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손님의 대부분이 수도 귀족들이라 그런지 나와 로저 공작의 등장을 의아하게 보는 눈길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상황이 오해를 빚어내기에 충분하다는 걸 인식했다.
‘…어라, 괜히 나왔나?’
어째 다시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티 안 나게 눈을 도록도록 굴리는 사이, 주문을 마친 로저 공작이 나를 향해 말했다.
“지배인이 말하길 좋은 와인이 들어왔다더군요. 시간이 조금 이르긴 하지만 와인 페어링을 주문했습니다. 괜찮으시죠?”
“아, 고맙네.”
주변의 기류를 읽던 것을 그만두고 로저 공작에게로 고개를 고정했다.
‘음, 역시 조심하긴 해야겠네.’
내가 그동안 깔아 놓은 밑밥이 있으니까.
눈이 마주치자 줄곧 나를 보고 있던 로저 공작이 순한 눈을 호선으로 둥글게 휘며 웃었다.
“식사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요.”
“수도에서 제일가는 식당이라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다음에는 꼭 공작저에서 식사를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또 만나려고?
잠깐 시선을 비껴 내려 입술을 물던 로저 공작이 멋쩍은 듯 목을 매만졌다.
“…사실, 대공비 전하께서 만남을 거절하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서신으로 대공이 아닌 나만 초대를 했을 땐 조금 의아하긴 했지.”
물을 마시며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로저 공작이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설마 내가 그 말을 대놓고 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게.”
“대공과는 어릴 때부터 그리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괜찮은 모양이지?”
물잔을 내려놓고 농담조로 묻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으쓱였다.
“자네가 대공을 경계하면 나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
넌지시 말하자 공작의 웃음기 어린 얼굴에 난감함이 스쳤다.
“역시 대공비 전하의 직설적인 말투는 언제 들어도….”
그가 무어라 말하려 입을 달싹인 순간, 서버가 아뮤즈부쉬를 내어왔다.
다진 연어와 새싹 채소를 곁들인 타르트였다.
“이것부터 드시죠, 전하.”
이때다 싶은 얼굴로 로저 공작이 내게 음식을 권했다.
‘…흠.’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짧게 쳐다보고 타르트를 손으로 집었다.
한입에 타르트를 넣자마자 상큼하고 신선한 향이 몰려왔다.
‘맛있어!’
특별한 재료도 아닌데 입에서 사르르 녹는 식감이 일품이었다.
내 커진 눈을 물끄러미 보던 로저 공작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맛에 맞으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지금껏 먹어 본 연어 중에 가장 맛있는걸. 과연 수도에서 제일가는 식당이군. 대공가의 주방장도 이런 맛은 못 낼 것 같은데.”
“그 정도이십니까?”
로저 공작이 쿡쿡 소리 내어 웃음을 삼키고는 제 몫의 타르트 접시를 내밀었다.
“그럼 조금 더 드세요.”
“아니, 괜찮네. 자네도 들게.”
사실 마음 같아선 하나 더 먹고 싶었지만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빙긋 웃은 로저 공작이 대답 대신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매만지다가 조금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저, 사실. 아까 하신 질문 말입니다.”
“응?”
“대공비 전하는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셨잖습니까.”
“아, 그랬지.”
그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말했다.
“…대공비 전하와 좋은 친구 사이가 되고 싶다는 대답으로는 부족할까요?”
“…응?”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하고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친구?”
“네. 사실 대공비 전하에 관한 무수한 소문만 들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만, 실제로 뵙고 나니 대공비 전하께서 참 따스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육촌을 도와주신 일도 그렇고요.”
그가 멋쩍게 목뒤를 매만졌다.
“보통 누군가에게 동정심을 가지더라도, 손수 발 벗고 나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습니까. 대공비 전하 정도의 위치에 계시는 분이라면 더더욱이요.”
슬쩍 내 눈치를 본 로저 공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성급히 초대를 드렸습니다만 당혹스러우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딱히 그런 건 아니네만, 아무래도 가문의 위치가 있지 않나.”
