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정신 나갈 것 같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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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은 자리를 무겁게 만든다.
입이 무거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발이 무거워 함부로 떠날 수도 없다.
윤현수가 상담실로 들어가고 난 뒤 찾아온 정적은 그토록 묵직했다.
두 사람뿐인 복도에서 유민하와 김예림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유민하는 김예림 옆에 한 칸의 간격을 두고 앉았다. 친근하지도, 거북하지도 않은 거리감이었다.
적당한 거리였다.
손을 맞잡을 수도 있지만, 주먹을 내뻗어도 충분히 닿을 만한 거리. 대화를 나누기도, 대화 이상의 무언가를 나누기도 충분한 거리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민하였다.
"저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
할 말을 잃는다는 말이 있다.
"다음 주에 또 오라고요?"
"네."
저도 모르게 멍청한 목소리로 내뱉은 질문에도 의사는 한없이 친절했다.
"한 몇 주 정도만 통원하면서 상담받으시면 될 거예요."
"아니, 선생님. 잠깐만요."
그런데 사실 말이라는 게, 친절하게 말한다고 더 이해가 잘 되고 그렇지는 않다.
아니 상황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데 친절하고 뭐고 무슨 소용이야.
"전 지금 아무 문제도 없는데요.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아니면 혹시 뭐 이상한 게 있었나요?"
의사가 하는 말은 별것 아니어도 무서울 때가 많다. '확인해보자' 하는 말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무슨 문제가 있나 걱정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신과 진료의가 그런 말을 한다? 솔직히 겁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자 의사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듯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차트를 보니까 마지막으로 상담 받으신 지 좀 되셨더라고요?"
"그야 문제가 없으니까……."
기록을 계속 훑어보던 의사의 입에서 문득 '아'하는 소리가 나왔다.
"10년 전부터 헌터로 일하셨다고요? 그러면 상당히 어린 시절부터 헌터 일을 하셨다는 건데…….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이 한마디에 가슴은 더욱 졸아붙었다. 진짜 무슨 문제가 있나?
다행히 내 오해와 불안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의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길드에서 헌터들더러 의무적으로 카운슬링을 받으라고 하잖아요.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교육하고요. 그래서 나이 드신 분들은 몰라도 젊으신 분들은 대부분 큰 거부감이 없으세요. 그런데 환자분께서 유독 어렵게 생각하시길래 제가 조금 당황을 했네요."
"아……. 근데 그러면 그건 알겠는데, 계속 통원하는 건 왜 그렇죠?"
"다른 게 아니라 원래 정기적으로 받으셔야 할 카운슬링을 전부 빼먹으셔서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한 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놀라셨다면 죄송하네요."
뒤이어 헌터가 정기적인 카운슬링을 받아야 할 필요성과 의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전부 예림이와 민하를 설득할 때 내가 꺼냈던 말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내가 했던 말이랑 똑같은데 거기에 반박이라도 하면 내 얼굴에 침 뱉는 것밖에 더 되나.
결국 나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의사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예약 날짜까지 확인한 후 상담실을 나왔다.
속이 조금 쓰라린다. 확실히 내가 어려서부터 쭉 헌터일을 해와서 그런가 조금 사고방식이 낡은 면이 있는 것 같다. 이게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면서 꼬장 부리는 거랑 뭐가 다르냐.
근데 그래도 내가 삼촌보다는 낫겠지.
말하자면 나는 이전 세대와 현재 세대의 중간 지점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둘 사이를 잇는 교두보가 되는 것이 내 본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사고방식이 낡은 것이 아닌 양측을 모두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유연성과 포용력을 가지고 있는 참된 선배인 셈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복도로 나와 예림이와 민하를 찾았다. 서로 좀 어색할 텐데 많이 둘만 남겨둔 것이 조금 미안했다.
그래도 처음처럼 마냥 어색한 것은 아닌 것 같다. 헌터 일이라는 게 서로 같이 고생도 많이 하고, 일하는 내내 계속 얼굴을 보면서 지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친해지게 되어있다.
물론 개성적인 인원이 많아서 예외도 많지만, 그 둘은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 잠시 둘을 남겨둔 것이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먹질 한 번에 주변 공기가 요동치는 광경을 보았다.
"왜?"
수준 높은 각성자들의 싸움은 맨손이라 하여 얕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 공기가 비틀리며 비명을 지르고 쪼개지는 바닥이 울음을 토한다.
그 말인즉슨 같은 소란을 벌이더라도 처벌의 수위가 훨씬 높다는 말이었다. 헌터의 경우 헌터 라이센스가 정지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제발 우리 팀에는 그런 불상사가 없기를 바랬는데.
얼굴을 향해 곧장 내질러지는 주먹을 우아하게 걷어내는 저 기술은 분명 예림이의 것이었다.
"예림아!"
다급한 외침에 그대로 반격을 가하려던 예림이의 손이 멈췄다.
그 틈에 상대가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상황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민하야?"
