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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18화 (18/112)

〈 18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5)

* * *

계절치고는 늦게 노을이 졌다.

서울은 워낙 큰 도시라서 맛집을 찾는다고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니겠지.

제일 노멀한 양식 한식 중식 일식부터 시작해서, 이태원까지 파고들면 세계 각지의 요리를 전부 맛볼 수 있다.

결론만 놓고 말하자면 그래서 목적지가 이태원이었냐, 싶은 저녁이었다.

동남아 각국의 요리를 모두 취급하는 대형 식당.

서빙부터 주방까지 전부 현지인들이다. 서빙이 폴트에 버금가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게 인상 깊을 만했다.

여기서 만했다, 라고 표현한 것은 한국어 솜씨에 감탄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니까 넘어가시고.

일단은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그러나 어색함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특히 랑. 랑은 유와는 아까 싸웠고 나하고는 방금 싸웠다.

대화 상대라고는 폴트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폴트는 뜬금없이 내 옆에 착석했다.

따라서 랑은 혼자 남겨졌다.

폴트까지 그러고 나서는 걸 보면 무슨 의도가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서울에서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배가 부른 와중에도 동남아 음식은 매우 맛있었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인천으로 돌아올 때도 리무진을 이용했다.

우리 사무실은 남동구에 있으므로 아마도 그 방향으로 가겠거니 했는데 차량은 중간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나아갔다. 남동구보다 좀 깨끗한 연수구였다.

연수구 안에서도 남서쪽에 위치한 곳이 송도다.

최근 개발된 신도시인데, 덕분에 인근 지역과 달리 초고층 빌딩들이 몰려 있어 흙수저에게 정신적인 데미지를 안겨주는 곳이다.

차량은 송도 안쪽으로, 중앙공원까지 도달했다.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폴트가 옆자리의 내게 넌지시 말했다.

“저 빌딩, 작은 아가씨께서 머무르시는 곳입니다.”

50층이 넘는 기형적인 높이의 아파트였다.

재벌은 재벌인가 싶었다. 본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차로 1시간 거리인 서울인데 이곳에 거처까지 따로 마련해뒀다니.

몇 층에 사는가 싶어서 물어보았다.

폴트는 곤란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아뇨, 저 빌딩이 아가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무시고 싶은 층에서 주무시지요.”

분위기 굳을 때마다 끔찍한 농담을 던지는 병이라도 있나.

농담이겠지? 농담일 거야.

그렇게 확신하고 차에서 내렸다. 모두 다같이.

내린 위치는 중앙공원을 가로지르는 호수로, 관광객들을 위한 선착장이 마련된 곳이었다.

원래 계획은 아마도 여기서 소형 여객선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던 듯하다. 지금은 없는 일이 됐다.

하긴. 서울에서도 리무진 안에서도 그렇게 분위기가 무거웠단 말이지. 와중에 좁은 배에 올라타버리는 건 좀 그렇지.

그 대신, 우리는 선착장 근처의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유일하게 예약을 해놓지 않은 식당.

아니, 식당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는 정말 어디에나 있는 흔한 카페.

넷은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잡았다.

랑과 폴트는 각자 주문했고 나와 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먹어댈 수 있는 위장과, 그래놓고서 조금도 찌지 않은 살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포가토와 카푸치노.

언젠가 저 커피의 선택법을 놓고 둘이 만담을 떠들어대는 걸 들은 기억이 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덕분일까.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물었다.

“어쨌든 결론은 내야지. 유가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랑이 포기할 것이냐. 여전히 양보할 생각은 서로 없겠고…….”

시류에 따르자는 생각은 아까 포기했다. 애초부터 시류라고 할 게 없기도 했고.

그러니 나는 상황을 관찰해온 입장에서, 오로지 나의 입장에서 유의 편이다.

랑에게 언니를 끌고 갈 권한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랑이 납득해주지 않는다. 유가 돌아가지 않으려 하는 만큼 랑도 완고하게 버티고 있다.

내 생각이야 아까 전달했으니 재차 말로 내뱉는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랑과 유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그러나 둘의 목소리는 없었다.

애꿎은 호수만 멈추지 않고 찰랑거렸다.

