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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67)화 (67/91)

67화.

이안 클라우드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늦은 오전의 집무실.

글이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들여다보던 그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내내 한 단어가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왜.’

다이닝 홀에서 올라온 직후부터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건 그 한 글자였다.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자청색 눈동자가 책상 구석에 놓인 소식지로 향했다.

“…….”

그것을 집어 든 이안의 눈썹 사이가 살벌하게 어그러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식지는 첫 페이지부터 가관이었다.

로저 공작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느니, 두 사람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느니, 클라우드 대공의 반응이 주목된다느니 하는 본문은 차치해 두고, 그 아래의 의견란이 문제였다.

- 나 같아도 대공이랑 로저 공작이면 못 참죠. 솔직히 둘 다 얼굴은 수도에서 일이 등을 다투잖아요.

- 황족이 아닌 게 아쉽네요… 황족 빼고는 일부일처제잖아요, 법 개정 안 하나….

- 어머머머. 윗분 못 하는 말이 없으셔.

- 뭐, 익명인데 어때요. 그리고 이 기사에도 대공비가 로저 공작한테 호감을 보였단 말은 없는데요?

- 그거야 모르는 거죠. 내년에는 클라우드 대공비가 아니라 로저 공작 부인이 되어 있을지도?

- 나참, 아무리 익명이라도 그렇지 못하는 말이 없으셔요!

- 그런데 로저 공작가랑 클라우드 대공가는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요?

- 그러게요, 대공이 황자일 적부터 썩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고 하던데.

- 그럼 설마 정말 뺏으려고…?

- 윗분 말조심하세요!

엘로이즈와 헤이든 로저 공작의 만남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는 꼴이 기가 찼다.

이런 저급한 말을 의견이랍시고 손수 적은 치들이 귀족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심한 치들 같으니라고.”

이안이 소식지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실, 이 소식지가 무어라 떠들어 대든 그건 이안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했다.

그녀가 정말로 로저 공작과 밀회라도 가졌다면 모르겠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안에게 동의를 받은 오찬이었다.

물론 대공비가 되어 저급한 소식지에 이름이 실렸다며 그녀를 비난할 수도 있었겠으나, 지난 2년 동안의 추문들을 생각하면 그가 다그칠 일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안 클라우드는 이 소식지와 두 사람의 만남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헤이든 로저는.’

헤이든 로저 공작과는 빈말이라도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었다.

엘리시아의 놀이 친구로 입궁한 헤이든 로저는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다. 제 아비를 닮아 사사건건 웃는 얼굴로 이안을 견제하기 바빴으니까.

이안이 여섯 살 무렵, 세 사람이 함께 갔던 뱃놀이에서 황후파 귀족이 이안을 습격하자 엘리시아가 그를 대신해 다친 일이 있었다.

다행히 부상이 크진 않았으나, 이후로 헤이든 로저가 이안을 엘리시아의 안위를 위협하는 존재쯤으로 생각한다는 건 알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황성의 월례 행사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한데 이제 와서 대공비에게 접근을 한다고….’

그리고 신경이 쏠리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아, 그게. 헤이든, 아니, 로저 공작가 주방장이.”

‘언제부터 이름을 부르는 사이였지?’

그녀는 2년간의 결혼생활을 할 동안 이안을 한 번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이안이 스스로 이유도 모른 채 기분이 내핵까지 가라앉아 있을 즈음,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카일이 등장했다.

“주구운! 저 왔… 어이쿠.”

집무실에 들어오기 무섭게 심상찮은 분위기를 직감한 카일이 어깨를 움츠렸다.

“오늘은 또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집무실 들어오는데 숨이 턱 막힐 뻔했습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카일이었다.

이안이 내내 아리아 소식지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떼어 그를 쳐다보았다.

살벌한 기세에 움찔 떨던 카일은 소식지와 이안을 몇 번 번갈아 보고선 씨익 웃었다.

“아하.”

눈치 하나는 귀신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공비 전하와 로저 공작의 이야기가 아주 자자하던데요. 오는 길에 슬쩍 살펴보니 오늘 번화가 거리에서도 다들 그 이야기만 하더이다.”

방금 전까지 살살 눈치를 보던 주제에 이안을 약 올리는 실력이 보통은 아니었다.

