 없잖아. 너를 죽이는 건 내 정의에도 너희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데 내가 왜 그런 나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를 악인으로 몰아세울 생각이야? 미안하지만 나는 악?도 인人도 아니라서”
전신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난 네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굳어버린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섰다.
“아니면 쪽팔려서 두 발로 걸어 나가는 건 좀 그런가? 그것까지도 배려해줄 용의가 있어,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나를 나를 흥미롭게 관찰하며 바롱은 양손을 포개듯이 휘둘렀다.
아까와는 달리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비명이 쏟아질 정도의 압박감이 내 전신을 휘감았다.
굳어 있던 몸은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하다가 뒤로 나자빠졌다.
후방으로 대략 9미터.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등을 때렸다.
이어서 그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충격이 찾아왔다.
랑은 아직 저 멀리 바롱의 눈앞에 서 있고.
나의 뒤로 고작 1미터, 옥상을 빠져나가는 문은 보란 듯이 활짝 열려 있다.
***
나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