“그러니까 너희 중에 하나는─”

“큰 아가씨.”

폴트가 목소리를 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가씨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당분간 총수님의 간섭이 없도록 거리를 형성할 수도 있고, 기업 활동에 참여한다는 전제 하에 독립적으로 생활하실 기반을 마련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아녜요.”

“그렇지요, 아가씨께서는 총수님 자체를 문제 삼고 계시니……. 이런 것을 언급하는 건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폴트는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문에서 최대한의 배려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억지로라도 아가씨를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지요.”

“협박하는 건가요?”

“총수님의 의견을 전달해드리는 것입니다. 무례에 용서를.”

폴트는 카푸치노를 홀짝였다.

거품이 입가에 묻었으나 나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큰 아가씨께서 거부하시니 이제 작은 아가씨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아가씨,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큰 아가씨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그건.”

랑은 울먹이며 헛말만 삼켰다.

그러나 친절과 기다림을 베풀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폴트는 공세를 이어나갔다.

“아가씨께서 포기하시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총수님으로부터 반드시 큰 아가씨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온당 그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위와 사실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지금의 아가씨께는 큰 아가씨를 설득할 여력이 없습니다.”

폴트는 침묵했다.

울 시간을 주겠다는 것이군.20살이나 먹고 저지르기에는 잔인한 짓이었다.

폴트는 그녀가 지적하는 상대방이 어린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혹독한 말을 들은 뒤에 따라올 울음도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랑은 양손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막아보려 하지만.

어설프게 참는 일이야말로 눈물을 일으키는 가장 뛰어난 자극제라는 사실을 랑은 몰랐다.

일단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억누르려 하자 설움은 더 깊게 찾아오고, 랑은 그래서 울었다.

소리를 내어서. 곁에서 지켜보기 싫을 정도로.

붉어진 눈매를 닦고.

“싫어.”

호소했다.

언니를 향해.

“나는, 나는, 싫어. 싫어어. 왜? 왜 헤어져야 해? 왜 그런 결론이 나와? 왜?”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 울어서 조르는 것보다 편한 것은 없으니까.

그것이 호소가 호소로서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호소는 가장 나쁜 수였다.유는 지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가문을 등졌다.

랑의 눈물은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수는 있었으나 그 발걸음을 거꾸로 돌릴 수 없었다.

유가 찢어질 듯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미워.”

랑이 눈물을 다 닦지 못했다.남이 닦아줘도 불가능했으리라.

“폴트도, 공익도 언니도 다 미워. 엄마도 미워. 왜? 대체 왜야. 왜 가족인데 같이 있을 수 없어?

나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냥 옛날처럼, 우흑, 옛날처러엄, 히끅, 히끅, ……우윽. 윽……!”

폴트가 조심스레 랑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랑은 그 손길마저 밀쳐냈다.

“싫어. 다 싫어! 왜, 왜 이래야만 하는 거야! 다아 미워! 다, 다 미워! 꺼지라구, 꺼지란 말이야. 싫으니까, 다 꺼져, 응? 응? 우으, 우으으으으……….”

나는 랑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유와 폴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됐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어린아이의 마음 정도 누구나 헤아릴 수 있다.

언제까지고 함께, 친구 같은 자매로 남고 싶다는 욕심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헤아림과 인정이 세상에 끼치는 영향은 보잘것없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랑은 엎드리고 한참을 울었다.

어깨를 떨고, 가끔가다가 기침을 하며 감싸 쥔 손가락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휘저어 울었다.

“나아.”

문득, 랑은 일어서서 말했다.

“나, 화장실 갈 거야.”

지친 숨을 섞으며.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10분이 지나, 그런데도 랑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

“금발, 다중화면을 켜요.”

“잠시만, 만약 그랬다가 화장실에 있는 모습이 나오면 어떡해? 우리가 오해한 걸 수도 있잖아. 아직까지 울고 있을 수도 있고.”

“원칙적으로는 작은 아가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것 같군요. 한나진 씨께서는 잠시 돌아서 주십시오. 저희끼리 확인하겠습니다.”

[특이지정: 다중화면]

잠깐의 정적.

“연결을 끊어놨군요. 이쪽을 보셔도 됩니다.”

