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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이냐, 나만 빼고 A등급이게-17화 (17/112)

〈 17화 〉 003. 아뇨, 그런 사람 모릅니다 (4)

* * *

제천에서도 싸웠다.

싸웠다기보다는 그냥 서로 말을 섞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아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손을 붙잡게 만들어도 화해시킬 수 없었다는 것.

논쟁의 화두가 ‘네가 옳은가 내가 옳은가’에서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로 옮겨간 것 같았다.

제천에서도 유명한 한식당에 들렀다. 가끔 대통령이나 해외 귀빈들도 찾아온다는 곳이었다.

나의 경우 이미 배가 부른 뒤였다. 무릎을 꿇은 웨이터들에 의해 서빙된 (왜 이런 비주얼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갈비마저 거의 먹질 못했다.

랑은 진짜로 잘 먹더라. 말 한마디도 없이.

자매는 화해하지 않았다.

가족들끼리 항상 뭉쳐 다닐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운이 좋아 나의 부모님은 선량하고 성실한 분들이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부모를 둔 가정도 많을 터다.

자매가 여기서 갈라선다고 해도 뭐라고 꾸중을 할 마음도 그럴 자격도 없다.

그러니 이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까.

제천에서의 식사가 끝나고 헬기 대신 리무진이 찾아왔다.

내부는 놀라울 정도로 넓어서, 자매가 억지로 붙어 앉는 일 따위는 없었다.

차량은 곧장 서울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를 지나갔다.

나와 유가 같이 앉고, 책상 하나를 맞은편에 두고 랑과 폴트가 있었다.

랑은 휴대폰 게임이나 하고 자빠졌으며 유는 그냥 창문 바깥을 멍하니 관망한다.

폴트는 특별히 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저 여자가 제일 이해가 가질 않아.

아가씨들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도리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나는 유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대로 헤어지면 쟤네 계속 찾아올걸.”

유는 대답이 없다. 일부러 않고 있었다. 한숨이 쏟아지게 만드는구나.

“지정능력이 있다고 그랬어요.”

돌아앉아 랑에게 대신 뭐라고 말하려 했는데, 유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나는 곧장 다시 유의 옆에 앉았다.

유가 말을 이었다.

“총수는 저 아이도 이용할 존재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아요. 딸이니까, 기업을 계승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으니까 지분을 물려주겠다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오빠?”

“애정에 근거한 게 아니다?”

“애정은 인간적이니까요.”

인간적.

오늘따라 이 어휘를 많이 듣게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를 휘어잡는 힘에는 대가가 있어요. 인간적일 수가 없죠. 왜냐하면 사사로운 존재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안 되니까.

체스를 할 때처럼요. 지금 폰을 버려서 상대방의 룩이나 나이트를 제거할 수 있다면, 버려요. 버리는 수밖에 없으니까. 총수는 세상을 체스나 장기를 두듯이 살아요.”

“네 말은…….”

“제가 저 아이보다는 나은 후계자겠죠.”

가까이서 속삭이는 목소리.

수분이 날아간 오렌지의 냄새가 끼친다.

“저는 장녀고, 파계종을 상대하는 무기를 만드는 것이 군수업체의 전업이 된 지금의 시대에 딱 어울리는 고위 지정능력자죠.

저 녀석이 제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랑은 숙청됐을 거예요. 총수는 그렇게 했을 거라구요.”

숙청.

틀린 말이 아니다.

어차피 세상을 굴리는 것은 돈이고, 돈이란 돈은 전부 총수에게 있다.

그러나 왕위를 이어갈 수 있는 자는 하나뿐이니, 왕자 혹은 공주가 둘이라면 누군가는 없어져야 한다.

이런 형태의 비극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평범하게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돌아갈 수 없어요. 차라리 저 아이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편이 나아요. 그게 저 아이를 위해서도 저를 위해서도 옳은 방식이에요. 오빠 생각은 다른가요?”

“아니, 네 말이 맞아.”

시류에 거스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확보해야 할 지점이 생기고 말았다.

제천에서 서울까지는 오래 걸렸다.

그리고 리무진은 남을 정도로 넓었다. 내부의 뒷부분에 칸막이가 있어서 사람 두어 명 정도는 가뿐히 분리할 수 있었다.

추측하건대 간이침실 정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나는 그곳을 랑과 내가 대화할 토론장으로 삼기로 했다.

폴트의 도움을 얻어 간신히 랑과 그곳에 들어섰다.

맞은편에 앉은 랑은 벌써부터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볼에 바람을 잔뜩 밀어 넣고 이쪽을 노려봤다가 시선을 휙 돌린다.

이런 때만큼은 나이대에 걸맞게 어린애 같은 모습이로군.

보통은 애늙은이였지만.

“어떻게 할 거야?”

먼저 물었다.

“그간 지켜본 입장에서 말하는 건데, 네 언니는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만약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또 탈출하거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겠지.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공익.”

부르는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하자, 랑이 원망을 담아서 중얼거렸다.

“미워.”

괜찮아. 악역은 익숙하니까…….

“설득할 거야.”

랑이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득되지 않을 거야. 내가 보기에 너한테는 설득할 능력이 없어.”

“어째서 그렇게 단정하는 것.”