“근데 뭐, 저라도 그렇겠습니다. 주군과도 간 적 없는 식당을 무려 로저 공작과 가시지 않았습니까? 다들 분위기가 남달랐다나, 뭐라나. 귀족들도 귀족들이지만 제 마탑 놈들도 벌써 소식을 들었는지 아침 내내 그 소리를 하지 뭡니까.”

이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마탑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서쪽 초원에 위치해 있었다.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들어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여간 마법사 놈들은 괴짜인 것으로 모자라 쓸데없이 귀까지 밝았다.

그중 제일은 어디서 별별 소식을 다 주워듣고 나불거리는 눈앞의 카일이었지만.

“근데 로저 공작도 참 이상합니다. 하필이면 대공비 전하와 보란 듯이 거길 가는 심보는 뭐란 말입니까? 정말 대공비 전하께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제 주군이 무섭지도 않은지 입을 털어대는 카일을 이안이 살벌하게 훑었다.

“카일.”

“아니, 뭐. 제가 없는 말 했답니까?”

카일이 뻔뻔한 태도로 으쓱였다.

아직까지 이안의 입에서 풀네임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그래도 아직 입을 털 기회가 남았다는 뜻이었다.

그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샐쭉 웃었다.

“신경 쓰이시죠?”

“…….”

주군의 대답 없음을 용케 긍정으로 알아듣고 그가 낄낄거렸다.

당최 심복인지 원수인지 구분이 안 가는 태도였다.

“언제는 뭐, ‘가문 간의 결속이다. 사사로운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어.’라고 따악! 선을 그으시더니 말입니다.”

혼신의 깐죽거림을 그러모아 이안의 표정까지 흉내 내고선 그가 눈썹을 들썩였다.

“제가 다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으이구.

표정으로 제 주군을 나무라는 건 덤이었다.

“솔직히 이제 인정하시죠. 이쯤이면 위기감을 느끼실 때도 됐습니다.”

“무슨 위기감.”

“모르시겠습니까? 이러다가 정말 몇 개월 후에 대공비 전하가 로저 공작 부인이 된다거나…!”

“카일 엘제이어.”

오, 여기서부터는 더 깐죽거렸다간 모가지 행이다.

치고 빠질 타이밍을 귀신같이 아는 카일은 입을 꾹 다물고 헤실헤실 웃었다.

이안이 살벌하게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카일이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저번에 제가 말씀드린 건 잘 전달하셨습니까?”

“또 무엇을 말이지.”

허어, 카일이 황당하게 입을 벌렸다.

“또 잊으셨습니까? 대공비 전하께서 제게 친히 말씀하셨다 하지 않았습니까. 대공비로서 자신이 하는 노력이 대공께 닿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신다고요!”

며칠 전, 대공저의 정원에서 엘로이즈의 뒤를 쭐쭐 쫓던 카일은 의외의 대박 정보를 입수했다.

엘로이즈는 카일이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겠지만, 카일은 그녀의 고민을 듣는 순간 대공을 향한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눈치 하면 카일 엘제이어 아니겠는가.

그가 이안을 슬쩍 훑어보았다.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충고를 넘겨 들은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말 안 하셨군요?”

“…했다.”

“예?”

“했다고.”

카일의 표정이 처음으로 어벙해졌다.

했다고?

물론 제 입으로 전달하긴 했지만, 이안이 정말로 그 말을 귀담아들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잠깐 얼떨떨하던 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말 하셨습니까? 주군도 발전이라는 걸 하시는군요. 그래서 대공비 전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얼굴을 붉히신다거나.”

신나서 목소리까지 고양된 카일과 달리 이안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실제로 그는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히 카일에게 말을 전해 듣고, 조찬 시간 엘로이즈에게 그녀의 노력을 ‘알고 있다’고 말하긴 했다.

물론 카일이 알면 또 말을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겠냐며 한참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일이었지만, 어찌 됐건 이안에겐 최선의 태도였다.

그러니까, 그때 엘로이즈의 반응이….

한참의 망설임 끝에 그가 말했다.

“…완두콩을.”

“완두콩을?”

“…떨어뜨리더군.”

“예?”

“접시 위로.”

툭.

이안은 그 상황을 그리기라도 하듯 검지를 뻗어 책상을 톡 두드렸다.

동시에 카일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뭐라는 거야.’

카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엘로이즈를 향해 심심한 마음의 위로를 건넸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대공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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