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6)
* * *
영웅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나았다.
영웅이라고 하면 한월이다. 그 녀석이 나타난다고 해서 내 편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다.
아닌가?적의 편이 늘어나는 것과 별개로 한월은 상식적인 인간이다.
재인을 호되게 나무랄 이유도 자격도 없지만, 다짜고짜 재인과 의기투합해 내게 달려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말리는 위치에 서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겠지.
형, 여기서는 빠지세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게.
의식 없이 이를 악물었다.
재인이 무성의하게 책을 펼쳤다.
최근 영화가 개봉하며 유행을 탄 소설이었다.김훈, 남한산성.
배경이 조선시대라서 핵잠수함 같은 무자비한 게 튀어나올 일은 없겠네.
더듬더듬 내용을 기억해보면 대포 정도는 나왔던 것 같지만.
“환도.”
재인이 낭랑하게 글자를 따라 읽자, 허공에 기다란 철검이 나타났다.
그 자리에 굳어 부유하던 검을 움켜잡은 재인은 실로 무심했다.
위압이 감도는, 그녀의 상상에 기반해 제련된 검.그것만으로도 C등급은 넉넉히 쓰러뜨린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낫지. 대충 상대해준다면 뒤통수 갈길 여지라도 남는다.
방심은 금물, 전개로 갈 수 있을까.
아냐.
재인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녀가 지금껏 한월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을지언정, 실전경험이 없는 초보자에서는 거리가 멀다.
재인은 실질적인 힘의 차이가 전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래서 힘을 낭비하는 걸 줄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긴, 하젠야크트니 뭐니 하는 고등급 파계종이 등장한다는 소문까지 감돌고 있다.
나 하나를 쓰러뜨리겠다고 무작정 지정능력을 퍼붓는 것은 손해다.
재인과 같이 영역지정에 의존하는 지정자는 특히나 연비가 나쁘기 때문에.
그러니 간단하게, 혹은 저렴하게.
값싼 상대에게는 에누리까지 철저히 붙여서.
“포기하세요.”
재인이 말했다.
“등급은 단순히 기술만으로 매기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위압의 수준이죠.
멋대로 온화하게, 이거 어쩌면 클로로 칼날만 받아치면 이기는 거 아냐? 하고 생각하는 건가요? 당신 클로가 이 검을 견딜 수나 있을까요?”
“포기하면 어떻게 할 건데.”
동앗줄 내려왔나, 하는 생각에 물음을 던지자.
“글쎄요. 포기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죠. 손목만 자르는 선에서 끝내줄 테니까요. 다시는 이 판국에 끼어들지 못할 거라는 보증만 있으면 돼요.”
썩은 줄이었다.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다.
“협상의 여지라도 주지?”
“당신이 걷어찼죠.”
이 녀석,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광신적이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지 자각은 있어?”
“앞길을 가로막는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데요.”
“길앞잡이라서.”
“말장난할 분위기가 아닐 텐데요───하나 더, 환도.”
다시 꽃처럼 피어나는 검날.
재인은 그것까지는 손에 거머쥐지 않았다. 다만 공중에 고정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아까 붙잡은 검 하나를 쥔 재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위압의 색이 다양하다. 다소 혼란스러운, 복잡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감상은 여기까지. 재인은 스치듯이 검을 휘둘렀다.
위협적이고 과장된 동작. 클로를 들어 막아내려 했으나 철끼리 부딪치기는커녕 내 몸만 붕 떠올랐다.
이윽고 날이 움직이는 대로, 나가떨어진다.
“자각이라.”
재인은 중얼거렸다.
“그러는 당신은 자각이 있나요?”
“무슨, 말이야.”
누운 것보다는 낫다.최소한 검이 쇄도할 때 다시 막아보는 시도라도 할 수 있다. 나는 앉았다.
힘이 풀린 양손을 등 뒤에 짚어서. 검은 스타킹이 눈에 들어오고. 이어서 교복치마.
그 위로는 나를 멸시하는 새카만 눈동자.
“당신이 뭘 하려는지 자각이 있냐고요.”
“없지는 않아.”
“제 눈에는 없는 걸로 보이는데요.”
재인이 바람 빠지듯 웃는다.
“유의 동생을 찾으러 가는 거잖아요. 바롱인지 뭔지가 출현하고 있고, 저까지 기습한 와중에 죽일 거라고 선언까지 받은 그 아이가 걱정되니까, 그래서 가는 거 아닌가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잖아.”
로퍼를 신은 발이 내 복부를 짓눌렀다.
