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정신 나갈 것 같아 4
* * *
원숭이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다. 기분 더럽네 이거. 그리고 등이랑 목이 엄청 쑤신다. 뻐근해 죽겠어.
당일에도 괜찮고 다음날도 괜찮고, 그다음 주까지 멀쩡하더니.
꿈속의 얼굴들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려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휘휘 털었다. 피는 뜨겁고 머릿속이 무거운 것 같다.
"깼냐?"
지금 피가 식었다. 나 진짜 깜짝 놀랐어.
누군가 옆에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뚱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림자. 그 정체는.
"지혜야?"
"지혜시다."
놀라서 그런지 잠이 덜 깨서 그런지, 혀가 덜 풀려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뭔데, 뭐, 몇 시야?"
"5시. 미친놈아. 잠 좀 자자."
왜 남의 침실에 쳐들어왔나 싶었는데.
"많이 시끄러웠냐?"
"존나."
지혜는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하품인지 한숨인지 모를 깊은숨을 쭈욱 토해냈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가 싶더니 컵에 물 한잔을 채워 와서 건네주었다. 그제서야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져 감사히 받아 마셨다.
차가운 물 한 컵을 그대로 들이키니 겨우 살 것 같았다. 머리도 좀 식는 것 같고.
"보일러 틀어 놨다. 샤워나 해."
"고맙다. 근데 난 찬물 샤워가 더 좋은데."
"지랄 말고, 그리고 저번처럼 졸립다고 의수 차고 샤워하면 죽여버린다."
지혜는 그렇게 툴툴거린 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한창 바쁘고 피곤할 시기에, 미안해서 어떡하냐 이거.
지혜 말대로 의수를 떼어낸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
확실히, 따뜻한 샤워가 훨씬 나았다. 긴장이 풀리고 머리 속이 텅 비었다. 전부 기억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고 전부 잊는 것은 매정한 일이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는 것은 그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한층 편안해진 마음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아직도 6시가 되기 전이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이제 와서 잠을 자기도 그렇고.
원래 당번은 아니지만 오늘 아침은 내가 차려야 할 것 같다.
"야, 안쪽에 브로콜리 유통기한 불안한데 그거부터 써야지."
"제발 그런 건 너나 드세요."
기껏 차려준 아침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받아먹으면서 투덜거리기까지 한다. 결국 지혜는 기어코 손수 내린 커피까지 대령 받은 후에야 만족스럽게 웃음 지었다.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식탁 정리를 하고 있자니 지혜가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여유롭냐? 출근 안 해?"
"오늘은 좀 천천히 가도 돼."
"뭐?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또 쉬어?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할 일 없으면 연구실이라도 와서 좀 일손이나 보태던가."
"응꺼져."
하루하루 일에 쫓기는 직장인은 남의 승진 소식보다 휴근 소식에 더 배알이 꼴리는 법이다.
느긋이 설거지를 하고 있자니 그 한가로운 모습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잔뜩 골이 난 지혜는 투덜거리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지혜는 생각 밖으로 멀쩡한 차림이었다.
"얼추 끝났나 보다? 네가 사람 꼴을 다 하고."
"그렇지 뭐……. 근데 너 혹시 오늘도 그거야? 병원?"
"어."
저번 주에 갔다 온 것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지혜의 표정이 잠깐 굳었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 휙 돌아서 현관으로 나갔다.
곧이어 지혜가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설거지를 마쳤다.
답답한 심경으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 길로 그대로 병원을 향했다. 꿈자리가 뒤숭숭한 탓인지 저번 주에 병원을 갔을 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하다는 감각은 주변 일을 괜히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낯선 풍경 속에서는 평소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도 쉽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저기서 쭈뼛거리며 슬그머니 지나가려는 후배를 발견한 것은 그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림이?"
예림이는 움찔 어깨를 떨더니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이쪽을 돌아봤다.
"선배? 왜 여기에……."
"너랑 똑같을 것 같은데."
병원 로비. 한산한 듯 분주한 넓은 홀 한가운데에서 우연히 마주친 우리는 그대로 나란히 상담실로 걸어갔다.
저번 주 셋이서 함께 들렸던, 정신과 진료를 겸하는 곳으로.
"넌 몇 주?"
"…오늘 포함해서 4주요."
"그냥 상담? 그럼 나랑 똑같네."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상담 결과 무슨 문제가 발견된 것일 수도 있고 그냥 나처럼 한동안 상담을 받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굳이 캐묻고 그러기에는 그, 좀… 예의라는 게 있다.
혹시나 해서 주변을 찾아봤지만 민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행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일단 후배 하나는 정신 상태가 멀쩡한 듯 하니 다행이라고 치자.
거기에 개인적으로 조금 안심한 것이, 추가 상담 받는 게 나 혼자였으면 좀 불안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같이 진단 받는 동지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나 미친놈 아니라고.
"기왕 만난 거 밥이나 같이 먹을래? 너도 오늘 휴근이지?"
"그렇기는 한데……."
예림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선배만 좋으면 그럴게요."
"나야 당연히 좋지."
예림이가 갑자기 시선을 피하면서 그거로 대화가 뚝 끊겼다.
예나 지금이나 용건만 딱 말하고 끊어버리는 게 똑같다.
예절 교육.
선후배간 예절 교육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 혹시 거기?"
어쩐지 어색하여 걸음을 서두르는데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제발 모르는 사람. 제발 모르는 사람. 진짜, 제발. 여기서 아는 사람 보기 싫은데 진짜.
"맞군요. 다행입니다. 어떻게 연락드려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여기 이 말쑥한 차림의 남자는 어디를 보나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시죠?"