등을 돌리자 예의 화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화면 속에 떠오른 것은 새카만 배경과 간간이 떠오르는 하얀 점 몇 개뿐이었다.

“연결을 끊었다니……. 그런 게 가능해요?”

“위압을 막아낸다는 전제 하에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강화 건틀릿을 갖고 계신 모양이지요.”

현실감이 없는 대화가 오갔다.

여기서 이렇게 도망을 치다니. 남아 있는 셋은 도망친대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랑은 그렇지 못하다.

랑의 관점에서 사태를 파악했어야 했다. 변명할 수 없는 실책.

그래도 버스 타고 자기 집찾기조차 못하는 꼬맹이는 아니겠지.

문제는 랑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 바롱이 그녀를 죽이겠다고 빼도 박도 못할 경고를 늘어놨다.

좀전까지는 유가 동행하고 있었기에 안전이 확보된 상태였다만, 현재는 상황이 뒤집어졌다.

랑은 홀로 남겨진 것이다.

“흩어져서 찾아야 하는 건가?”

나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셋을 쪼개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바롱의 출현이다.

그런데 셋 중에 바롱에 대응할 수 있는 지정자는 유뿐이니 폴트나 내가 랑을 찾아낸다고 해도 위험은 그대로 남는다.

“모르겠어요, 일단은…… 저희 팀원들한테 연락을 넣어 볼게요. 아까 인천으로 돌아오면서 재인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근처랬어요.”

“저도 본가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다른 지정자는 동원이 안 되나요?”

“당장은 인원 확보가 어렵습니다. 하젠야크트의 출몰이 예견됐기에……. 바롱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피해를 남겼지만 하젠야크트는 독일 대도시를 거의 파괴하고 도망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이가 부드득 갈렸다.

그렇지. 다수를 지키기 위해서 소수의 안전은 무시될 수 있다.

재벌가 작은딸일지라도 그 다수소수 논리에 의해 통제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평등하다.

“알겠어요. 그러면, 일단 흩어지죠. 똑같이 위험하더라도 그 녀석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누구라도 먼저 찾으면 바로 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혹시 모르니까 폴트, 수시로 저랑 유의 주변을 다중화면으로 살펴주세요.”

“알겠습니다.”

폴트는 한쪽 손끝을 관자놀이에 짚고 힘겹게 말했다.

부축해줄 필요를 물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결국 유에게 눈짓을 보내 메이드를 맡겼다.

경황이 없어 나까지 어질어질한 가운데 우리는 방향을 정했다.

유가 랑이 가겠다고 했던 화장실 방향으로.

내가 공원 바깥 도시 방향으로.

폴트가 유의 반대방향 공원 안쪽으로.

나는 먼저 출발했다.

우선은 계획대로 빌딩이 늘어선 시가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발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 녀석은 최근에 이사를 왔다고 했으니까…….”

당연한 전제.

랑은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랑은 지금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주제에 가보지도 못했던 거리를 서성이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조금이라도 안정을 얻기 위해 그나마 자주 돌아다녔던 장소로 찾아갔겠지.

어디를 예로 들 수 있을까.

사무실?

아냐, 거긴 도보로 가기에는 너무 멀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휙 도망갔을 거 같지는 않고.

아니면 구청?

여기도 좀 그렇다. 심리적인 접점이 없지 않은가.

그 녀석은 어린애다.

애착이 있는 장소를, 조금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도피처를, 지금의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생각나는 것이 없다.

어린애를 접해본 경험이 많지 않고, 또 생각해보면 내가 랑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

키가 좀 작고 드레스를 좋아하며 이것저것 자꾸 먹으려고 들고.

어색한 말투를 사용하고.

고압적이지만 의외로 금세 친한 척하고.

그리고 또.

또 뭐가 있더라.

씹어 먹을 일이다.

폴트에게 연락할까?

아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면 저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했겠지.

괜히 혼선을 일으켜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내가 랑에 관해서 아는 것이…….

차라리.

심장 한 구석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

차라리 이곳에 한월이 있었더라면.

그 녀석이라면 더 많이 알았을 것이다.

누구나 그 녀석에게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니까.