네 언니가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하면 매우 감동적이겠지.

하지만 랑을 납득하게는 만들지 못한다.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느끼는 애정이 커질수록 랑은 포기하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러니 싹을 잘라내는 편이 낫다.

“문제의 근본은 너와 언니 사이에 있는 게 아니고, 너희 어머니와 언니 사이에 있어.

그렇지만 너는 총수님을 수정시킬 수가 없잖아. 타협이 안 된다고, 그거는. 타협 없는 협상이나 설득은 없어.”

“하지만…….”

“기본적인 거야. 아주 기본적인 거. 너는 총수님에게 유의 뜻을 따르라는 요구를 해서 그걸 관철시킬 수 있어? 그 정도도 보장하지 못하는데 유가 설득될까?”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니까…….”

“가족이기에 더더욱 안 되는 게 있어.”

나는 랑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턱 얹었다.

바로 거부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랑은 밀쳐 내거나 하지 않았다.

천천히,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길게 기른 앞머리는 인형의 것처럼 깔끔하게 정돈돼 있어서 어지럽히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언니와 다르게 포도를 기조로 한 것 같은 달달한 냄새를 느끼며 나는 말했다.

“함께 있으면 좋겠지. 나도 부모님이랑 같이 있는 게 혼자서 버티는 것보다 나아.

그렇지만 어른이니까. 벌써 다 커서, 알바로 번 돈도 용돈으로 부쳐드리고, 추석에 선물 같은 것도 보내드리고, 그럴 나이가 됐으니까 떨어져서 사는 거야.

언제까지고 함께 있을 수는 없어.”

“그건 공익의 방식. 제갈 가문의 방식이 아니야.”

“네 언니는 자신을 제갈 가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그렇게 말하자 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인가, 소중히 여겨 깊게 감추었던 것이 남에 의해 파헤쳐져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눈매였다.

랑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뭐라고 말하려고 뻐끔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닫힌 입술이 조금씩 떨렸다.

마음이 닿았을까.

의문이 찾아올 즈음, 돌연 랑은 내 손을 붙잡았다.

그것마저 떨리고 있다는 것은 잠시 후에야 깨달았고, 그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물방울이었다.

툭, 떨어진 무엇인가가 손등 위를 적셨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눈물.

“아니야, 왜 언니가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랑은 울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당황한 나는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아까 랑이 그랬던 것처럼 무엇이라도 입에 담으려다가 결국에는 그만두었다.

그 대신랑은 내 손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것으로 자기 눈가를 닦기 시작했다.

축축함. 습기. 포도를 하루 정도 술에 절여 놓은 것 같은 냄새.

랑이 필사적으로 물었다.

“언니는 내 가족이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가족이었고, 같이 소풍도 갔고 같이 샹체도 뒀고 같이 게임도 했어. 같이 공부도 했고, 그러다가 싸우기도 하고 그랬고…….

그래서 가족, 가족이야! 그런데 왜 언니가 제갈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왜? 이해할 수가 없어. 왜? 그럼 언니는 도대체 어디 사람이야?”

“내 말은.”

쏟아지는 모든 것을 재워 놓고.

일단 잠든 입술을 틀어막고.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아니, 일단 너랑 네 언니가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건 이해가 돼?”

“모르겠어.”

“15살이잖아, 이게 이해가 안 돼?”

“무슨 말인지는 아는 것. 하지만 암만 그래도 나랑 언니는 가족인데…….”

가치판단이 사실판단을 가로막는다.

랑에게는 유라는 소중한 언니가 있고, 그녀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만일 앞서 말한 당위를 해치고 마는 잔인한 사실 따위가 나타난다면 사실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인정받는 것은 끽해야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랑은 지금 그보다 몇 살이나 더 먹어서, 신체는 이미 중학생의 수준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랑은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모르겠다.

이걸 내가 알려줘야 하는 것인가? 남이 알려줘서 의미가 있나?

나는 방금 전까지 설득을 위해서는 내가 내어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랑을 설득하는 주제에, 그녀에게 던져줄 것이 없다.

아니, 지금은 자가당착을 따질 때가 아니지만서도.

나는 다만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버린 것이다.

한월이 여기 있었다면.

그 녀석이었다면. 갈 곳 없는 유를 받아준 그 녀석이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자가당착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을 해주었을까?

그래서 랑은 납득하고 제 자리로 돌아가 언니에게 사과하며, 나는 이제 돌아가 보겠다고 선언할까?

교정.

이 아이를 여기서 고쳐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재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인은 그런 식으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게 정말로 옳은가.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없애버리겠노라 다짐하는 재인이 올바른 길에 매진하고 있는가.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확신이 없다.

“공익.”

이어갈 단어를 찾아 헤매는 도중에, 랑은 나를 가리켰다.

그녀가 선포했다.

“방해하지 마.”

칸막이를 슬쩍 열고 소녀는 나가 버린다.

눈물은 제대로 닦았을까.

이런 바보 같은 걱정이나 떠올리는 찰나, 답지 않게 리무진은 덜컹거렸다.

휘청거린 나는 뒤통수를 문고리에 박았다.아픔이 몰려왔다.

그러나 뭐라고 소리 지를 수가 없어서 그냥 거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서울.

마지막에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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