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1화 (21/112)

〈 21화 〉 004. 아니, 뭐, 정 아무도 없다면 (2)

* * *

하늘을 마주하는 세계가 곧 작은 정원이었다.

누가 이런 것을 꾸며놨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곳에, 관상용 주목을 둘러쳐 벤치 하나를 덩그러니 내려놓은 그곳에 랑이 있었다는 것.

축 쳐진 어깨를 으쓱, 나를 돌아봤다가 랑은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이 흐르는 얕은 개울까지 나 있었다.

건너기 위한 다리가 마련돼 있었고 그 이후에 곧장 벤치였다.

물고기는 없나 한가하게 살피며 나는 랑에게 다가갔다.

곁에 앉기 직전 뭘 보고 있나 싶어서 녀석과 같은 방향으로 섰다.

노을이 펼쳐졌다.

굳이 시간을 감안할 것도 없이 그 노을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랑도 마찬가지겠지.

그러나 가짜냐 진짜냐 따질 생각은 없다. 어쨌거나 하늘은 새빨갛고, 오히려 보통의 노을보다도 아름답다.

다른 행성에서 대기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이럴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발상까지 툭 떠올랐다.

그 발상 고이 접어두고.

옆에 앉았다.

“사람이 묻잖냐. 여기서 뭐하냐고.”

웃음기를 섞지 말아야 했는데 실패했다.

으음, 중학생의 감성이란. 역시 울적할 때는 옥상이지.

똑같이 생각해서 다짜고짜 옥상으로 올라온 나도 비슷한 감성의 소유자라는 점이 묘하게 슬픈데.

슬쩍, 고개를 옆으로 향하자.

랑은 볼에 바람을 훅 집어넣고 내가 돌린 방향으로 따라 돌린다.눈길을 피한 것이다.

여기서는 말랑거리는 볼만 보인다. 얼굴의 나머지는 긴 앞옆머리에 가려진다.

어떻게 해야 말문이 트일까.

일단은 여기서 내려 보내고 싶지만, 그건 어려운 게 아니다.

이래 봬도 건장한 20대 청년이니까. 여자 중학생 하나 제압해서 엘리베이터 태운 뒤 1층에 내려주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그럴 경우 다시 올라가려 하겠지. 따라서 납치 작전은 의미가 없고.

“너도 담배 태울래?”

“……무슨 헛소리야.”

“거짓말이야. 담배 잃어버렸어.”

어디서 떨어뜨렸거든.

조용히 덧붙였다.

역시 남의 입을 강제로 열어야 할 때는 맛있는 걸 들이대거나 헛소리를 하는 게 최고다.

담배를 권유한 시점에서 맛있는 것도 들이댔지.

이 이중 트리거. 기가 막혔어.

농담은 접어두고.

“오늘은 망했네.”

잠시 기다렸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귀가 먹지 않았다는 확신은 얻었으니 혼자 주절주절 떠들면 알아들을 것이다.

“네 언니는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고, 너는 언니를 포기할 마음이 들지 않았고. 서로 망했어, 안 그러냐?”

랑이 이쪽을 휙 돌아봤다. ‘나 놀리려고 왔어?!’ 하고 소리치려는 것 같았다.

터지기 직전의 말문을 랑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울먹거리는 눈매를 다 봤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설명 좀 해봐.”

대답이 없다. 그래도 듣고는 있다.

“저번에 대강 넘겼잖아, 너희 가정사. 내가 끼어들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좀,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보고 있기가 그렇다. 그래서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들어는 보자고 생각해서.”

“말해도 이해하지 못해.”

“이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런 오만한 인간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없이 사랑해서 결혼 서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커플도 우연한 계기로 다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믿었던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찾아오고, 존경하던 교수가 비리를 저지르다 쫓겨난다.

이런 찝찝한 일들이 벌어지는 데에는 뭐, 많은 이유가 있겠지.

그러나 거기서 공통점을 추출한다면 그건 아마도.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

잠시, 랑의 옆모습을 응시하던 상태에서 정원의 풍경 쪽으로 돌아보았다.

이 풍경, 금수저의 풍경.

전 세계를 휘어잡는 머즐드독스 총수의 둘 뿐인 딸이 보는 풍경.

내가 결코 닿을 수 없고, 솔직히 별로 닿고 싶지도 않은…… 붉은 노을과 옥상 정원.

이 위치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누군가와 싸우다가 왔다.운이 좋아서 달아날 기회를 얻긴 했지.

