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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하게 가르쳤더니 왜 집착하세요 (64)화 (64/91)

64화.

로저 공작가는 대공가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다. 마차로 30분 정도 움직이자 로저 공작저의 정문이 드러났다.

“…예쁘네.”

잘 정리된 길과 양옆으로 펼쳐진 정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늘어진 나무들.

온통 상아색으로 칠해진 건물 위 녹색의 지붕이 로저 공작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저택도 사람 분위기를 닮나….’

마차에 난 창으로 정신없이 공작가 전경을 구경하고 있을 즈음 마차가 본관 앞에 멈춰 섰다.

로저 공작이 본관 앞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차 문이 열리고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초여름 바람에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칼이 결 따라 흔들렸다.

“오셨습니까, 대공비 전하.”

“로저 공작, 초대해 주어서 고맙네.”

그의 암녹색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뭘요, 흔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자연스럽게 본관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로저 공작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 한데 전하.”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난처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내 물음에 그가 입을 벌렸다가, 잠깐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본래는 유리 온실에서 전하께 멋진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한 시간 전쯤 재료 손질을 하던 주방장이 손에 크게 화상을 입었지 뭡니까.”

내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저런, 많이 다쳤다 하는가?”

로저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주방장의 부재로 계획했던 오찬은 준비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로저 공작은 미처 이런 일은 생각지 못했다는 듯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덩달아 나까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다가, 로저 공작저의 본관을 한번 바라보고선 말했다.

“그러면 그냥 다음에….”

“아니요, 아니요!”

로거 공작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의 암녹색 눈동자가 한껏 드러나 당황을 내어 보이고 있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혹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근처의 근사한 식당으로 모셔도 될까 하고요.”

“하지만….”

“정말 민망하고 송구합니다만, 제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로저 공작이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하고선 내 눈치를 살폈다.

내게 닿았던 시선은 금방 떨어져 바닥을 구르다가, 옆을 보았다가, 다시 내게 고정되며 어렵사리 방황했다.

입이 마르는지 여러 번 혀를 내어 입술을 축이는 모습을 보다가 눈썹을 들썩였다.

‘역시, 그냥 좀 어설픈 강아지 같은데.’

지고 오지 말라며 잔뜩 힘을 주어 치장해 준 비비의 옷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별개로 바깥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건 단순한 초대랑은 결이 다른 느낌이긴 했다.

보통 저택을 두고 구태여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하는 건 단순한 사교 활동이 아니라 가까운 이들의 나들이 같은 느낌이니까.

그걸 알아서 로저 공작도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탓에 구불구불한 앞머리 아래로 가려진 유순한 눈매가 찡그려졌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깔끔하게 거절하고 돌아갈 수도 있긴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대형견 같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약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귀와 꼬리가 축 늘어져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인간, 경계해야 하는 인물 맞아?’

이안의 경고를 떠올리며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려보려고 해도 상상이 안 갔다.

그사이 슬쩍 눈을 끌어 올린 로저 공작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괜찮으실…까요?”

암녹색 눈동자에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반짝한 빛을 냈다.

동그란 눈매와 순한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눈을 깜빡이는데, 분명 로저 공작의 시야가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날 올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 그래도 얼굴이 내 취향이라 숨만 쉬어도 신경이 쓰이는데, 저런 얼굴까지 하고 있으니 도무지 거절의 의사가 안 나왔다.

잠깐 침묵하던 내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

비록 로저 공작과 친밀한 사이도 아니고, 이안과의 관계를 보니 그리 친밀해질 수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내 허락에 로저 공작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꼬리 만 강아지처럼 굴더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드는 것 같았다.

“그럼 공작가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얼떨떨해진 상태로 그에게 끌려가다가, 내 뒤에 서 있는 대공가의 마차와 그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타고 온 마차가 있는데.”

“귀한 객을 대접하는데 다른 마차로 모실 수는 없죠. 대공가의 마차보다는 부족하겠지만, 공작저의 마차도 타고 가시기에 불편하진 않으실 겁니다.”

“아.”

하긴, 그것도 그림이 이상하긴 하지.

금방 납득하고 그의 에스코트를 따라 마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내가 오기 전부터 준비해 놓았던 건지, 말과 마부까지 모두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크림색과 포근한 녹색이 뒤섞인 마차에 나를 태운 로저 공작이 맞은편에 앉았다.

바깥에서 손을 잡을 때는 몰랐는데, 좁은 마차 안에 마주 앉아 있으니 그에게서 포근한 체향이 훅 끼쳐 왔다.

이안에게서 풍기는 서늘한 체향과는 정반대라, 나도 모르게 은근슬쩍 몸을 뒤로 뺐다.

‘이거 좀….’

민망한 것 같은데.

부쩍 낯 뜨거움과 어색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그가 싱그럽게 웃었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대공비 전하.”

***

로저 공작가 마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수도에서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특히 수비드 요리가 일품이라 귀족들 사이에서 자자하게 소문이 난 곳이었다.

로저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가게 간판을 보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당일 예약이 가능한 곳이었던가?”

듣기로는 황족도 최소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내 물음에 로저 공작이 푸스스 웃었다.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아서 될 수도 있는 거였어?

내가 의문을 가지든 말든, 로저 공작은 아주 정중한 태도로 내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이끌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로저 공작 각하, 오셨습니까.”

“비체 남작, 잘 지냈는가.”

“덕분에 늘 평안합니다. 일행분은… 헉, 대, 대공비 전하?”

로저 공작 옆에 일행으로 있는 나를 보고선 비체 남작이라 불린 남자가 숨을 헙, 하고 들이쉬었다.

그가 잠시 당황한 눈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는 사이 로저 공작이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오늘은 이쪽, 대공비 전하를 대접하는 날이니 특별히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데, 비체 남작.”

그의 말에 뒤늦게 비체 남작이 정신을 차린 듯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아유,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작 각하, 그리고 대공비 전하. 이쪽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연신 굽신거리며 비체 남작이 우리를 매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식당 안에서도 가장 채광이 좋은 창가 자리였다.

‘만석인 와중에 창가 자리를?’

놀라움의 연속에 로저 공작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그는 예의 미소만 빙긋 지어 줄 뿐이었다.

이어서 잠깐 손을 놓고는 의자를 빼어 앉으라는 듯 내게 눈짓했다.

“아, 고맙네.”

“뭘요.”

내가 앉는 속도에 맞추어 의자를 밀어 넣어 준 로저 공작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안과 다르게 정말 나를 ‘에스코트’하는 느낌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어떻게 진짜 남자 주인공보다 이쪽이 더 남자 주인공 같을 수가 있냐.’

로저 공작이 원작에는 서브남으로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식당 음식은 전부 괜찮지만, 제 추천은 B코스입니다. 중간에 나오는 닭 요리가 아주 맛있거든요.”

“그럼 그걸로 하지.”

보고 있던 메뉴판을 덮고 끄덕이자 로저 공작이 곧바로 서버를 불렀다.

그사이 식당 내부를 가볍게 둘러보던 나는, 아까부터 묘하게 이쪽으로 쏠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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