나는 ‘이안이랑 사이도 안 좋다면서 굳이 나랑 친구를 왜 하려는데?’를 고상하게 돌려 말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멋쩍어졌다.
“사실 대공 전하에 대한 건, 드릴 말씀이 많은데….”
“…….”
“어릴 때 부친의 뜻과 정치적 위치 때문에 대공 전하와 데면데면한 사이를 유지했던 건 맞습니다. 하지만 따지자면 저는 황제 폐하의 배동임과 동시에 대공 전하의 놀이 친구이기도 했으니까요. 황제 폐하께 충성할 뿐, 개인적으로 대공 전하께 유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흐음.”
콧소리를 흘리며 대답하고는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처음 로저 공작을 어린 황제에게 소개시켜 소꿉친구로 만들어 준 것도 전대 로저 공작이었지.’
내가 알기로, 전대 로저 공작은 개국 공신 가문의 가주답게 황실에 엄청난 충성을 보이는 인물이었다.
우스갯소리로 황제가 죽으라고 하면 그는 곧바로 칼을 뽑아 스스로 배에 찔러 넣을 거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었다.
‘원작에서는 가볍게 언급된 내용이었지만, 엄청 기억에 남았지.’
그 말을 한 게 다이아나였거든.
“그래도 역시 그대가 정치적 위치를 지키고자 한다면 이건 좋은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전 아버지와는 다르니까요. 폐하께는 다른 방식으로 충성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조금 상황이 여의치 않지만….”
내가 눈썹을 들썩였다.
‘이건 예상 밖의 발언인데.’
강경 황제파인 로저 공작가가 지금과 다른 태도를 취한다면 분명히 정치적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 물론 공식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아직까지는요. 대공 전하와도 이야기를 나눠 볼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그럼 나랑 대공 둘 다 초대하지 그랬나. 그러면 대공과 이야기 나눌 시간도 충분했을 텐데.”
내 말에 로저 공작이 뒤늦게 아래를 향하던 시선을 끌어 나를 응시했다.
그가 물잔을 내려놓고 끄덕였다.
“예, 다만 이번엔 올슨 백작 부인께 베풀어 주신 호의에 감사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다짜고짜 대공께 초대장을 보내면 아무래도 경계를 하실 것 같아.”
“아.”
내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그렇지, 여기 오기 전에만 해도 나한테 경고를 했으니까.’
이쯤 되니 정말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를 대공과 이어지는 다리로 쓰겠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대공비 전하께 감사하고 싶은 것도 사실인걸요.”
“하면 다음엔 대공도 함께 자리를 가지는 게 좋겠군.”
“영광입니다.”
로저 공작이 부드럽게 웃다가, 이내 입술을 가볍게 씹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괜찮은 걸까요? 대공비 전하와 좋은 친구 사이가 되는 일이요.”
암녹색 눈동자에 기대가 가득 차 반짝였다.
…내가 얼굴에 약한 걸 알고 이러는 걸까?
잠깐 스스로에 대한 탄식이 스쳤지만 길지는 않았다.
“…뭐, 상황이 따라 준다면야.”
“정말입니까?”
썩 선선한 대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저 공작은 지금껏 본 얼굴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큰 입매가 호선을 그리자 입 동굴이 시원하게 보였다.
“그럼 앞으로는 편하게 헤이든이라고 불러 주세요, 대공비 전하.”
“아니, 그래도….”
“정말 기쁩니다.”
해맑다 못해 천진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도저히 싫다는 말이 안 나왔다.
결국 호칭은 천천히 바꿔 나가기로 합의를 보았다.
마침 서버가 내어 온 에피타이저에 대화는 한 차례 끊겼고, 이후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로저 공작은 긴장이 풀린 건지 내내 웃으며 대화를 매끄럽게 이끌어 나갔고, 나 역시 오랜만에 편안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진작 눈치채야 했다.
우리의 대화가 무르익으면 무르익을수록, 식당 안 우리를 지켜보는 눈길 역시 노골적이고 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화제의 대공비,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녀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클라우드 대공인가, 로저 공작인가?〉
“이,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