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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20화 (20/112)

〈 20화 〉 004. 아니, 뭐, 정 아무도 없다면

* * *

“운명은 가련하다.”

하젠야크트가 여전히 땅에 발을 딛지 않는 채 재인에게 몸을 돌렸다.그에 따라 어마어마한 위압이 움직이며 사방에서 소용돌이쳤다.

어떻게 된 것인가, 묻는다고 해도 돌아올 대답이 없었다.재인은 나 이상으로 혼란스러운 듯했다.

대포까지 불러내어 여기서 끝장을 내겠다고 선고했던 그녀였다. 그 증오가 무색하게도 재인은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하젠야크트를 향해 섰다.

재인이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하젠야크트가 저지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는 어리석다.”

입을 열었다, 라고 하면 상당히 잘못된 표현이었다.

입이 벌어졌다. 놈의 외관은 분명히 정장을 입은 토끼(뒤늦게 생각난 비유인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그 토끼를 닮았다.)의 입이 벌어지자 풍기는 인상 자체가 달라졌다.

낚싯바늘을 물 때의 갯지렁이의 그것 같은 구강이 여섯 갈래로 쪼개지며, 그 안에 촘촘히 박힌 이빨들을 번뜩거렸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재인을 무시하고 하젠야크트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소 권위적인 어투로, 이렇게.

“너희가 우리를 악이라 판가름하매, 그런데 어찌 너희는 자신들끼리 싸울 줄밖에 모르는가. 너희들은 같은 근간에서 시작한 하나의 혈육이요, 하나의 가족이요, 하나의 터전이 아닌가.”

형이상학적인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대강 어떤 뉘앙스인지는 알겠다. ‘내가 보기에는 똑같이 생긴 것들끼리 싸우고 자빠졌네. 너희들 멍청이냐?’ 정도.

그간 고등급 파계종과 실제로 대면한 적이 없어 어떤 놈들인지 나름 궁금했다.바롱에 이어 하젠야크트까지 조우하니 놈들이 어떤 부류인지 감이 잡혔다.

앞으로는 만나지 말아야지.

그렇게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이런 한가로운 생각이 가능했던 이유는 하젠야크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런 기색이 있었다.

하젠야크트는 내게 말하고 있지 않다.

아니. 그냥 내게 관심 자체가 없었다. 무시 중이다.

끊임없이 재인에게 다가가면서 자연스럽게 나로부터는 멀어졌다.

재인은 그런 변화를 알아챘다.

아직 허공에 떠올라 있던 대포가 재빠르게 나를 향했다.재인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방향을 틀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고 하젠야크트는 마치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독립투사와 같이 깊게 한탄하고는, 여전히 재인을 향해서 말했다.

“가르쳐주어도 고치지 못하고, 교정해도 바로잡히지 못하니, 이것이 너희의 천성이다. 눈앞의 명백한 적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야 하거늘, 어찌 망령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인가. 너희는 우리를 악이라고 일컫는데, 그 관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뒤를 돌아보고.

“너희는 너희의 생을 위해 우리를 희생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반대를 걷는다. 그렇다면 어설프게 무엇을 선과 악으로 나누겠는가. 머릿수가 많기 때문인가? 찢어진 차원 너머에, 60억보다 많은 우리들이 있다.”

떨려오는 다리에 박차를 가해.

“무수히 많은 우리가 일제히 쏟아진다면 그때 선악의 뒤바뀜을 인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우리는 너희의 오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 나는 너희를 징벌하러 온 것이다.”

도망친다.

매우, 매우 성공적이었다.

독일인들에게 잔혹한 얘기이지만 하젠야크트에게는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다.

만일 내가 무사히 랑을 데리고 사무실까지 돌아올 수 있다면, 그건 대부분 나의 덕분도 한월의 덕분도 누구의 덕분도 아닌 하젠야크트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대규모 스케일의, 할리우드에서 소재로 쓸 법한 상황에서 빠지겠다.

문득 신경이 쓰여 뒤를 돌아보니 그 경치가 가관이다. 수없이 늘어나는 포대와 그만큼 뻗쳐나는 가시.

그 가시가 포대를 가로막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재인에게 직접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솟구치는 초대형 이빨들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재인이 저걸 이길 수가 있을까. 아니, 버틸 수나 있을까.