펼쳐지는 책, 대나무 바늘, 읽는 속도를 따라 수많은 목책이 내 신체 주변을 빙 둘러 땅에 꽂혔다.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 사람들이 걸리버에게 저지른 것처럼 나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재질이 대나무이니 힘으로 못 부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위압이 둘러져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말이죠,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요.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끼어드는 게, 제대로 해낼 자격도 능력도 여건도 없는 인간이 이 난국에 간섭하는 게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마지막 바늘이 귀 옆을 스쳐 바닥을 꿰뚫었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 그러나 말은 끊어지지 않고.
“지금도 그래요. 가령 당신이 그 아이를 만났더라도 바롱으로부터 제대로 지켜낼 수가 있을까요? 저도 바롱한테 졌어요. B+등급이, 물론 메인 전투원도 아니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졌다고요.
당신 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릴 수 있는 제가. 알아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는 해요?”
“하지만 누구라도 나서지 않으면…….”
“함부로 ‘누구’를 참칭하지 말라는 거예요.”
재인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당신 같은 사람들, 늘 나를 멸시했던, 어설프게 손을 뻗어보는 사람들.
도와준다는 게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도 알지 못하고, 그 사람을 책임진다는 게 뭔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으면서, 그러면서 어중간한 마음으로…… 그 알량한 자신감으로 도와주는 사람들.”
헛웃음. 허파가 기관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가쁜 호흡.
“한월이가 없었더라면.”
재인은 필사적이었다.
“한월이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그런 사람들을 믿고 있었겠죠. 언젠가는 그들 중 하나가 저를 정말로 도와줄 거라고, 이 지옥에서 꺼내줄 거라고.
언젠가는, 정말로 언젠가는…….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못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무것도요.”
어깨를 으쓱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저 분수를 알라는 거죠.
당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처음부터 이 상황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었어요.그랬다면 유도 그 동생의 메이드도 당신을 이곳까지 보내지 않았을 테니까. 스스로 찾아 나섰을 테니까.
그렇지만 상황이 결국 여기까지 치달았으니, 당신은 아예 전화기만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어야 해요.”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주제에 희망을 품게 하는 것보다는 낫죠.”
그런가.
논지는 알겠다. 하긴, 모든 광신에도 자기들만의 논리는 있는 법이다.
기제와 결론이 없으면 사람은 손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러니 재인도 단순히 파탄이 난 인간성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로서는 이게 옳다고 생각했겠지.
나를 막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 확신의 근거는 다시 한월을 향한 믿음.
내가 여기 없었더라면 한월이 있었을 것이고, 아니 어쩌다가 없었더라도 찾아올 여지가 생겼을 것이라고.
그 녀석은 정말로, 곁에서 지켜보자니 모두를 구해낼 것 같은 인상을 주니까.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도 있었다.
[행동지정: 인근와해]
“무슨 개소리야.”
어린애 같으니.
“결국 넌 너만의 영웅이 뭐든지 다해내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잖아.”
아니, 진짜로 어린애지.
대학생이 되어 보니 알겠다. 고등학생은 상당히 어린애다.
물론 번듯한 직장을 구해 자기 몫의 돈을 벌고 여윳돈을 부모님에게 부쳐드리는 진짜배기 어른이라면 내 말이 우습게 들릴 것이다. 사람은 한치 앞도 못 보면서, 등 뒤만큼은 몇 번이고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법이니.
그러니까 그냥 편하게 말하자.
나 꼰대 맞고.
너는 정말로 어린애다.
“너 하나 만족하자고 고등학교 교복도 못 입을 그 꼬맹이를 내버려둔다. 그게 네 명분이냐?”
인근와해는 주변의 공간을 국소적으로 수축시켰다가 넓게 확장한다. 게임으로 치면 몹을 분산시키는 트롤링 기술이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과는 많이 다르다. 여러 마리를 뭉쳐놓고 한 대 툭 쳐서 경험치를 쓸어 담는 욕심 플레이는 불가능하다.
이 기술은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다시 말해 도망치기 위해서 만든 것.
위압의 출력과는 별개로 공간의 일그러짐은 재인에게도 적용된다.
갑작스러운 왜곡에 재인이 뒤로 크게 나자빠졌고, 나는 거리를 벌렸다.
일단 달아나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 다만 재인이 거기에 대응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대응방식을 알아내 그것을 역이용하는── “홍이포.”
공중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포신.
중세 후반부의 디자인, 그러나 화약을 다루는 방법에 무지한 만큼 화력 자체는 무식하다.
그리고 위압의 조정을 받으니 발사에 있어 실패할 확률 따위는 제로.
남한산성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 중기와 후기, 즉 전쟁에 있어 본격적으로 화약 무기가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다.
역사시간에 배운 것을 떠올렸다.
────────쿵.
묵직하게, 느낌표 같은 거 붙이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와 닿는 폭음.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전봇대에 맞아 터진 포탄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낙관적으로 말하자면 첫 방이 빗나갔지만, 그건 딱히 청나라 기술의 미흡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단지 저쪽에서 정조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로 다 해내요.”