아무튼 서로에게 클로와 칼을 겨누는 동안에도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의 위치에서 한월은 절대적인 인간이고, 내게는 참 애매한 존재다. 열등감 발전기 정도.

그러니 나는.

“네 얘기를 듣고 싶다고.”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 그런 걸 얘기해.”

벤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두 걸음을 걸어서 바로 랑의 앞에 꿇어앉았다.

이제 더는 시선을 피할 겨를이 없다. 랑은 양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보통 자기 눈을 가리는 게 적절한 수순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아무튼 됐으니까.

“나는.”

토해내는 것 같은 목소리.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울음기는, 드물게도 울음기는 섞여 있지 않았다.

다만 그 어색한 건조함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착 가라앉아서 숨을 삼켰다가 가까스로 올라오는 단어를 감당하는, 메마른 음성은 지나치게 어렸다.

“엄마는,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좋은 사람인 것.

무서운 분이시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셔. 언니도 사랑해.일에 지치셨을 텐데도 매일 밤마다 동화책을 읽어주셨고, 더 나은 요리사가 많을 텐데도 우리 식사만큼은 항상 직접 해주시고…….”

아마 어리게 자라난 탓이겠지.

“그래서 나는…… 나는, 나는 엄마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나보다는 언니가 훨씬 나으니까.

나랑 다르게 지정능력도 제대로 갖고 있고, 공부도 훨씬 잘하고, 친구도 많고, 사람들과도 훨씬 친하고, 말투도 어색하지 않고, 그래서, 읏…….”

깨어지듯 갈라지는 건조함.

“우읏.”

울어버리려고 한다.

우으으, 하고 더 목소리를 높이면서 아까처럼 눈을 확 붉히며.

이대로 울게 하는 편이 나을까 어떨까.

잠깐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질 고민이 진짜로 사라질 무렵이었다.

나는 내 눈을 가린 랑의 손을 떼어냈다. 간신히 보이게 된 랑의 입을 틀어 막았다.

“우으읍.”

“적당히 울고.”

이제 응석을 부려서 넘어갈 영역은 지났다.

더 물러서면 옥상 끝이고, 그 다음에는 낭떠러지다.

그때는 내가 아니라 폴트가 와도 어떻게 못할 것 같으니 이쯤에서 정리해야지.

나는 어렵사리 웃어줬다.

따라해 보라고 권유하듯.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무튼 너는 네 언니가 너무 좋고. 그래서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히려 너보다 나은 언니가 가업을 다 물려받고. 너는 그냥 언니랑 사이좋은 동생으로 남고 싶다는 거잖아.”

“그건 아까부터 얘기한…… 읍.”

다시 틀어막았다. 넌 조잘거리면 조잘거릴수록 멍청한 소리를 하는 버릇이 있어서.

짧게 탄식하고.

“그럼 네가 그냥 회사를 먹어버려.”

생전 처음으로, 거대 담론을 입에 담았다.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지 모르는 충격적인 헛소리를 터뜨렸다.

“애아, 애아을?”

“네가 회사를.”

손을 살짝 뗐다.

“네 언니는 머즐드독스의 모습이 싫어서 나간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정의롭지 못해서. 가치관에 부합하지 못해서.

그러면 네가 네 언니의 정의관에 들어맞는 회사를 만들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나는 언니보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희 언니가 안 돌아오면 아무튼 회사는 네 차지 아냐?”

랑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하냐는 식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기, 기업은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는 게 아닌 것. 주주총회도 열고, 이사회에서 검증도 하고 여론도 확인해서…….”

“그럼 씨, 철저하게 네 언니를 모함해버려. 그거 아주 꼴통이라고. 내가 도와줘?”

“아, 아니, 아니, 하지만 그건 이상한 것.”

“뭐가 이상한데?”

“나는, 나는 언니 좋아하는데? 내가 왜 언니를 모함해?”

“언니를 돌려놓기 위해서. 회사를 먹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또 언니를 회유하는 거지.”

“하지만 그건 완전, 그 뭐냐, 본말전도고…….”

공부 못한다면서 사자성어는 제법 자연스럽다.

“네가 방금 그랬잖아. 기업은 간단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고. 이 방안도 최종목표를 위해서 빙 둘러가는 것뿐인데?”

“하지만 그러면 언니가 불쾌할 것.”

“너희 언니가 왜 불쾌해. 회사 일에서 빠지겠다고 집까지 나왔는데. 미리 언질을 놓으면 되는 거잖아. 언니를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언니를 모함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이런 방안 자체는 떠올려 봤겠지.”