나는 예림이가 누구와 싸우고 있었는지 깨닫고 경악했다.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랑 왜 싸워?
"선배!"
민하는 은폐 스킬로 숨어있었는지 슬그머니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민하야. 이게 뭐냐? 쟤네 왜 싸워?"
"모르겠어요. 갑자기 저쪽이 달려들어서……."
민하가 설명하기를, 복도에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저 남자가 갑자기 다가왔다고 한다.
눈이 충혈되어 있고 손도 덜덜 떠는 것이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는데, 갑자기 달려들길래 예림이가 상대하고 자기는 숨어 있었다고.
나는 짧게 침묵한 후 말했다.
"그럼 저쪽에서 시작한 거니까 정당방위네?"
"그렇긴 하죠?"
"다행이네."
정당방위면 어쩔 수 없지.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옆자리 벤치에 앉았다. 민하는 어딘가 질색한 듯 쳐다봤지만 냅다 도망간 년은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그리고 아마 이 정도 소동이면 예림이가 금방 제압할 것이다. 괜히 끼어들면 문제만 더 복잡해지겠지.
A급 헌터를 폼으로 딴 것도 아니고,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제압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아닌가? 손 좀 보태야 되나?"
"전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는데. 쟤 뭐하는 놈인데?"
의외로 싸움은 박빙으로 흘러갔다.
상대도 각성자인지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마 가속, 신체 강화, 그리고 염동이랑 다른 전투 계열 능력 몇 개.
움직임은 거칠었지만 자기 능력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니 제법 위협적이었다. 반면 예림이는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능력을 제한해 가면서 싸우는 것에 난항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그걸 감안해도 움직임이 어딘가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나, 다음 순간 예림이 상대 남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좋다. 이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대로 넘어뜨리건 업어치건 자유롭다.
"어? 야."
하지만 조금 과했다. 예림이는 당장이라도 손목을 꺾어버릴 듯 과격하게 비틀었다. 꺾인다. 부러진다.
"야, 그만. 그만."
진짜로 부러지기 직전, 겨우 팔을 붙잡았다.
예림이는 살짝 입술을 짓씹었고 난동을 부리던 남자는 그 와중에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발작을 일으켰다. 이대로면 남자가 자기 손목을 자기 힘으로 부러트릴 것 같아 관절기를 풀어버리고 왼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잠깐 찌릿합니다."
VP전류파. 저번에 의수를 개량하면서 새로 달아 놓은 무기였다. 괴물 전투용으로는 위력이 조금 부족했지만 가볍게 마비를 먹이거나 대인전투에 활용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니 운이 좋았던 셈이다. 이렇게 빨리 테스트할 기회가 다 오고.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기절했다.
정신을 잃은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나는 넘어지는 와중에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넘어뜨린 후 그대로 눕혀 상태를 확인했다.
"죽진 않았네."
"다행이네요."
"예림이 표정은 안 그렇다는데? 왜, 이 사람 안 다쳐서 실망이야? 은근 성격 나쁘다 진짜."
"아니, 아니에요."
예림이는 표정이 착잡해 보였다. 아무래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도움을 받은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인전에 약한 건 요즘 세대 애들 특징이니까, 선배인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줘야 할 부분이다.
곧이어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달려와 상황을 수습했다.
다행히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있었고 CCTV에도 상황이 모두 녹화되어 있었다. 거기에 헌터 라이센스의 권위를 빌리니 어렵지 않게 해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 왜 이랬대요? 보니까 각성자 같더니."
"그게, 정기적으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때를 놓쳤답니다."
"저런. 어쩌다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난동범에 대해 질문하자 병원 보안 담당자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번에는 일이 바빠서 병원에 못 왔는데, 오늘 예약을 잡았던 것도 갑자기 취소되었답니다. 그래서 조금 늦게 다시 진료 예약을 잡고 기다리다가 그만……. 어디 헌터 길드에서 급히 예약을 넣었다는데, 자세한 사항은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말씀드릴 수는 없네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대충 이해하지 않았냐는 듯 눈썹을 찡긋였다.
우리 탓이었구나.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준 후 자리를 나섰다. 연락처도 남겼으니 따로 문제가 생기면 연락이 올 것이다.
증언을 마치고 나오니 이미 저녁이었다. 그대로 예림이와 민하를 집까지 데려다준 후 귀가했다.
원래는 상담만 끝내고 나면 쭉 쉬는 날이었는데, 왜 이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소파에 누워있던 지혜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히죽히죽 비웃기 시작했다.
"야, 삼촌한테 다 들었다. 정신병 옮으니까 내 집에서 꺼져."
놀릴 거리를 잡았다는 듯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정신과 상담은 함부로 조롱거리로 삼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골든 타임을 놓치고 마는 거겠지.
이런 현실에 대한 개탄을 담아, 간결하고도 신사적으로 응대했다.
"퉷."
전염
여기는 너만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아악! 이 미친 새끼 진짜 뱉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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