이기거나 버티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틈을 벌이다가 도망치는 작전 정도는 성사시킬 수 있겠지.

나로서는 덜 찝찝하고 더 끔찍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 일의 결말은 나중에 짓는 것이 낫겠지.

우선은, 경찰에 어떤 미친 여자가 날 죽이려 한다고 신고한 뒤에 말이다.

돌아섰다. 이곳은 내가 설 위치가 아니다.

세상은 너희들끼리 구하도록.

***

도시의 이변을 모두가 알아차렸다.

시각은 밤 10시를 조금 넘겼는데 하늘이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으니 말은 다했다.

하젠야크트로부터 멀어진 이후 계속 달려서 랑의 소유라고 폴트에게 들었던 건물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경비원이 막아섰다. 이래서 부자동네는 싫다.

이것들은 하여간에 분위기 파악을 할 줄 모른다.늦은 밤의 하늘이 새빨갛게 변한 와중에, 도대체가…….

길게 끌 것 없이 클로를 들이밀었다.

“공무집행 중입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공무원이 아니고 공무원조무사거든.

생물학도처럼 명명하자면 공무원붙이다.

그래도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어설픈 협박은 잘 들어먹혔다. 나는 단숨에 빌딩 내부로 입성했다.

그러나 정작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이 아파트는 건설사들이 몰려들어서 만들어진 신도시에서도 가장 높은, 거주지로서는 최고층이라고 할 수 있는 마천루 중의 마천루다.

그런데 이 높은 건물이 통째로 랑의 것이라고 하고, 따라서 랑은 이곳 어디든지 자기 마음대로 출입이 가능하다는 건데…….

탐색을 위해 경비동인 1층을 제외한 최하층, 즉 2층부터 초인종을 눌렀다. 동시에 눌렀다.

반응이 없는 가운데 한 주택에서 사람이 나왔다. 웬 모르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클로를 내보이며 공무집행 중이었다고 변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엿을 먹인단 말이지.

하지만 내게도 방법이 있다. 방금 막 떠올랐다.폴트에게 연락해 층수를 물어보면 되잖아.

자신감 있게 휴대폰을 꺼내드는 순간 통화권 이탈 마크가 떠올랐다.

요즘 시대에 뭐 이딴 게 뜨는가 싶겠지. 그런데 이건 통신사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파계지점이 발생하면서 전자파가 왜곡된 결과이다.

이것이 내가 따로 무전기를 사용하던 이유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무전기는 며칠 전에 망가졌다.

“쉽지는 않네.”

폴트에게 연락할 수단이 사라졌으므로 랑을 불러낼 수단도 없음.

아니,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여기에 랑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도 어렵다.

나는 랑이 왔을 법한 장소를 생각해내어 찾아왔을 뿐이지, 녀석이 여기에 있다고 확증할 만한 증거를 구한 것이 아니다.

의심을 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이건 패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어쨌거나 도시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

랑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

어쩔 수 없다.

폴트는 폴트 나름대로 사력을 다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 장소를 먼저 떠올린 것은 나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다.

정 아무도 없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재인은 분명 내가 ‘누구라도 나서다’의 ‘누구’ 수준도 못 된다고 했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럴 테지만.

나의 보잘 것 없는 입지를 랑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런 건 끔찍하다.

“좋아.”

무릎을 탁 쳤다. 딱히 기가 막힌 발상이 떠오른 것은 아니고 그냥 기합을 넣기 위해서.

3층으로 달린다. 없으면 4층으로 달린다.

그것도 안 되면 5층으로.

혹은 6층으로.

해서 최상층까지…….

그렇게 해서.

“누구세요?”

“죄송합니다, 여기 키가 이 만한 어린애 못 보셨나요?”

문이 닫히고.

“이 시간에 무슨…….”

“죄송한데, 어린애 하나를 찾고 있거든요.”

거절 당하고.

“바깥에 무슨 일이라도 났대요?”

“모르겠어요, 그것보다도…….”

종교는 이미 있다고 냉대당하고.

“들어오지 마세요.”

아니 그냥 문전박대 당하고.

“무슨 일이세요?”

“여기서 어떤 어린애 못 보셨나요?”