가능성으로 꼽자면 사생활을 파헤치는 악질 기자일 수도 있고, 악질 스토커거나, 악질 스카우터일 수도 있다.
다행히 그렇게 질이 좋지 않은 부류는 아니었고, 다만 저렇게 반가워할 사람도 아니었다.
"저번 주에 그… 제가 실례를 조금 했습니다."
"저번 주? 아."
이제야 기억났다.
저번 주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그 사람이다. 침도 흘리지 않고 괴성도 지르지 않아 알아보기는 힘들었지만.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혹시 다치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죠?"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여쭤보고 싶은데요, 어디 크게 다치신 곳은 없으시죠?"
"네?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다. 혹시나 했는데 문제가 커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데 그럼 시비를 걸려는 것도 아니고 책임을 물으려는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말을 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라면 어색해서 모르는 척 바로 도망갈 것 같은데.
"그게, 혹시 제가 식사를 한번 대접해드려도 될까요?"
"네?"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그, 저 때문에 괜히 애먼 사람들만 다칠 뻔 했는데 선생님들 덕분에 원만히 수습이 되어서…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별 것 아니지만 식사라도요."
아무리 공짜 밥 싫다는 사람은 없어도 이건 좀……. 자리가 너무 어색할 것 같다. 적당히 거절하려는 데 예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상관 없어요."
직접 치고 받았던 당사자라 더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하기야 마냥 거절해도 서로 불편할 일이기는 하다. 그냥 밥 한번 먹고 서로 풀어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고.
"선배는요?"
"나야 뭐. 너만 괜찮으면 괜찮지."
"네. 그러면…"
"그럼 저희가 지금 병원 예약이 있어서, 끝난 뒤에 연락 드릴게요. 이름이?"
"김성필입니다"
결국 그냥 그렇게 되었다.
김성필은 환하게 웃으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도리어 불안한데, 사람이 좋은 건지 꿍꿍이 속이 있는 건지.
그렇다고 밥 한번 얻어먹기가 무서울 정도는 아니고, 어차피 한 끼 먹고 헤어질 사이인데 별 상관 없을 것이다.
*
"예림아, 저녁으로 뭐 먹을래?"
그 말과 함께 민하의 움직임이 흐트러지며 혜은이에게 일격을 허용하였다.
둘은 훈련용 장비로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괴물을 잡는데 대련이 무슨 소용이냐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지만 난 대련 또한 훌륭한 훈련법이라고 생각한다. 실전 감각을 익힐 때,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몸에 체득시키는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승부 결과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혜은이가 그만큼 근접 전투술을 훌륭히 체득했다는 뜻도 되고, 민하가 순간 실전 감각을 잃었다는 뜻도 된다.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은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얼마 전부터 혜은이는 새로 가까운 거리에서의 전투법을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책임자로 민하를 앉혀 놓았다. 민하 또한 활을 주 무장으로, 단검은 부 무장으로 삼는 하이브리드 타입이라 혜은이에게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고 난지 몇 주나 지났다고, 민하는 벌써 혜은이에게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칭찬부터 할까, 혼내기부터 할까?
"잘했다. 혜은아. 정확히 꽂아 넣었네. 집중력이 많이 늘었어."
우선 칭찬부터. 혜은이는 내 말에 겸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순간 이상적인 궤도가 느껴졌고…… 거기에 맞춰 휘둘렀을 뿐입니다."
[크아악…….]
"개소리는 하지 말고. 그리고 민하는 잠깐 와봐."
민하를 불러 옆자리에 앉혔다. 불온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혜은이는 그 사이에 도망을 가고 예림이는 말없이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혜은이 실력이 많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고 방금 움직임이 좋았던 것도 사실이야.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빈틈을 보인 게 잘한 건 아니지. 아무리 실력이 낮은 상대랑 대련을 하더라도……."
"선배. 예림 씨랑 어디 가요?"
"씁, 선배 말을 다 잘라 먹고."
민하는 바로 앞에 있는 나 대신 옆에 있는 예림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 만이 차갑다. 예림이는 그런 눈빛을 받아내면서도 아무런 흔들림 없이 조용했다.
"민하야. 이쪽."
마지못해 다시 고개를 돌린 민하를 한참 동안 혼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옆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제대로 듣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할 수 없다. 강경 수단을 동원할 수 밖에.
"안되겠다. 앞으로 너 쉬는 날마다 나랑 다시 훈련 좀 하자."
정신머리를 그냥 다시 붙잡아 놔야겠다. 얘가 정신을 못차리네.
"…네? 아, 좋아요."
진짜로 미친 것 같다. 휴일 반납하라는 말에 반색을 다 하고.
"언제부터 할까요? 금요일?"
적극적인 태도에 도리어 내가 부담스러워 말을 어물거렸다.
"이번주 금요일? 어, 괜찮을 것 같은데.
금요일이 쉬는 날이 맞던가? 맞는 것 같다. 그럼 훈련장 따로 예약한 다음에 체력부터 풀코스로…….
머리 속에 계획을 정리하는데 톡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이 있었다. 예림이다.
예림이와 눈을 마주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날은 안된다.
"아. 그날은 안돼. 약속이 있어서."
진짜 미친 것인지 왠지 모르게 들떠 있던 민하의 눈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민하는 예림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시선을 고정하면서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약속, 누구랑요?"
"예림이랑 성필이."
"……성필? 남자에요?"
"어, 김성필이라고, 얼마 전에 병원에서……."
거기서 겨우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통원하며 상담을 받는 중이라는 건 민하에게 비밀이었다.
"……흐음."
그런 내 태도에 문득 민하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