아까처럼 랑이 울어버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울었다고 해도 한월이라면 잘 다독였겠지. 랑은 그 손길에 안도해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도망칠 때 도망치더라도 어디로 가겠다는 암시 정도는 깔아줬을 것이다.

그 암시를 한월만큼은 분명히 알아차렸을 테고.

이랬으면 안 됐다.

더 친해졌어야 했다. 이해했어야 했다.

도대체 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따뜻한 말을 더 많이 나불댔어야 했는데.

상대방이 어린애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어른스럽게 굴라고 강요했을지도 몰라.

그게 상처가 돼서 쌓이고 쌓이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거야.

고집을 부리는 게 뭐가 나쁘다고.

그럴 나이잖아. 나도 중학교 2학년 때는 별 해괴한 생각을 다 하면서 살았는데.

그만큼 어렸던 나에게 누군가가 ‘넌 당장 부모님과 이별해야 해’라고 매정한 명령을 내린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랑보다 나았을까?

더 담담하게, 지금 내가 랑에게 요구한 것처럼 떳떳하게 버텼을까?

아니.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하려던 짓이 아니야.

이러려고 나오지 않았어.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나섰는데.

이래서야 재인이 경고한 그대로 실현됐을 뿐이야.

이기적이고 불필요한 내가 중요한 회담에 끼어 들어서 모든 걸 망쳤을지 몰라.

차라리 가만히 놔뒀더라면 한월이 알아서 해결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도대체 뭘…….

“씹어 먹을……. 아냐, 됐어,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도 모르게 거머쥐고 있던 얼굴.

땀이 배어나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가 차차 선명해졌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직 선명하다.

그러니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지.

이런 마음으로, 힘들고 지쳐서 아무래도 좋으니까 다 팽개쳐놓고 안식을 얻을 수 있을 만한 곳.

어디라도 좋으니까, 라고 중얼거렸을 때 바로 튀어나오는 명사 어디.

그 어디가 도대체 어디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내게는 사무실이 집이니까 아마 사무실로…….

고개를 쳐든다.

저 멀리 시야에 잡히는 것은 아까 차에서 폴트로부터 들었던 랑 소유의 빌딩.

좋겠다, 저런 빌딩이라도 있어서.

스치듯 그렇게 부러워했지만 지금부터는 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랑의 입장에서 저 빌딩은 쌓아놓은 돈더미 따위가 아니라 그냥 집일 것이다.

당분간 머무를 수 있는 집.

돌아가서 쉴 침대가 놓여 있는 곳.

됐다. 저기다.

왜 이렇게 간단한 것을 몰랐지.

생각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대로변으로 접어들며 더 빠르게.그러다가 주머니에서 툭,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을 더 달렸을까.

이 신도시에서 가장 후미진 골목길이 나타났다.

그래, 여기서 5분 정도만 더 달리면 충분하다.

내 달리기가 빠르니 어쩌면 중간에 랑을 따라잡을지도 모른다.

내딛는 발걸음.

그것이 우뚝 멈추고.

“말씀드렸죠.”

간질간질 뒷덜미를 스쳐오는 목소리.

전신이 망부석처럼 굳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

나는 이래 뵈도 지정능력자다. 위압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솔직히 말해서,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분간했고.

아니지. 구체적인 검증 같은 거 따질 필요도 없이 너무 명확하게, 찾아올 사람이 정해져 있었다.

이 위치를 점하지 않아야 했다고. 이 상황에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고. 주인공이 아닌 너는 이곳에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은 무릇 남을 증오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고, 그런데도 끝없는 증오를 이어나가는 사람은…….

“당신이 자초한 일이에요, C­등급.”

뒤를 돌았다.

난초처럼 고고하게, 단정한 교복을 입고 책 한 권을 쥐고 있는 소녀.

이윽고 책이 펼쳐진다.

폭발하는 위압.

[행동지정: 속독][영역지정: 문예부실]

세상이 그대로 정지하는 것처럼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게 빛났다.

죽을 수야 없지.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여기서 물러나는 건 좀 그래.

나도 무기 정도는 상비하는 편이고.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서도.

[무구지정: 뒤틀림날]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드리죠.”

피차일반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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