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나는 아리아 소식지를 펼쳐 들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와 로저 공작에 대한 글은 무려 소식지의 1면을 떡하니 장식하고 있었다.
본문에는 로저 공작과 내가 얼마나 화려한 마차를 타고 번화가에 등장했는지, 그가 얼마나 나를 극진하게 모시며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해 쓸데없이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정말 환장할 포인트는 식당에 들어간 이후의 대목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로저 공작은 마치 한봄에 피어난 수줍은 들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에 근처 테이블의 영애들이 얼마나 앓는 소리를 내었는지는 서술하지 않겠다.
다만, 그 아름다운 웃음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계속하던 대공비에게는 진실로 놀라움을 표하는 바이다!〉
‘이, 이게 뭔 헛소리야…?’
소식지를 든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로저 공작이 수줍은 들꽃… 뭐 어쩌고 어째?’
아니, 물론 로저 공작이 잘생긴 건 맞지만. 애당초 우리는 그런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애초에 따지자면 이런 수식어는 귀부인인 나한테 붙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도 내가 왕년에 사교계의 얼음꽃이었는데!’
말문이 막힐 정도로 황당하다 보니 민망하다고 생각했던 호칭까지 아쉬워질 정도였다.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표정이 썩어들어 가자 소식지를 가져다준 비비까지 덩달아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비비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마, 마니이이임…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단호하게 튀어나온 말에 비비가 하압, 하고 입을 물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내용은 가관이었다.
꼴랑 밥 한 번 먹은 것 가지고 내가 마치 대공과 공작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것처럼 희대의 소설을 써 놨기 때문이다.
“하, 아리아 소식지 필자 안 되겠네?”
그동안 대공과 내 얘기를 괜찮게 써 주길래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 무서운 사람이었네!
의견란은 더 가관이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소식지를 읽고 싶다 했더니….
-이거 진짜예요? 직접 본 사람 있어요? 난 믿을 수가 없는데.
-제 친구가 봤대요. 로저 공작이랑 대공비랑 아주 분위기 좋고 난리였다는데요?
-대공비 그렇게 안 봤는데….
‘보긴 뭘 봐, 이 인간들아!’
의견용 종이를 펼쳐 들고 전투적으로 무언가 써 내려가던 내가 일순 우뚝 그 자리에 멈췄다.
“마님…?”
“잠깐.”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피가 싸하게 식었다.
‘이런 미친! 이안 클라우드!’
그 인간도 이 소식지를 본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비비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마, 마님?”
“다이닝 홀로 가야겠다.”
“마님, 마님?”
비비가 나를 붙잡기도 전에 거의 뛰다시피 걸어 일 층의 다이닝 홀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이안의 손에는 떡하니 아리아 소식지가 들려 있었다.
‘망했다.’
낭패감이 파도처럼 머리를 덮쳤다.
슬금슬금 다이닝 홀로 들어가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저, 대공?”
내 조심스러운 음성이 홀 안을 울렸다.
이안이 소식지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끌어 올려 나를 쳐다보았다.
“…….”
입을 꾹 다물고 날 스윽 훑은 그가 소식지를 놓고 식기를 집어 들었다.
평소라면 들려왔을 딱딱하고 기계적인 어투의 ‘좋은 아침입니다, 날씨가 좋군요.’ 따위의 말은 없었다.
‘이미 다 읽었군.’
힘이 탁 풀리는 느낌에 다시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조용히 그의 오른편에 가 앉았다.
정작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손에 땀이 고였다.
곁눈질로 슬슬 그를 살피던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아니지. 내가 죄인처럼 굴 게 뭐가 있어? 난 당당한데!’
따지고 보면 그랬다.
로저 공작과의 식사는 이안에게 동의를 받은 일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깔끔하게 식사만 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소식지의 내용이 상상 이상이긴 하지만, 결국은 로저 공작에 대한 이야기지, 내 이야기는 아니었다.