랑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얹었다.

사람은 지나치게 쉽게, 다른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필사적으로 눈물 흘리며, 제발 한 번만 도와달라고 울부짖는 사람은 보통 살아남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아봤을 터다.

자신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이, 계책이 먹히지 않기에 사람은 수치심을 무릅쓰고 남에게 손을 뻗는다.

간단한 말 몇 마디와 알량한 혀놀림으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보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만이다.

뭐, 백보 양보해서 누군가에게는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지.

작위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누군가에게는 간단한 업무가 될 수도 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해보려 하지 않은, 그저 거기 앉아서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인형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매우 리얼리티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동시에 랑은 스스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않았을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다.

다만 내 역할은.

여기서 내 역할은.

“우선 시도만 해보자.”

최소한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

“진짜 간단하게라도 좋아. 당장 집에 돌아가서 공부를 시작한다든지. 아니면 드라마 같은 걸 보면서 남이랑 공유할 관심사를 찾는다든지.

그 말투도 솔직히 재밌긴 한데, 고치고 싶다면 고치고, 친구가 필요하다면 찾으면 되는 거고.”

“시, 실현가능성을 따지고, 그리고 이것저것 실험하고 그래야 해.”

“아니, 제발 그런 복잡한 거 제쳐놓고.”

머리 위에 올려놓은 손을 마구 움직여서, 헝클어뜨렸다.

이거 의외로 여자들이 많이 싫어한다고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싫어하라고 저지른 짓이다. 주의력 분산.

“그렇게 치면 네 언니가 네 생떼에 못 이기고 돌아오는 건 실현가능성이 높냐? 그것도 계산 하에 저지른 짓이냐?”

“아니, 그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공부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말투도 바꾸고, 또 친구도 만드는 건, 그건 너무 어려운 것. 봐봐, 지금만 해도 이상한 말투, 이상한 말투 썼구…….”

잠깐 심호흡.

“그래도 친구는 하나 만들 수 있는데.”

아, 이 대사는 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계할 가장 효과적인 대사 같아서 억지로 쳤다.

낯간지러워서 얼굴을 확 가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그냥 양손으로 랑의 눈을 가리는 편이 나았다.

이래서 아까 내 눈을 가렸군. 상대방 눈가리고 아웅은 의외로 유효한 방식이라는 걸 배워둔다.

그러니까…….

“하나는 했네, 그렇지?”

눈은 가려져 있다.

그러나 얼굴은, 뭐랄까 전반적으로 새빨갛게 변했다.

내가 아니라 랑이.

아니, 나도 새빨갛게 변했을 것 같기는 한데 랑은 정도가 심하다.

평소에도 홍조가 짙은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익은 곶감처럼 변해서…….

게다가 엄청 뜨겁다.

눈에만 손바닥을 짚고 있는데도 뜨뜻함이 몰려올 정도다.

그러거나 말거나 랑은 신경 쓰지 않고,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개서,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우응.”

랑이 중얼거렸다.

“오늘부터 1일이야…….”

그 표현은 친구끼리 쓰는 거 아니다.

너 정말 친구 없는 녀석이었구나.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나이 차이가 얼마지? 일곱인가 여덟인가, 아니면 여섯인가.

어느 쪽이건 슬슬 오빠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연령차에 속한다.

얘가 고등학생이면 나는 스물다섯 정도인가.

그래도 뭐, 친구라는 건 많은 게 좋은 법이고.

했던 농담이지만 대출이 필요하면 얘 이름을 대면 좋을 것 같고.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앞으로 필요한 일이 있을 때 부를 것. 그리고 뭐냐, 너 가는 길에 전화번호 좀 불러라. 또 도망가면 그때는 전화로 찾게.”

“으응…….”

확답을 듣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랑도 따라서 일어섰다.

결국 이런 식으로 평온하게 일단락됐다.

이제 폴트에게 돌아가서 당신 주인이 총주가로 삼성을 압도하는 기업을 먹어치울 겁니다, 하고 알려주는 일만 남았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늘 말했지만 “──악?은.”

목소리.

“악은 특별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적이다. 우리와 함께 먹으며, 함께 잔다. 어디에나 있다. 너희 시인의 말.”

붉은, 그러나 하얀 털이 달린 짐승의 가면.

웃음 안에 감추어놓은 더 커다란 웃음을. 짐승은 우리를 향해 굽이진 두 팔을 넓게 벌렸다.

“잊었냐, 아니면 알지 못했냐?”

***

나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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