홍이포, 홍이포, 다시 떠오르는 두 개의 포문.
한 방향을 겨누고 있다.축포 따위를 터뜨리려는 것은 아닌가 착각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당신이 도망쳐서 죽은 그 여자, 딱 그 한 사람만 빼고. 그 사람도 당신 탓이었죠.”
“그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더 많이 죽어도 된다, 이거냐?”
“아뇨, 제 말은 이거죠. 한월이의 탓이 되면 한월이가 힘들어진다.”
홍이포, 홍이포, 홍이포, 홍이포.
더럽다. 청나라군 놈들.
재인은 사랑스레 포문 하나를 쓰다듬으며.
“한월이는 여려요. 누가 보기에도 자기 탓이 아닌데도, 그런데도 자기가 나서지 않아서 죽었다고 생각할 거예요.
자기 탓이라고 죄책감을 느껴서, 그래서 더는 어떤 사람도 구해주지 않으려고 하면요? 더는 누구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면요?
그렇게 믿어버리면, 그러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시냐.
그게 네 두려움이냐.
어떻게 보면 나와 닮았다. 내가 랑을 지키겠다고 분수에 맞지 않게 설치고 있는 것처럼, 이 녀석도 자기가 발을 딛을 수 없는 영역까지 도달해 한월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거겠지.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면 모든 것이 꼭 다독여주지 못한 자기 탓 같으니까.
한월이 자기 탓을 한다면 재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한 ‘자기’ 탓을 할 일이 된다.
줄곧 재인이 제삼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재인은 한월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일은 자신의 일이 된다.
재인은 한월이 자책하지 않도록 막아야만 할 것이다.
그래야 재인 또한 재인을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그 지키려는 마음, 막아내려는 마음. 뚜렷이 알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알 바 아니야.”
아플 정도로 이를 깨문다.비틀린 치열로부터 잇몸으로부터 찌릿한 통증이 뒤따른다.
그러나 확고하게 말한다. 내가 알 바 아니라고. 그건 너희들의 일이다.
그리고 랑이 알 바도 아니다.
그 녀석에게는 지금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평소라면 더 나은 사람이 찾아갔을 테고 랑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내가 가게 됐다.
여기에 나밖에 없기 때문에.
어쩌다가 이런 결과가 됐기 때문에.
아마 내 탓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요. 그건 당신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죠. 인정해요. 그러니 마찬가지로, 저는 제 일을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부딪친 이후의 결과를 모르지는 않는다.이렇게까지 된 것은 사실 선택의 폭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 녀석은 나를 놔줄 생각이 없고 어쩌다가 우연히 이 상황을 타파하게 되더라도 또 찾아와서 같은 사유로 나를 괴롭힐 것이다.
법률적인 도움을 받는 게 편하다면 편하겠지만, 솔직히 고위 지정자를 그런 식으로 버릴 것 같지도 않고……….
“좋아요.”
재인이 배시시 웃는다.
“그럼, 발사할게요.”
타오르는 도화. 그리고 일제히 떠오르는── 가시.
가시?
싸늘하게 위압이 식었다.
“………?”
무엇인가가 이상하다.
밤의 하늘이 짙푸르게 변했다가 다시 붉어졌다.
무엇인가가. 다시 생각한다.
무엇인가가 이상해.
전신을 짓누르는 불쾌한 감각이 찾아왔다.
불가해한, 그러나 의심할 것 없이 존재하는 압박감.
재인을 돌아보니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시야를 더 회전시켰다.
아까 말했던 재인의 홍이포들. 그것들은 여전히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채 발사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그 앞에 솟아난 것들이었다. 가시. 장미에 돋아나는 가시를 대략 아름드리나무 정도의 두께와 길이로 확대시켜놓은 이질적인 것들.
그것들이 모조리 포문을 가로막고 있었고.
가로막혔던 포문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폭발하며, 쾅.
연쇄적인 폭발음.
귀청을 찢어낼 듯 시끄럽게 우악스럽게 들끓는다. 뭐랄까. 예포 같았다. 무엇인가의 등장을 알리고 환송하는.
압박감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C등급의 지정자 따위는 아예 물리적으로 짓누르는 압박감.
다른 무엇도 아닌…… 위압이다.
천천히 공간이 일그러졌다.
갈라진 세계의 틈이 신사복 차림의 실루엣을 토해냈다.
실로 깔끔한 연미복을 입은 토끼. 얼굴이 말 그대로 토끼였다.
토끼는 자신을 환영한 예포와 마찬가지로 허공에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놈이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자신을 소개했다.
“그간 기다린 수고를 인정하겠다.”
여섯 갈래로 벌어지는 토끼의 입.
그 안에 돋아난 음침한 수백의 이빨들을 번뜩이며.
“하젠야크트, 진실로써 이곳에 도달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