물론, 제목 어그로는 똑똑하게 나를 지칭하고 있긴 했지만.
‘이 씨, 막말로 내가 얼굴 붉혔냐? 들꽃인지 들깨인지 같은 로저 공작이 붉혔지!’
그런 생각을 하며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앉았다.
뻔뻔한 표정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셔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공작저에 초대를 받으신 줄 알았는데, 데이트를 가셨던 모양입니다.”
“푸흡.”
수 초 전의 결심이 무색하게 하마터면 먹던 물을 뱉을 뻔했다.
“크흠, 아, 그게 말이죠. 헤이든, 아니, 로저 공작가 주방장이 마침 제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쯤 재료를 손질하다 화상을 입었다지 뭐예요. 그래서 로저 공작의 말대로 급하게.”
“사고요.”
그가 짧게 중얼거리며 테이블 왼쪽에 내려 둔 소식지를 훑어보았다.
눈길이 버석한 게, 소식지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식당 이름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급하게 찾아갔다기엔 지나치게 유명한 식당이긴 했다.
뭔가 이상함을 뒤늦게 알아차린 내가 황급히 덧붙였다.
“원래는…! 당일 방문이 안 되는 건데, 로저 공작이 지배인인 남작과 연이 있었던 건지 방문을 받아 주더라고요. 그것도 제일 좋은 창가… 헙.”
하마터면 쓸데없는 소리를 할 뻔했다.
대공비 이름으로 외간 남자랑, 그것도 황제파 가문의 가주랑 한 페이지에 적힌 걸 자랑할 타이밍은 아니지, 응.
다급하게 꼬옥 입을 물자 이안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네.”
그의 입에서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더 물을 생각도 없다는 듯 깔끔하게 내게서 눈길을 거둔 그가 식기를 집어 들었다.
‘끝인가?’
대공가의 위신이 어떻고, 대공비의 처신이 어떻고, 내 의무가 어떻고 줄줄 늘어놓으며 짜증 나는 소리를 할 것 같던 이안은 의외로 조용했다.
다만….
‘혹시 오늘 아침 메뉴로 이미 얼음 한 접시 씹어 먹은 건 아니겠지?’
평소의 건조한 표정 대신 묘하게 서늘한 안색이었다.
그리고 그건 비단 내 착각만은 아닌지, 다이닝 홀의 하인들도 이안과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접시를 내어왔다.
저번에는 광대가 하늘로 솟아 흐뭇한 표정으로 알짱거리더니 이번엔 짤 없이 접시만 놓고 물러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숨 막혀!’
그리고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얼마 전, 이안을 똑똑히 쳐다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간 한 번도 대공비로서 대공저의 명예를 실추시킨 적 없으니,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당신이나 잘하면 된다고.
아무래도 그 말을 지금 다시 주워 담아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대공가의 명예가 실추된 일은 아니지만….
‘아니 근데, 나는 그렇다 치고 로저 공작은 괜찮은 거야?’
이렇게 되면 오히려 난감한 건 그쪽 아닌가.
나는 어차피 유부녀인데다가 같이 식사를 했다는 정도로 언급되었지만, 로저 공작은 대공비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느니 수줍었다느니 따위의 수식어가 붙었으니 말이다.
이 분위기에서 만날 수는 없으니 편지라도 써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조용히 생각을 거뒀다.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한편, 다이닝 홀은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음악을 제외하고는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
“…….”
흡사 내가 엘로이즈 몸에 빙의한 첫날 같은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 이안은 용케도 나와 속도를 맞추어 밥을 먹고 있었다.
‘이쯤 되니 차라리 대공가의 위신이라도 들먹여 줬으면 좋겠네….’
그렇게 몇 번의 접시가 바뀌고 디저트가 나올 때쯤 이안이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럼 오늘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 홀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황망하게 보던 내가 기가 찬 헛숨을 뱉었다.
‘…쟤 설마 지금 삐뚤어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