대답 없이 인터폰이 끊겨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일단은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오르고 또 올랐다.

“헉, 헉…….”

호흡이 가빠진다.

“허억…….”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마침내 정말 미친놈처럼 21층까지 올랐을 때는 솔직히 조금 도취돼 있었다고 생각한다.

뭔가 해내고 있다는 느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는 느낌.

한월이 그거 있으면 뭐 하냐, 그 녀석은 실상 모든 것을 구하는 영웅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재인의 말에 반박하고 있었다.

어차피 들어먹지 않을 인간이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서 2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홀로 앉아 투덜거렸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입지 않길 바란다면 그 사람이 잘했어야지.

그 사람이 자책한다면 자책하는 거고, 그렇게 된다고 해서 내게 뭔가 따지려 든다는 건 터무니없다고.

토론 끝나고 나서야 했던 말을 떠올리는 나쁜 버릇이 발동하고 있었다.

억눌린 학창시절의 표상인 것 같아 불쾌하군, 이라고생각하다가.

문득 울컥, 뭔가 나쁜 기분이 몰려왔다.

오늘따라 감정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참 싸우고 난 뒤라서 짜증이 솟구친 것 같았다.

그래, 내 감정을 놓고 ‘것 같았다.’ 하고 말할 정도로 나는 모호한 상태에 빠졌다.

생각이 너무 많다.

생각이 많은 것은 나쁜 버릇이다. 그러나 나쁜 버릇이 무엇인지 분류하는 것조차도 복잡한 생각의 일종이라서 결국 생각하게 된다.

추하고 비틀린, 이쪽으로 저쪽으로 왜곡되어 일그러진 생각을.

자기들이 뭔데. 도망친 나는 안 쪽팔렸는 줄 알아? 나는 괴롭지 않았는 줄 알아?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 제발 누구라도 나타나 달라고. 몇몇 사람한테는, 대단한 몇몇 사람한테는 가뿐한 적 아니냐고.

대단한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잠깐만 나타나서 어떻게든 해달라고.

고작 그렇게, 그걸 빌었는데.

그렇게 기도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라고? 그게 이유였던가?

그런 간단한 연결사 하나로 내 옛날을 퉁치겠다는 거야?

나는 왜 가지 않았지?

“젠장. 정신 차려라, 한나진. 지금이 이러고 있을 때냐…….”

얼굴을 거머쥐었다.

이제 고작 22층 오다 말았다. 그리고 이 건물은 50층이 넘는다.

여기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이 건물에 있을지 없을지도 명확히 모르고, 솔직히 있다고 해도 어떻게 설득해서 안전한 곳까지 데려가야 할지도 막막하고…….

문득, 주머니를 뒤졌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담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아까 재인과 마주할 때 떨어뜨렸던 것 같다.

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멍청한 놈,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거로밖에 못 푸는 주제에 담배를 떨어뜨려?

멍청하다, 멍청해.

흉하게만 느껴지는 피부를 내려놓고 가만히 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 광경을 어쩌면 랑도 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1층까지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 높이까지는 올라와 봤겠지.

그 녀석 체력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계단을 직접 걷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을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위치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그 녀석이라면.

나라면.

지금 어디로 가고 싶다고 느꼈을까.

아니, 지금 어디로 가고 싶지.

담배가 있냐 없냐를 제외하고…… 그냥 직관적으로.

직관에 의지해 여기로 와보겠다고 결정했고 직관에 의해 재인으로부터 도망쳤으니까, 다시 직관적으로.

담배가 없더라도.

나는 옥상으로 가고 싶어.

지금 하늘은 붉으니까, 그게 진짜 노을은 아니지만서도…….

엘리베이터의 오름 버튼을 눌렀다.

역시 초고층 건물. 초고속 엘리베이터.

비행기라도 탄 것처럼 귀가 먹먹해지는 찰나, 나는 최상층인 54층에서 내렸다.

위로 향하는 문.

보통은 잠겨 있지만 건물주가 열겠다면 예 어서오십시오, 마님~ 하고 열려줘야 하는 그 문을.

열지 않았다.

열려 있었다.

“야.”

나는 솔직히, 웃어버렸다.

“여기서 뭐하냐?”

제법 반가웠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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